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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현비 Nov 13. 2024

불편한 진실일지라도 보지 못했던 것을 보게 만들었다

미켈란젤로 메리시 다 카라바조

때로는 직접 만져봐야만 되는 상처


조금 당혹스럽다. 이렇게까지 깊숙이 넣을 것이라고는 상상을 못했다. 내가 직접 못 자국을 만져보겠다, 옆구리의 상처에 손을 넣어보겠다 그래야만 믿겠다고 했던 말은 그저 삐친 상태의 투덜거림이나 합리적 의심의 격한 표현 정도로 받아들였다. 그런데 이렇게까지 상처에 투박한 손가락을 쑥 넣다니.  


카바라조, <도마의 의심>, 1602, 캔버스에 유채, 107x146cm, 상수시 궁전


성경에 나오는 예수의 부활에 관한 이야기다. 열두 제자 중 도마는 십자가 형벌로 인해 죽음을 맞이한 예수가 부활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직접 내가 그 상처를 보고 만지기 전까지는 안 믿겠다고 선포한다. 이에 예수가 자신의 양손의 못 자국과 십자가 형을 받았을 때 병사들이 창으로 찌른 옆구리의 상처를 보여주며 만져보고 손가락을 넣어보라고 한다.


보는 사람이 다 아플 정도로 손가락을 쑥 넣는 모습에서 도마의 심각한 표정과 이마의 주름, 당장이라도 튀어나올 것 같은 광기의 서린 검은 눈동자, 그런 도마를 향해 지어 보이는 예수의 곡진한 표정이 극적으로 대비되어 이율배반적인 정념이 묻어난다. 때로는 다 알면서도 직접 만져봐야 확인이 되는, 인정이 되는 상처가 있다는 것이 이들의 표정에서 느껴진다. 


출처: https://ko.wikipedia.org/wiki/카라바조


살아남은 자의 슬픔


카라바조의 본명은 미켈란젤로 메리시이다. 1571년 9월 29일 이탈리아 북부 밀라노에서 태어났지만 아버지를 따라 남쪽의 카라바조 지역에서 살게 된다. 훗날 밀라노로 다시 돌아와 화실 생활을 하게 되는데 당시에는 태어난 곳 또는 출신지의 지명으로 화가의 이름을 부르는 경우가 많아 카라바조라고 불리게 된다. 카라바조에서 온 미켈란젤로 메리시라는 뜻으로 그의 이름은 미켈란젤로 메리시 다 카라바조이다. 


카라바조가 6살 때, 흑사병이 한차례 유럽을 휩쓸고도 아직 다 사라지지 않아 카라바조의 아버지와 할아버지는 같은 날 사망하게 된다. 어머니 혼자 자식들을 떠맡아 생계를 유지해야 하는 고단함과 홀로 살아남은 자의 슬픔, 죽음에 대한 공포는 어린 시절의 카라바조의 역동이 되었다. 


어머니마저 13살 때 사망하고, 카라바조는 밀라노에 있는 시모네 페테르자노의 화실에서 도제 생활을 하며 그림을 익혔다. 기성 화가들의 비위를 맞추고 시중을 들어가며 엄격한 위계질서 속 경쟁적으로 그림을 배웠다. 혈기왕성한 십 대들이 모여 거친 일을 하는 화실이 결코 교양 있는 장소는 아니었을 것이다. 부모도 없는 촌구석 출신, 혼자만 눈치 없이 살아남아 어머니마저 힘들게 했던 사춘기의 소년은 거친 환경 속에서 어른의 따뜻한 손길 하나 없이 마구 자라났다. 


카라바조, <성 마태의 소명>, 1599-1600, 캔버스에 유채, 322x340cm, 산 루이지 데이 프란체시 성당


샐러드 주교


스물한 살이 되던 해 카라바조는 로마에 첫발을 디딘다.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이, 그저 떠도는 대로 살아가는 패기 가득한 이 젊은이에게 식대를 제공하며 그림을 그리게 될 수 있는 기회는 금방 왔다. 판돌포 푸치라는 주교는 자신의 성공을 위해 자신의 헌전용 그림을 카라바조에게 그리게 했다. 자유로운 창작활동은 보장되지도 않았고 제공되는 음식이라고는 샐러드뿐이었다. 


한참 먹고 싶은 것, 하고 싶은 것이 많을 젊은이를 샐러드로 붙잡아 두기는 어려웠다. 결국 카라바조는 푸치의 집을 떠나 여러 화실을 전전하는 떠돌이 생활을 하게 된다.


그렇게 28살의 어느 날, 일약 로마 미술계의 거장으로 떠오르게 된다. 콘타렐리 채플을 장식할 두 개의 대형 제단화인 <성 마태의 순교>와 <성 마태의 소명> 제작을 의뢰받고 완성과 함께 커다란 반향을 일으켰다. 


완벽한 구도, 조화로운 색채, 성스러움을 강조한 인물 등 기존의 성서화는 현실 너머의 아름다움이었다. 그러나 카라바조는 빛과 어둠의 대비를 극단적으로 이용하여 현실적인 리얼리즘과 종교적인 사실감을 드라마틱 하게 살려내는 재주가 있었다. 추한 것은 추한 것 그대로, 움직이는 것은 움직이는 상태 그대로 그려낸 이중적인 그림을 보고 사람들은 전율했다. 분명 이것은 하느님이 특별히 내려준 재능일 것이라 여겼다.  


카라바조, <나르키소스>, 1597-1599, 캔버스에 유채, 110x92cm, 바르베리니 궁전


천재는 원래 일반인들이 이해할 수 없어(야 해) 


돈과 명예 모두 얻었으나, 카라바조의 폭력성은 통제가 되지 않았다. 카라바조를 스타로 만들어 준 작품을 그린 1600년부터 약 6년 동안은 감옥을 자기 집 안방처럼 드나들었으니, 그의 폭력성과 분노조절장애는 추기경들과 의뢰인들이 감당해야 할 십자가나 다름없었다. 


막대한 부를 지녔음에도 사창가, 뒷골목의 술집 등 가장 미천한 곳을 전전하며 이리저리 싸움을 걸고 후원자 추기경이 초대한 귀족 한 명을 곤봉으로 두들겨 패는 사건도 있었다. 다른 화가의 그림을 보고는 형편없고 그림도 아니라는 모욕적인 시를 쓰거나 법정에서 소리를 질러대서 고소도 당했다. 


위협적인 칼이나 불법 무기를 가지고 로마의 거리를 돌아다니며 경비원에게 시비를 걸었고, 술집 웨이터 얼굴에 접시를 집어던지고, 집세를 내지 않아 고소당한 것에 대한 보복으로 창문에 돌을 집어던지는 등 기행을 일삼았다. 나중에는 가지고 다니던 칼 위에 넘어지는 사고로 병원에 입원까지 했다. 


망아지처럼 날뛰는 카라바조를 감옥살이를 하지 않게끔, 그림을 그릴 수 있게끔 어떻게든 돕고 이해하기 위해서는 후원자들은 스스로를 세뇌할 명분이 필요했다.


하느님이 준 재능을 가진 자, 그러니 천재란 원래 일반인이 이해할 수 없는 부분도 있는 법이다. 쟤가 저 모양인 것은 우리가 미처 알지 못하는 신의 의도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정말 그렇게 굳세게 믿으려고 노력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은 바람 잘 날 하나 없던 카라바조의 사생활과는 달리 화가로서는 최고의 정점을 찍고 있었다. 수준 높은 작품의 의뢰는 계속 들어왔고 카라바조가 저지른 불미스러운 사건들은 후원자들의 적극적인 중재와 도움으로 해결되었다. 



카라바조, <골리앗의 머리를 들고 있는 다윗>, 1609-1610, 캔버스에 유채, 125x101cm, 보르게세 미술관


그토록 돌아가고 싶던 곳, 영원의 도시 로마


결국 일이 터졌다. 하필이면 부유한 가문의 아들 토마소니를 죽였다. 결투로 인한 우발적 살인이었지만, 살인은 살인이다. 이제까지 저지른 일들은 귀여운 수준의 기행이었고 이번만큼은 아무리 막강한 후원자들이라도 손을 쓸 수 없게 되어버렸다. 로마 법원은 카라바조에게 참수형을 선고했다. 


이번에도 후원자들이 나섰다. 로마를 떠나 도주하도록 카라바조를 도왔고, 그는 나폴리, 몰타, 시칠리아, 다시 나폴리로 이어지는 도망자의 삶을 4년간 살게 되었다. 도피하는 중에도 여러 교회로부터 성전의 제단을 장식할 성화를 주문받았고, 도망자 신세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당대 최고의 화가였다. 카라바조의 작품 중 약 30% 정도는 도피생활 중에 그려졌다. 


사면을 받고 로마로 돌아가기 위해 온 신경을 썼으나, 분노조절장애는 도피생활이라고 해서 나아지지 않았다. 이곳저곳 떠도는 신세임에도 로마의 후원자, 귀족, 성직자들을 위해 꾸준히 그림을 그렸고 로마로 사면될 수 있는 희망이 보였다. 다시 시작하면 된다. 영원의 도시, 나의 삶이 실천되는 도시, 영원한 도시 로마에서. 그러나 열병은 그의 희망을 덮었고, 1610년 작은 항구에서 로마로 가는 길에 사망한다. 결국 로마에 다다르지 못했다. 



카라바조, <병든 바쿠스>, 1593, 캔버스에 유채, 67x53cm, 보르게세 미술관


그는 우리 모두가 보지 못했던 것을 보게 만들었다. 그것이 불편한 진실일지라도


속됨과 성스러움, 선과 악, 빛과 어둠이 양존하는 그림. 테네브리즘이라는 어둠과 밝음의 극적인 대조를 이용해 드라마틱한 효과를 그림에 불어넣고 바로크 미술을 시작을 알렸다. 


그리고 감히 성녀의 얼굴을 사창가의 여성을, 신성한 성인의 얼굴을 하층민의 모습으로 묘사했다. 성스러움보다는 신성모독에 가까운 그림에서 융합될 수 없는 이중적인 모습이 보인다. 본인 스스로도 양면적 인간이었다. 


홀로 살아남아 가진 죄책감을 가진 채 성공했지만 누구보다도 충동적으로 살았고, 동시에 그 상처를 그림에 담아냈다. 빛과 어둠을 동시에 그려 빛을 받은 인물을 극대화하면서 동시에 어둠 속의 인물에 대해서도 이야기한다. 가장 성스러운 사람을 그리면서도 가장 미천한 사람의 얼굴을 넣어 새로운 인간성을 부여했다. 상처받고 불완전한 삶을 사는 사람이야말로 종교가 필요하다고, 고위 성직자들은 보지 못했던 불편한 진실이었다. 


어떤 상처는 직접 만져봐야 하고 들여다보야 한다. 굳이 손가락을 넣어보는 도마의 서슬 퍼런 표정과 그걸 받아들이는 예수의 안쓰러움과 서글픔이 공존하는 표정, 모든 것이 권태롭고 지쳐 쓰러질 것만 같은 다윗의 얼굴, 세상을 향해 원망과 공포를 내뱉는 목이 잘린 골리앗의 얼굴까지. 모두 카라바조가 양면적 삶을 통해 빚어낸 상처의 단상들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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