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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현비 Oct 23. 2024

나는 나 자신과 마주하는 것이 두렵지 않습니다

렘브란트 반 레인

잊을 수 없는 눈빛


살아가면서 만났던 눈빛 중 잊을 수 없는 눈빛들이 있다. 가족, 연인, 친구들이 함께 하는 시간 틈틈이 보내준 형형한 눈빛, 영화 <색, 계>에서 보았던 배우 양조위의 눈빛 그리고 렘브란트 자화상 앞에서 마주친 내면으로 침잠해 들어가는 눈빛들. 


렘브란트가 살아온 나라 네덜란드에 가면 수많이 남긴 자화상 중에서도 마지막 노년의 자화상 2점을 볼 수 있다. 암스테르담 국립 미술관에서는 유일하게 살아남아 성인이 된 아들 티투스마저 먼저 세상을 떠나고 그린 자화상을 볼 수 있고, 마지막 생애 자화상은 페이메이르의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가 있는 헤이그의 마우리츠하위스 미술관에서 볼 수 있다. 


렘브란트, <자화상>, 나무에 유채, 37x29cm, 1629, 마우리츠하위스 미술관


인생의 마지막 두 점의 자화상을 그릴 때의 렘브란트는 모든 것을 잃은 상태였다. 젊음, 명성, 부, 가족…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모든 것을 잃은 얼굴에서는 불행의 그림자보다는 모든 것을 초연한 눈빛이 도드라진다. 


삶은 얼마나 찬란했던가. 렘브란트는 자신의 재능을 일찌감치 스스로 깨닫고 전성기를 두 팔 벌려 맞이했다. 명예와 명성, 끊임없이 쏟아지는 주문, 막대한 부, 귀족 집안의 아내까지 방앗간 집 아들로 태어난 그가 부의 신분 상승으로 올라가는 사다리는 견고해 보였다. 자신만만하던 젊은 날의 자화상은 스스로의 삶을 과시하는 듯 당당하기만 하다. 그 당당한 눈빛이 심오한 사유로 변하기까지의 여정은 오로지 내리막길뿐이었음을 젊은 날의 렘브란트는 예상치 못했으리라.  


렘브란트, <모자를 쓰고 입을 벌리고 응시하는 자화상>, 에칭화, 1630, 국립도서관 파리


방앗간 집 여덟 번째 아들로 태어나 출세의 중심지로 


렘브란트 반 레인은 1606년 7월 15일, 네덜란드 레이덴에서 아홉 명의 아들 중 여덟째 아들로 태어났다. 대가족이었던 레인가는 방앗간 집을 운영했기에 비교적 풍족한 생활을 하며 유년 시절을 보냈다. 


렘브란트는 1613년 14세의 나이로 국립대학 레이덴에 입학했으나, 학업에는 큰 관심이 없었다. 그림 그리는 일에만 열중하는 그를 보고 아버지는 당시 반 스바넨뷔르흐라는 화가 밑으로 들어가 그림 공부를 하도록 했다. 스승이 특별히 훌륭한 화가는 아니었으나 렘브란트는 허드렛일부터 원근법, 해부학, 드로잉 등 기본기를 3년 동안 배웠다. 

더 이상 배울 것이 없자, 당시 유명 화가 피테르 라스트만의 화실로 옮겨 강도 높은 교육을 받았다. 6개월 만에 스승의 기법을 완전히 습득하고 18세에 암스테르담에서 개인 전시회를 열어 미술 애호가들을 사로잡았다.


당시 암스테르담은 동인도 회사가 설립되고 1609년 외환은행이 설립되면서 금융시장의 중심지였다. 활기가 넘치던 항구 도시에는 많은 인구가 드나들었고 미술시장 또한 시민들에 의해 성장했다. 네덜란드에서 가장 유명한 화가가 되기를 꿈꾸던 야망 가득한 청년은 암스테르담에 자리 잡았다. 그리고 머지않아 그 꿈은 이루어졌다.  


렘브란트, <니콜라스 튈르 박사의 해부학 수업>, 캔버스에 유채, 216.5 x 169.5 cm, 1632, 마우리츠하위스 미술관


다 이루었다


이탈리아를 비롯한 전 유럽의 미술품을 거래하는 화상 윌렌보르흐의 눈에 든 렘브란트는 시작부터 찬란한 미래를 보장받았다. 윌렌보르흐는 무시무시한 고물가를 자랑하는 암스테르담에서의 숙소와 음식, 작업실까지 자신의 집에 마련해 주고 고가의 의뢰를 하는 고객을 연결해 주며 렘브란트를 순식간에 대가의 반열에 오르게 해주었다.


렘브란트를 순식간에 즉각적인 명성에 오르게 한 작품은 해부학 강의를 주제로 한 집단초상화였다. 해부학 극증에서 수행된 튈프 교수의 강의 1주년 기념으로 주문한 것으로, 튈프 교수는 유명한 외과의사이자 시장으로 선출된 유명 인사였다. 


기존의 집단초상화는 동일한 조명 아래서 딱딱한 포즈로 경직되어 있는 인물들이 나란히 부자연스러웠다. 렘브란트는 각각의 인물에게 비추는 조명과 포즈를 바꾸어서 모든 인물이 해부학 수업에 직접 참여하는 듯한 인상을 부여했다. 각각의 지명도와 학식을 표현한 얼굴에는 그들이 원하는 지적 허영심을 충족시켰다. 찬란한 성공은 삽시간에 퍼졌다.


좋은 소식은 좋은 소식을 부른다. 명성을 자자해지자, 이번에는 프리슬란트의 사장 딸, 고위 관리로 있는 아들을 지닌 집안의 사스키아라는 사랑스러운 여인이 결혼 지참금으로 큰 돈을 지니고 찾아왔다. 1643년 사스키아와의 결혼으로 렘브란트는 명성과 부, 사회적 지위 상승까지 세상에서 지닐 수 있는 모든 것은 다 이루었다. 이제 방앗간 집 아들이라는 말은 아무도 사용하지 않았다. 


죄송합니다만, 그림값 좀 빨리 주시면 안 될까요?


사회적 지위까지 상승하자 총독이나 고위 관리들이 개인적으로 그림을 폭발적으로 주문했다. 쉴 틈이 없어 제자들을 늘렸고, 때때로 제자들이 그린 그림에 서명만을 하여 그림을 찍어내는 하나의 거대 공장이 형성됐다.


밀려드는 주문으로 정신이 없는 와중 사스키아 사이에서 아이가 태어났지만 두 달 만에 사망하고 1638년에 태어난 아이도 3주 만에 세상을 떠난다. 세 번째 아이도 2주 후에 사망하며 1640년 이어서 어머니마저 사망한다. 몇 년 사이에 연이은 가족의 상실은 렘브란트에게 있어서 인생의 부질없음을 자꾸만 떠올리게 했다. 


작품을 참고한다는 명목으로 유명 화가의 판화나 값비싼 그림들을 사들이기 시작하면서 렘브란트는 비싼 술과 비단, 옷 등을 마구 사기 시작한다. 부유한 지역에 위치한 두 층으로 이루어진 집을 빚을 내어 사고 두 층의 집을 온갖 골동품과 사치스러운 의상, 판화, 무기 등으로 채워 넣었다. 그는 자신의 명성에 맞는 집을 원했다.


집값의 이자를 갚을 날짜가 되면 자신에게 그림을 의뢰했던 고위 간부에게 그림값 좀 미리 달라고 편지를 했다. 그림값이 제대로 수금되지 않아 빚은 계속 늘어났지만 한 번 시작된 낭비벽은 좀처럼 나아지지 않았다. 


렘브란트, <수도사 차림의 티투스>, 캔버스에 유채, 85 x 78 cm, 1660, 암스테르담 국립미술관


남편이 재혼할 시, 내 유산은 무효입니다


1641년 네 번째 아이 티투스가 태어났다. 유일하게 영아 때 사망하지 않고 살아준 소중한 아들이었다. 그러나 사랑하는 아내 사스키아가 이번에는 병에 걸렸다. 사스키아는 한 살짜리 아들 티투스를 남편인 렘브란트가 잘 양육하지 못할 것이라 판단하여 무시무시한 유언을 남긴다.


“내가 남긴 유산의 반은 티투스의 것입니다. 티투스가 성인이 될 때까지 유산에서 발생하는 이자는 남편의 것입니다. 단, 그가 재혼하면 무효입니다. 부디 티투스의 영혼을 지켜주세요. 내 아들을 고아원에 보내지 말아 주세요.”


여전히 그림 주문은 쇄도했으나 이 무렵부터 렘브란트는 자신이 그리고자 하는 그림을 그리려 고집을 부렸다. 고객이 원한 것은 멋있는 자신의 모습이었지만 렘브란트는 그림에 인간의 내면과 파악하기 힘든 본질을 꺼내려 했다. 아내의 죽음까지 겹치자 그의 내면은 더욱 시들어갔다. 


티투스를 기르기 위해 고용한 유모 헨드리케와도 연인이 되었지만 아내의 유언 때문에 결혼할 수 없었다. 칼뱅주의 신앙이 지배하던 시대에서 왜 여인과 결혼하지 않고 동거하는지에 대해 법정에서 해명해야 했고, 그러는 사이 추문이 돌았다. 사치와 낭비벽은 나아지지 않았지만 고객의 요구에 맞춰 그림을 그리지도 않아 배상을 요구하는 고객들이 많아지며 빚은 늘어날 대로 늘어나고 결국 그의 재산은 경매로 부쳐졌다. 


순식간에 얻은 부와 명성은 거짓말처럼 순식간에 사라졌다.  


렘브란트, <돌아온 탕자>, 캔버스에 유채, 205 x 262 cm, 1663~1665, 상트페테르부르크 러시아


나는 나 자신과 마주하는 것이 두렵지 않습니다


경매로 모든 재산을 잃은 렘브란트는 다양한 모습의 자화상을 그리기 시작한다. 아직 그림을 그릴 수 있는 나 자신은 여전히 지금 여기에 존재하고 있다는 걸 증명이라도 하듯이. 


기교를 부려 잘 그리는 것은 별 관심이 없었다. 그의 자화상은 고독, 불안, 항변, 절규, 변화하는 삶에 대한 기록이었다. 때로는 당당하게 화면을 응시하고 때로는 흔들리는 눈빛으로 불안과 고독에 침몰된 본인을 그렸다. 모든 것을 잃은 인생이었지만 스스로의 내면을 마주하는 것에는 거침이 없었다. 


아들 티투스와 연인 헨드리케와의 도움으로 살아가다 그들도 모두 죽고, 며느리 집에 얹혀살다가 1669년 63세의 나이에 쓸쓸한 임종을 맞이했다.


해원은 고통스러운 상처의 재확인에서 비로소 출발할 수 있는 것임을 렘브란트는 자신의 자화상을 그리면서 증명해냈다. 한때는 모든 것이 내 손안에 있었으나 모래알처럼 부질없게 빠져나가는 것을 지켜본 자의 눈빛.


그럼에도 세상을 바라보고 있는 모습, 그 눈빛에서는 어떠한 원망도 읽히지 않는다. 어쩔 수 없는 불행을 받아들이고 초월한 사람의 눈에는 응축된 슬픔은 감돌지만 스스로를 마주하는 것에 두려움은 없었다. 그 견고하고도 선연한 눈빛을 직접 마주하게 되면 쉽게 잊을 수 없다. 아마 10년이 지나고 20년이 지나도 그 눈빛만큼은 심연 속에서 반짝거릴 것이다. 


마우리츠하위스 미술관에서 렘브란트, 직접 촬영
암스테르담 국립미술관에서, 티투스마저 잃고난 후의 자화상, 직접 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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