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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현비 Nov 06. 2024

나는 사과 하나로 파리를 정복하겠다

폴 세잔

사과처럼 가만히 좀 있어


역사상 가장 유명한 3개의 사과 중 하나는 세잔의 사과이다. 이브의 사과, 뉴턴의 사과가 나머지 두 개이지만 아마 21세기의 가장 유명한 사과는 ‘애플’이 아닐까. 가장 흔하고 평범한 과일이지만 사과는 현재까지도 많은 위대한 역사의 상징이 되고 있다.


특히 폴 세잔에게 사과란 애착 그 이상이었다. 어린 시절의 우정의 징표이자 사랑의 표식이고, 최고의 성취를 위한 도구이자 자신의 자아를 투사한 물체였다. 사과로 파리를 정복하겠다는 그의 포부는 새로운 현대 미술의 문을 여는 도구가 되었다. 


파리의 화상이자 세잔의 성공을 적극적으로 도운 앙블루아즈 볼라르의 초상을 그리는 일화는 유명하다. 매일 아침 볼라르는 세잔의 집에 와서 포즈를 취해야 했고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짜증과 화를 냈다. 아내의 그림을 그릴 때에도 예외는 없었다.


“사과처럼 가만히 좀 계세요. 그게 어려워요?”


작업도 매우 오래 걸렸지만, 완성된 초상화는 우울하기 그지없다. 얼룩덜룩한 물감의 색, 독특한 구도, 무엇보다 표정에서 멜랑꼴리함이 확연히 드러난다. 웃는 얼굴이 없다. 아니, 누가 자기 아내와 스폰서를 이렇게 우울하게 그려요 하던 찰나, 자화상을 보면 더욱 세잔의 성격이 이해가 간다.


폴 세잔, <자화상>, 유화, 44x37cm, 1861~1862, 개인소장


본인 스스로를 이렇게 그리는 사람이 어딨어요.  


출처 : https://ko.wikipedia.org/wiki/폴_세잔


시골 부잣집 도련님의 탄탄한 진로 변경


폴 세잔은 1839년 1월 19일 프랑스 엑상프로방스라는 남동부 지역에 자리한 지방 도시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루이 오귀스트 세잔은 모자 사업으로 큰돈을 벌어 엑상프로방스 시골 마을에 유일한 은행을 설립한 자수성가한 사람이었다.


세잔은 우수한 성적으로 대학 입학 자격까지 따냈다. 라틴어와 프랑스어로 시와 극을 지을 줄 알며 음악도 즐겼다. 회화의 모든 전통은 기어이 거부하였지만, 문학과 인문주의적 교육만큼은 폭넓게 받아들이며 충실했다. 교육 방식에 불평 한 번 없던 부잣집 우등생 도련님이었다. 


콜레주 부르봉이라는 중학과정 기숙사 학교에 들어갔을 때, 30년 지기 친구 에밀 졸라를 만나게 된다. 에밀 졸라는 병약하고 지독한 근시라 거대한 안경을 끼고 있어서 또래들의 괴롭힘의 대상이었다. 좋은 것들로 잘 먹고 자란 세잔은 또래에 비해 키와 덩치가 컸고, 어김없이 졸라를 괴롭히던 무리에서 손쉽게 졸라를 구출했다. 다음 날 졸라는 세잔에게 감사의 표시로 사과를 선물했고 둘은 가장 친한 친구가 되었다. 이때부터 사과란 세잔에게 있어 사소하지만 소중한 기념비적인 과일이 되었다. 


아버지는 근면 성실한 사람으로 열심히 일을 해서 신분 상승의 꿈을 이룬 사람이었다. 모범생인 아들이 본인처럼 밑바닥에서 시작하며 온갖 텃세와 무시당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판사나 변호사가 되기를 바랐다. 신분 상승의 직행열차로 바로 올라타기를 간절히 원했다.


세잔도 아버지의 뜻을 따라 법학 대학에 들어갔으나, 법학은 도저히 흥미가 생기지 않았다. 가장 미천하고 무시당하던 화가의 길로 들어서겠다고 하자 아버지는 그럴 수 없다고 펄쩍 뛰었다. 그림 공부를 법학과 병행하면서 아버지가 구입한 별장의 거실 벽화를 그렸고 벽화를 본 아버지는 화가의 길을 승낙했다. 


내가 언제 평가해달랬어? 


세잔의 아버지는 엄격하기도, 화가가 되는 것을 적극 반대하기도 했으나 기본적으로는 아들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이었다. 이왕 하기로 한 거, 남들에게 꿀리지 않는 사람이 되거라라는 마음으로 아들에게 파리 유학을 허락하고 생활비를 매달 보내주었다. 훗날 죽어서도 엑상프로방스의 막대한 재산도 물려주었기에 당시대의 많은 다른 화가들과는 달리 생활고에 시달리거나 가난으로 인해 피폐한 삶은 면했다. 본인 스스로도 검소한 삶을 지향했다. 


그러나 성격이 문제였다. 시골에서 자라난 시골 촌뜨기였던 세잔은 사교적인 활동의 중심지인 파리에서 적응하기 어려워했다. 언제나 입을 꾹 다물고 화난 사람처럼 있었으며 자기 의견에 조금이라도 반대라도 하면 화부터 냈다. 의견이 약간 다르다는 이유로 당시 최고의 스타였던 마네의 심기도 건드린 적도 있다. 


“마네 씨, 난 악수하지 못하겠소. 1주일 동안 손을 닦지 않은 터라.”


미술 대학인 에콜 드 보자르에 지원했지만 떨어지고 화가로써 인정받을 수 있는 살롱전에도 번번이 낙선했다. 1863년에는 살롱전에 낙선한 화가들의 작품을 모아 낙선전이 열리게 되어 참가했지만 그것마저도 마네의 <풀밭 위의 점심식사>에 너무나 많은 대중이 분노하는 탓에 조용히 묻혔다. 


실패한 화가, 아버지에게만 빚을 지고 있는 쓸모없는 인간이라는 부담과 비평가들의 비난과 조롱, 동료 화가들과의 마찰은 파리에 대한 분노를 키웠다. 


“나는 동료 화가들이 자기들 멋대로 내 작품을 평가하는 것을 견딜 수 없다. 내가 언제 그들에게 평가해 달라고 요구했던가!” 



 

폴 세잔, <현대판 올랭피아>, 유화, 46x55cm, 1873경, 오르세 미술관


임산부는 세잔의 그림을 조심하세요, 인체에 해롭습니다!


당시 파리는 인상파가 구성되던 시기였다. 살롱전에서 낙선되고 기존 미술을 거부하며 새로운 색과 외광의 시도를 하던 화가들이 뜻을 모아 인상파 전시회를 열었고 그중에는 세잔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거 참 인상 깊네라는 비아냥으로 시작한 단어인 인상주의인 만큼 비평가들의 말이 곱게 나왔을 리 없다. ‘치매에 빠진 상태에서 그리는 백치’ 등 수려한 언어들로 세잔을 향해 비난을 꽂았다. 


환멸을 느낀 세잔은 2회 인상파 전시회는 참가하지 않았다. 마침 수준 높은 애호가 빅토르 쇼케가 세잔의 그림을 몇 점 구매하며 인정해 주었고 그 사실에 고무된 세잔은 인상파 3회 전시에 무려 17점이나 작품을 출품한다. 결과는 처참했다.


“임산부와 함께 그 전시회에 가신다면 세잔 씨의 남자 초상화는 재빨리 지나치세요. 너무 기괴하여 임산부에게 충격을 줄 것이고 태아는 태어나기도 전에 황열병에 걸릴 겁니다.”


세잔은 고향인 엑상프로방스로 돌아간다. 그전부터 아버지 몰래 동거하던 여인 오르탕스 피케와의 관계를 들켜 47세가 되어서야 결혼을 한다. 고향에 돌아가서는 인상파에서 해방되며 새로운 구도와 시점을 복수화하여 자신만의 화풍을 성립해 나간다.  


폴 세잔, <사과와 오렌지>, 유화, 74x93cm, 1895~1900경, 오르세 미술관


사과 하나로 파리를 정복하겠다


1886년 가장 친했던 친구 에밀 졸라와의 우정은 파국을 맞는다. 졸라는 파리의 예술평론가로 활동하며 소설을 썼다. 마네와 인상파 동료들이 온갖 언론의 공격을 받을 때, 그들을 옹호하는 평론을 종종 기고하며 인상파 화가들에게 호의적인 입장을 표명해왔다. 그러나 자신을 괴롭힘에서 구해준 친구 세잔만큼은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졸라가 보기엔 세잔은 계속 변하기만 하고 있으며 자신만의 화풍을 정립하지 못하는 실패한 화가였다.


새로 쓴 소설 <작품>에서 등장하는 클로드 랑티에라는 인물을 ‘실패한 천재’로 묘사한 것은 누가봐도 세잔 그 자체였다. 세잔은 소설을 받아 읽어본 후, 짧은 감사편지를 보냈다. 그 이후 두 사람은 단 한 번도 만나지 않았다. 


다혈질인 세잔이 이토록 점잖은 방식으로 절교를 선언한 것은 고마움의 사과를 건네던 그 소년과의 우정과 시간을 소중히 여겨서 일 터이다. 세잔의 화풍은 계속 바뀌었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바뀌지 않았다. 인간의 감정을 표현하는 일, 인간의 고독, 접촉, 화합, 갈등, 풍요 등을 정물이나 풍경을 통해 드러내려 노력했고 그 중심에는 사과가 있었다. 


‘사과 하나로 파리를 정복하겠다’라는 포부처럼 세잔에게 사과란 성취의 자아이자 타인에 대해 느끼는 감정의 산물이었다. 그 사과를 건넨 에밀 졸라에게만큼은 가장 평화롭고도 우울한 마음을 담아 떠난 것이리라. 


파리 화상 앙블루아즈 볼라르가 세잔의 진가를 알아보고 세상에 알리기 시작하자 어느새 세잔은 많은 화가들과 평론가들의 존경받는 화가들이 되었다.  


폴 세잔, <생 빅투아르 산>, 유화, 70x89.5cm, 1902~1904, 미국 필라델피아 미술관


이제 약속의 땅이 보입니다


파리 화상 앙블루아즈 볼라르가 세잔의 진가를 알아보고 세상에 알리기 시작하자 어느새 세잔은 많은 화가들과 평론가들의 존경받는 화가가 되었다. 


유명세와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막대한 부 속에서도 고향인 엑상프로방스에 머물면서 항상 나가서 그림을 그렸고 검소한 생활을 유지했다.


1906년 10월의 어느 날, 여느 때처럼 야외에서 그림을 그리던 중 강한 비바람이 몰려와 의식을 잃고 쓰러지게 된다. 22일, 폐렴으로 사망하며 구상에서 완전한 추상으로 나아가기 위한 과도기적인 그림만을 남기고 세상을 떠난다. 


사과 하나로 시작한, 고정된 시선이 아닌 다시점으로 형태의 본질을 색으로 표현하려 했던 시도는 고갱, 피카소, 마티스 등 현대 미술의 거장들에게도 많은 영향을 미친다. 그 과정은 지난하고도 험했지만 결국 세잔은 그 약속의 땅을 개척해냈다. 


“이제 약속의 땅이 보입니다. 저는 약간의 진경을 개척했습니다.” 


오르세 미술관에서, 직접 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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