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테 콜비츠
그림자라도 볼 수만 있다면
장 바티스트 로노의 그림 ‘미술의 기원: 양치기의 그림자를 더듬어가는 디부타데스(1786년)’에는 자신의 연인과의 헤어짐을 앞두고 벽에 비친 연인의 그림자를 따라 그리는 장면이 있다. 사진기가 없던 그 옛날, 연인을 기억해두기 위한 방법은 그림이었다.
벽면에 연인의 그림자를 그리는 저 손짓, 혹여나 그림자 선이라도 지워질까 함부로 만지지도 못했을 애달음이 느껴진다. 무릇 그리움이란 지나가는 연인의 뒷모습의 그림자라도 무망하게 한 조각 보고 싶어지는 것이다.
연인도 이리 애달픈데, 자식에 대한 그리움은 얼마나 더 애달플까. 두 번의 세계대전으로 아들과 손자를 잃은 비극을 겪은 케테 콜비츠의 작품을 보면 연인의 그림자보다 그리움의 농도가 더욱 짙다. 그 비통함은 어떻게 언어로 표현해야 할까. 내 아이의 그림자라도 볼 수 있다면 자신의 영혼도 팔 수 있을 것이다. 가슴에 관통한 자식을 잃은 슬픔은 그 어떤 것으로도 채워지지는 않을 것이다.
씨앗들이 짓이겨져서는 안 된다고 외치며 자식을 품에 안은 강인한 어머니, 전쟁이라는 비인간적인 비극에 도전하는 그녀의 굳건한 눈빛은 한 번 보면 쉽사리 잊히지 않는다. 자라나는 씨앗은 함부로 짓이길 수 없다. 그림자 한 조각이라도 짓이겨서는 안 된다.
어찌해야 할지 아직도 모르겠다
케테 콜비츠는 1869년 프러시아 왕국 쾨니히스베르크에서 칼 슈미트(Karl Schmidt)의 다섯째 자녀로 태어났다. 외할아버지와 아버지는 탁월한 목사이자 신학자로, 조부모와 아버지가 조성한 자유주의 전통의 가정 분위기 속에서 자랐다.
어린 시절 케테는 세 살 어린 여동생 리제와 단짝처럼 붙어 지냈는데, 케테와 리제 모두 어린 시절부터 그림에 대한 소질을 보였다.
“리제가 케테를 곧 따라잡을 것 같아.”
아버지는 두 아이의 소묘 재능을 알아보고는 미술 교육을 적극적으로 추진했다. 리제는 자신의 재능에 큰 관심이 없었으나 케테는 미술 수업을 받으며 야망을 키웠다. 아버지는 케테에게 환희를 느꼈다. 그렇기에 17세 때 케테가 칼 콜비츠와 약혼했을 때, 실망과 분노를 감추지 못했다. 완전한 예술가가 되기를 간절히 바란 것이다.
목회자 집안에서 자라난 케테는 유년기부터 차원 높은 자유와 정의를 갈망하는 분위기 속에서 노동에 시달리는 민중들의 모습을 보고 자랐다. 그들의 모습을 그림에 담아 함께 연대하는 것은 필연적인 길이었다.
1890년 의사 칼 콜비츠와 결혼하여 베를린 슈파다우의 가난한 노동자 주거지역에 자리를 잡고 자혜원을 열었다. 가난한 노동자들의 고단한 생활, 고뇌, 비애, 질병과 죽음을 목격하고 그들의 표정과 절박함을 판화로 제작하게 된다.
꾸준한 활동을 지속하면서도 <아이를 안고 있는 어머니>의 아직 미흡한 부분이 있어서 고민하고 있다는 내용의 일기를 1912년에 쓴다. 그녀는 꿈에도 몰랐을 것이다. 그 미흡한 부분을 불과 2년 후 본인의 살과 뼈를 뜯어내는 아픔으로 채운다는 사실을.
“요새 그 작업을 다시 시도하고 있는데 미흡한 부분을 잘 살리지 못하고 있다. 어찌해야 할지 아직 모르겠다. 재능, 재능이 부족한 게 느껴진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말렸어야만 했다
1914년 10월 케테의 두 아이 중 둘째 페터는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군대에 지원한다. 아무리 말려도 소용없었다. 남편인 칼은 “조국은 너처럼 어린 친구들이 필요하지 않아.”라고 반대했고 페터는 조국은 나를 필요로 한다고 확고한 목소리로 말했다.
케테는 페터의 말을 따르자고 남편을 설득한 뒤 아들을 꼭 껴안았다. 사랑하는 아들의 만용에 따라 전쟁의 한가운데를 들어가도록 허락하는 그 심정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 무저갱에 던져져도 이보다는 덜 고통스러울 것이다.
두려워하지는 않을까, 굶지는 않았을까. 그렇게 10월 30일 전쟁에 보낸 아들에게 소식이 온다.
“당신의 아드님이 전사했습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더 강력하게 말렸어야만 했다. 나의 아들, 나의 아가 페터. 그리고 28년 후 다시 반복되는 이름, 반복되는 상황에서도 같은 슬픔을 반복했다. 나의 손주, 나의 아가 페터. 무슨 수를 써서라도 더 강하게 말렸어야만 했다.
씨앗들이 짓이겨져서는 안 된다
뿌리부터 무너져 내리는 슬픔을 가슴에 품고 케테는 더욱 열렬한 방향으로 반전 예술가로서 활동한다. 매 순간순간 떠난 아들을 생각하며 무너지다가도 나 자신의 재능을 발휘하지 못하고 죽어서는 안된다는 의무감으로 다시 일어났다.
지구상에서 전쟁이라는 것은 다시는 일어나서는 안 된다. 젊은이들과 어린아이들은 세상의 씨앗이고, 어른들은 이 씨앗을 운반하고 발육시키는 사람이다. 전쟁으로 이 씨앗들을 짓이겨서는 결코 안 된다.
“이 그림들은 전 세계를 다니며 이렇게 말해야 합니다. ‘보아라! 우리가 겪은 이 끔찍한 과거를!’”
케테는 작품을 만들며 자주 울었다. 우는 아이를 그리면서 울었고 아이를 안고 있는 어머니들을 그리면서도 울었다. 그러면서 세상을 떠난 아들과 연결되는 듯했다. 전쟁으로 인해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위해 목소리를 내주는 것이 내가 할 일이라는 일념으로 전쟁 판화 7점을 완성했다.
전쟁은 이제 그만이라는 절규에도 불구하고 세상은 반대로 흘러갔다. 히틀러가 독일 수상에 취임하고 케테를 비롯한 많은 예술가들이 ‘국가의 이상을 실현하는데 동참하지 않는 예술가들’로 낙인찍혔다. 그리고 1936년 당국으로부터 케테는 개인적인 전시회를 금지한다는 통보를 받게 된다.
내 삶에 이별을 고한다
1940년 평생을 함께한 반려자 남편 칼이 사망한다. 남편의 죽음을 미처 다 슬퍼하기도 전, 운명의 장난처럼 전쟁으로 또 하나의 페터를 잃었다. 둘째 아들 이름을 딴 손자 페터의 죽음이 적힌 통지서를 받은 케테에게 남은 것은 삶에 이별을 고하는 시간뿐이었다. 50년 넘게 살아온 베를린의 집마저 폭격으로 파괴되었다.
1945년 4월 22일,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기 1주일 전 케테는 그토록 갈망했던, 울분에 토해 외치던 전쟁의 종전을 채 보지 못하고 77살의 나이로 사망한다.
전쟁은 케테에게 소중한 것을 무참히 빼앗고, 인생의 모든 사명을 부여했다. 고통과 인내를 함께 주었던 그 삶을 낭비하지 않았고, 자신이 지닌 능력의 한도 내에서 삶을 사랑했다.
자식을 잃은 두 번 어머니이기에 자식을 품에 안고 있는 어머니 모습이 자주 등장하는 작품이 더욱 무망하게 느껴진다. 먼 그곳에서는 자신이 먼저 보낸 아들들을 작품 속의 어머니처럼 껴안았을 것이다. 아침 햇살과도 같은 미소를 지으며 달려오는 그 아이를, 너무 세게 안아버리면 다시 사라져버릴까 그 그림자라도 으스러지게 안았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