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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현비 Oct 30. 2024

삶의 아이러니에 압도되어 나의 시각은 날카롭게 빛난다

제임스 앙소르

올드보이 속 그 남자는 우는 걸까 웃는 걸까


영화 올드보이 속 오대수가 15년 동안 갇혀 지냈던 방 안에는 독특한 그림이 걸려있다. 벨기에 화가 제임스 앙소르의 <비통한 남자>라는 작품은 얼핏 보면 오대수와 닮았다. 고통으로 일그러진 그리스도의 얼굴을 그린 것으로 제임스 앙소르가 가장 자신의 존재론적 위기를 겪던 시기에 그린 그림이다. 


흘러내리는 눈물과 핏방울, 잔뜩 일그러진 표정에서 입은 마치 웃는 것처럼 보인다. 광기에 서린 모습은 아무리 보아도 고통받는 그리스도 예수와는 다른 사람처럼 같다. 이 남자는 자아 붕괴의 현실에서 우는 걸까 아니면 웃는 걸까, 둘 다인 걸까.   


제임스 앙소르, <비통한 남자>, 1892, 나무 패널에 유화, 21.5 x 16cm, 안트웨르펜 왕립 미술관

올드보이 속 오대수가 자신의 저지른 잘못을 듣고 자신의 딸에게만은 알리지 말아달라며 빌며 가위로 혀를 자르기까지 하면서 광기의 모습을 보여줄 때의 표정이 마치 그림 속 얼굴과 데칼코마니처럼 보인다. 


제임스 앙소르의 그림에 자주 등장하는 것은 가면, 해골, 자기 자신의 모습이다. 모두가 광기에 서려 정신 나간 표정을 짓고 있지만 결국 그 모든 것들은 화가 자신의 자아들이다. 화해되지 않고 통합되지 않으며 사회로부터 조롱 받아 상처받고 찢어지는 자아들. 그들의 표정에는 섬뜩한 웃음과 울음이 공존한다.  


출처 : https://encrypted-tbn0.gstatic.com/licensed-image?q=tbn:ANd9GcTL55hu3VwW5PEwozrDUMipFvbXOY8yr6M


진짜 사람보다 더 많이 만나봤을 기괴한 가면들 사이에서


제임스 앙소르는 1860년 4월 벨기에 북부 해안도시 오스텐드에서 태어났다. 오스텐드는 휴양도시로 4월의 카니발 축제를 시작으로 여름에 이르는 몇 달 동안의 요란한 시기를 제외하고는 도시 대부분이 비성수기로 조용한 도시였다. 


영국인 아버지 제임스 프레드릭 앙소르와 플랑드르인 어머니 마리아 하에그만은 조부모와 함께 오스텐드 바닷가에서 기념품 가게를 운영했다. 대학 교육을 받고 다양한 언어, 예술과 문학을 즐기는 이상주의자인 아버지는 살림에 큰 도움이 되지는 않았다. 먹고살기엔 그러한 교양들은 아무런 쓸모가 없었고 섬세한 지식인의 지식은 생계에 별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러나 앙소르가 가진 섬세함과 예민함, 예술에 대한 관심을 이해해 주고 격려해 주는 것은 아버지뿐이었다. 


기념품 가게에는 카니발을 위한 기괴하고 강렬한 색감의 가면들이 많이 걸려있었는데, 앙소르는 어린 시절 사람보다 더 많이 만났을 이 가면들에게 예술적 영감을 깊이 받는다. 


특히 앙소르의 할머니는 괴상한 분장을 한 원숭이를 산책시키며, 호기심이 왕성한 손자 앙소르에게 악마, 도깨비, 귀신 등 무서운 이야기를 자주 해주었다. 가면들과 박제된 동물들, 원숭이 사이에서 때로는 공포와 불안에 떨고 때로는 호기심과 환상을 자극하며 상상과 현실 사이에서 자라난다.  


제임스 앙소르, <가면에 둘러싸인 앙소르>, 1899, 캔버스에 유채, 120 x 80cm, 개인소장

살아남을 수 있을까 두렵다


1877년 앙소르는 오스텐데를 떠나 브뤼셀의 왕립 미술 아카데미에 입학했다. 그러나 전형적이고 틀에 박힌 아카데미즘에 대한 혐오와 싫증을 느끼게 되며 곧바로 자신만의 독자적인 탐구로 나아간다. 당시 앙소르의 담당 교수는 앙소르가 기본적 데생보다 채색에 치중하는 것을 질책했다. 결국 앙소르는 자신에 대한 교수들의 몰이해와 아카데미즘의 예술적 규칙에 대한 반감으로 1880 년에 아카데미를 떠난다.


“나는 이런 근시안적인 감옥의 도움 없이 나아간다.”


당당히 자리를 박차고 나아가 고향으로 돌아온 앙소르는 당시 뜻이 맞는 화가들(신인상파, 나비파 등)이 만든 그룹 ‘20인회’에 참가하여 전시회에 작품을 출품한다. 그러나 보수적이었던 비평가들은 특히 앙소르의 작품을 이해하지 못했다. 대담한 색채와 구도를 그리는 기이한 예술가에게 비난이 가해지자, 앙소르는 더욱더 공격적이고 풍자적인 태도로 그림을 선보였다. 

내 예술을 이해도 못 하는 이 바보들아, 보아라. 


비평가들의 비난뿐 아니라 자기중심적에 과민하게 행동하는 앙소르를 동료들은 감당하기 어려웠다. 결국 비평가, 관람객, 동료 화가들까지 모두 앙소르에게 등을 돌렸다. 살롱전과 그룹전시회에서도 거부당했다. 가족 중 아버지만이 유일한 그의 편이었다. 어머니조차 돈 되는 일을 하라며 앙소르를 비난했다. 


“나는 행복하지 않다. 살아남을 수 있을까 두렵다.”


앙소르는 점점 더 고립돼 갔다. 그나마 자신을 이해해 주던 유일한 존재, 아버지마저 1887년 사망한다.  


제임스 앙소르, <1889년 그리스도의 브뤼셀 입성>, 1888, 캔버스에 유화, 252.2 x 430.5, 폴 게티 미술관<

모래밭을 살금살금 내려오는 적의에 찬 대중, 그들은 예술을 싫어한다 


그룹 ‘20인회’는 해체되고(이미 앙소르는 제명당했다), 화가들은 자신만의 화풍을 성립하기 시작하며 조금씩 세상에 두각을 비추고 있었다. 그 누구도 없는 스스로 자처한 왕따였던 앙소르는 창조력의 위기를 겪으며 아카데미 너네 도움 같은 건 필요 없다라는 이전의 포부와는 달리 모든 자신감을 상실한다.


그리고 자신의 작품과 작업실을 8천 프랑에 내놓는다. 하루, 이틀이 지나도 아무도 구매하러 오지 않자 조금씩 가격을 낮추기 시작한다. 

7천8백 프랑에 팝니다, 7천5백에 팝니다, 7천 프랑에 팝니다… 

결국 아무도 사지 않았다. 


이 무렵, 앙소르는 종교 모티프를 사용한 작품들을 그리기 시작한다. <그리스도의 브뤼셀 입성>은 카니발 축제 속의 가면을 쓰고 왜곡된 얼굴을 가진 사람들 사이로 예수 그리스도가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장면을 변주하여 그렸다. 


신앙심이 깊은 사람은 아니었다. 그저 고통받고 있는 그리스도, 우매한 관중 속에서 모두의 구세주로 등장하는 그 모티프에 매료된 앙소르는 그리스도를 자신의 분신으로 여겼다. 세상은 악의와 우둔함, 교활함과 무지로 가득 차 있고 유치하기 짝이 없는 사람들의 끝없는 카니발 행렬과 대조되게 자신만은 그리스도로 위엄 있는 인물로 표현했다. 


이 수많은 얼굴을 그리기 위해 앙소르는 동네를 한 바퀴 돌며 사람들을 관찰하고 들어와서 새 얼굴 하나를 그려 넣었다. 가면 속 군중의 얼굴은 기괴한 가면에 가려져 있지만 본인의 얼굴만큼은 드러냈다. 나의 예술을 거부하는 이들에게 진정한 나의 모습을 보여주기라도 하듯이.


“사람들은 내 그림을 보려고도 하지 않는다. 모래밭을 살금살금 내려오는 적의에 찬 대중, 그들은 예술을 싫어한다.”


<그리스도의 브뤼셀 입성>은 41년이 지나고 나서야 처음 전시된다.  


제임스 앙소르, <가면이 있는 자화상>, 1937, 캔버스에 유화, 31 x 24.5cm, 필라델피아 미술관


나의 죽음을 애도합니다


마흔의 나이가 넘어서도 어머니 수입에 의존하던 돈벌이도 제대로 못하던 과민한 화가는 시대가 변하기 시작하자 점차 인정받는다. 20세기가 시작되었다. 사람들은 제1차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인간 본성과 실존에 대한 회의감과 이중성을 느꼈고, 그 감정과 상흔이 가장 잘 직관적으로 표현된 것이 앙소르의 그림이었다. 


70살 정도가 되어서야 대중의 찬사를 받으며 1929년 알베르 1세에게 남작 작위를 수여받고, 1931년에는 기념비까지 세워진다. 대규모 앙소르 특별전이 진행되며 보기 역겹다던 관람객은 이제 사라지고 대중의 열광적인 관심이 쏟아진다. 1933년에는 레지옹 도뇌르 훈장까지 받으며 갑자기 살아있는 전설이 된다.


폭발하는 인기 속 1942년 벨기에 라디오에서 앙소르가 죽었다는 오보를 하게 되는데, 앙소르는 이를 재밌게 여겼다. 소매에 검은 리본을 달고 자신의 기념비를 방문하며 사람들을 만나면서 농담을 던지며 낄낄거렸다.


“나의 죽음을 애도합니다.”


아흔 살 가까이 삶을 살며 노년을 평온하게 보낸 앙소르의 장례는 국장으로 치러지고 전 국민의 애도를 받았다. 


삶의 아이러니에 압도되어 나의 시각은 날카롭게 빛난다


군중에 대한 폭발적인 분노를 빈 공간 하나 없이 가득 채운 <그리스도 브뤼셀 입성>과는 달리 노년의 자화상은 동네 할아버지같이 인자하고 독기 하나 없다. 행복하지 않다고 살길을 걱정하던 과민하고 기괴한 가면과 해골은 사슴 같은 눈망울을 가진 귀여운 해골로 변했다. 


인생에서 가장 왕성하게 활동하던 시기에 모두에게 거부 받아 고독과 환멸로 가득 찬 주체하지 못하는 빈정거림으로 드러나던 폭력적인 모습은 때로는 조소하고 때로는 울부짖는다. 가면 속의 진짜 표정은 아무도 알 수 없다. 


인생은 뜻대로 흘러가지 않고, 상처받고 찢긴 자아들의 화해의 연속으로 이루어진다. 조금씩 자신의 다양한 자아를 통합하면서 사는 것이 중요한 인생의 과제이듯, 자신을 끌어안기 위해 거칠게 투쟁하는 앙소르의 시선은 여전히 날카롭게 빛난다.


“삶의 아이러니에 압도되어, 장대함에 고무되어, 나의 시각은 날카롭게 빛난다.”


네덜란드 크뢸뢰 뮐러 미술관에서 본 앙소르


벨기에 왕립미술관에서, 직접 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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