툴루즈 로트레크
무엇을 가지고 태어났는지는 중요하지 않아
현대 심리학의 3대 거장으로 불리는 프로이트, 칼 융, 아들러의 인기는 다양한 방식으로 반복된다. 정신분석학을 창시한 프로이트는 이미 너무나도 유명하고 칼 융은 최근 MBTI 열풍이 돌면서 거론되었다(참고로 MBTI는 칼 융이 만든 것은 아니며 큰 관련이 없다). 아들러는 한동안 센세이션을 일으켰던 책 ‘미움받을 용기’로 큰 인기를 불러왔다(이것도 참고로 키워드만 따왔을 뿐, 아들러 심리학과는 크게 관련이 없다).
3명의 학자가 서로 다른 견해를 가지다 보니, 함께 활동하던 시기에 서로를 견제하는 이야기가 많이 전해진다. 그 중 프로이트는 체구가 작았던 아들러를 난쟁이라고 불렀고, 아들러는 “거인 위의 난쟁이는 그 거인보다 훨씬 더 멀리 볼 수 있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기기도 했다.
아들러 심리학에서는 타고난 것은 크게 중요치 않고 의미가 없다. 오히려 중요한 것은 무엇을 가지고 태어났는지가 아니라, 타고난 것을 어떻게 활용하느냐였다.
20세기 오스트리아에 거인 위에서 더 멀리 내다볼 수 있는 난쟁이 아들러가 있다면, 19세기 파리의 ‘벨 에포크’ 가장 아름답고 화려한 문화가 꽃 피던 시기에는 난쟁이 화가 툴루즈 로트레크가 있었다. 두 사람 모두 열등감을 불쏘시개 삼아 삶을 불태웠다. 선천적 장애와 선천적 콤플렉스는 중요치 않았다. 삶의 의미를 어떻게 만들어내는가 그것이 이들에게는 더욱 중요했다.
내 다리가 조금만 더 길었어도
앙리 마리 레이몽 드 툴루즈-로트레크, 줄여서 툴루즈 로트레크. 툴루즈 로트레크의 풀네임이다. 이름이 길수록, 특히 가운데 ‘드’가 들어가면 귀족의 후예라는 뜻이다. 1864년 11월 24일 남프랑스의 가문 대대로 내려오는 성에서 태어난 로트레크는 금수저였으나 병약하게 태어난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사촌지간으로 가문의 번영을 유지하기 위한 근친결혼이었다. 유전적인 결함이 있을 수밖에 없던 가문은 로트레크에겐 비극의 탄생지였다.
사냥과 동물 사육, 사교모임을 즐기는 아버지에게 병약한 로트레크는 못마땅한 존재였다. 자유분방한 결혼생활을 즐겼으며 로트레크를 돌보는 일에는 큰 관심이 없었다. 어머니만이 어린 시절부터 로트레크의 그림 재능을 알아보고 평생의 후원자가 된다.
유년 시절 ‘작은 보석(프띠비쥬)’이라고 불리며 아버지를 제외한 집안의 인기를 독차지하고 명문가의 자제답게 문학과 그림을 향유하는 품위를 보여줬다. 병약하기는 했으나, 어머니의 자상하고 애정 어린 보살핌 덕분이었다.
그러나 너무 작은 보석이라 부서지기도 쉬웠던 걸까. 13살이 되던 1878년 의자에서 떨어지는 사고로 왼쪽 다리가 골절된다. 다음 해에는 길가의 도랑에 빠져 오른쪽 다리마저 골절된다. 이 두 번의 사고로 하반신의 성장은 정지되어 평생 키가 자라지 않는 불구가 된 로트레크는 훗날 자신의 장애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내 다리가 조금만 더 길었어도 그림 같은 건 안 그렸을 거야.”
명문 귀족의 자손이었기에 불구라는 결함은 인생의 뿌리를 모두 흔들었을 것이다. 아버지는 불구가 된 로트레크를 더 이상 돌보지 않았다. 누군가에겐 부러운 금수저의 인생이 오히려 로트레크에게는 더 큰 결함으로 이어졌다. 저주받은 신체적 결함, 저주받은 귀족 집안 태생, 이 두 가지는 삶을 불태우는 연료로 작용했다.
내가 원하는 건 살아 숨 쉬는 인간
두 다리의 자유를 잃은 로트레크에게 위안은 오직 그리는 것으로 정착된다. 예술이 자신의 일임을 깨닫고 집을 떠나 파리의 몽마르트르로 향한다. 가장 높은 곳에서 가장 미천한 곳, 부랑아, 빈민가, 매춘부, 알코올 중독자, 가난하고 비루한 예술가들이 모이는 그곳 몽마르트르로.
로트레크는 자연보다는 인공적인 춤, 경마, 서커스 등 리듬에 창조되는 인공적 세계와 매춘부들의 사생활에 이끌렸다. 그는 살아 숨 쉬는 역동적인 인간의 모습을 원했다. 원한다고 해도 결코 가질 수 없는 에너지 넘치는 인간의 거친 숨과 움직임을 보고 그렸다. 마음속 깊이 끌어 오르는 열망과 이룰 수 없는 장애로 인한 열등감은 매 순간마다 깊은 내면에서 충돌했을 것이다.
이 시기 로트레크는 일본 판화의 관심을 가지게 되고, 빈센트 반 고흐를 만나게 되어 친분을 다지게 된다. 11살이나 연상인 빈센트는 모든 면에서 로트레크와 대조적이었으나 두 사람은 서로를 인간적으로 이해하며 우정을 나눴다. 자신이 고지식한 사람이 아님을 강박적으로 증명하듯 종종 이상한 분장을 하고 사람들을 웃기려 했던 로트레크는 매사 진지하고 이상주의자적인 고흐를 예술가로서 진심으로 존중하고 좋아했다.
이 무렵부터 다채로운 여성 관계가 시작되는데 그중 한 명이 훗날 유명한 화가가 되는 수잔 발라동이다. 최초의 모델이자 뮤즈였던 수잔 발라동의 이름을 지어준 것도 로트레크다. 아버지에 대한 결핍과 삶에 달라붙는 불행으로 무장한 그녀의 아픔을 로트레크는 바로 알아보았다. 그러나 결혼을 원했던 수잔과 달리 결혼을 원치 않았던 로트레크의 갈등은 결국 수잔의 자살 소동으로 마무리된다.
로트레크가 원하는 것은 사랑도, 명예도, 돈도 아니었다. 그저 살아 숨 쉬고 움직이는 인간의 양상, 깊이 있는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존중을 기반으로 한 우정 그리고 그림뿐이었다.
파리의 거리는 내 작업실이다
몽마르트르에는 새로운 카페와 카바레, 댄스홀 등이 여기저기 생겨났다. 자신이 자라온 고상한 귀족사회의 분위기보다 더 활기차고 역동적이지만 한편으로는 소외되는 술 냄새가 진동하는 그곳을 로트레크는 각별하게 여겼다.
로트레크는 구석에 앉아 모든 대상을 예리하게 관찰하고 스케치북에 옮겼다. 대상을 사랑하면서도 냉정한 거리감을 유지하는 것은 상처받지 않기 위해 적절한 마음의 거리를 유지하려고 노력하는 것처럼 보인다.
파리는 그의 작업실이었다. 매일 밤이 그의 출근길이었고 독한 싸구려 술은 그의 조력자였다. 로트레크의 명성을 확고하게 한 것은 1891년의 ‘라굴귀’를 모델로 제작한 포스터였다. 배우나 가수, 신문과 잡지사에서 의뢰가 꾸준히 들어와 국제적인 명성을 얻게 된다.
특히 물랭루주는 빨간 풍차가 시그니처인 곳으로 가장 인기있던 카바레였다. 그러나 몽마르트르의 별이라는 로트레크의 별명이 무색할 정도로 물랭루주의 공간은 잘 보이지 않고 오직 가수와 댄서만이 돋보이는 포스터를 그렸다. 로트레크에게 중요한 것은 물랭루주가 어떤 곳인가가 아니라, 인간의 모습이 최우선이었던 것이다.
격하게 캉캉 춤을 추는 댄서, 술을 마시고 있는 가수, 관객 위로 쏟아지는 조명, 힘든 일과를 마치고 서로의 온기를 나누는 매춘부들, 목욕을 하고 코르셋을 조이고 있는 여인들. 파리 거리라는 종이 위에 가장 낮은 신분의 사람들의 가장 인간다운 모습을 그려냈다.
나는 내 그림들이 100년 후에도 신선하게 보이기를 바란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성취하기 위함인지, 삶에 대한 파괴적 갈망인지, 점차 생활은 더욱 방탕해져 갔다. 파리의 술집과 카바레를 밤늦게까지 배회하고 사창가에 거주하며 과음을 일삼으며 육체와 정신의 상태는 현저하게 나빠졌다.
음주량이 늘어날수록 밤마다 환각과 정신착란에 시달렸다. 마음이 피폐해지면 빈자리만큼 무언가를 채우고 싶은 것이 인간이다. 더 많은 음주, 더 많은 쾌락으로 구멍을 채우려 해보았으나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 가벼운 발작이 시작되고 정신착란이 심해지자 1899년 3개월간 요양소에 입원하는데 여기서 로트레크는 빠르게 회복되었다.
의사에게 자신이 정상임을 증명하기 위해 환자와 간호사들의 초상화를 그리고 퇴원 후 파리로 돌아와 다시 그림을 그린다. 그러나 한 번 나빠진 건강은 쉽게 회복되지 않았다. 다리와 손이 마비되면서 작품활동을 이어가다 1901년 9월 어머니가 지켜보는 가운데 조용히 세상을 떠난다.
금수저와 장애를 동시에 가지고 태어나 삶으로 예술을 창조해 낸 로트레크. 짧은 생이었지만 정열적이고 철저히 욕망을 고뇌하면서 만들어낸 예술은 그의 바람대로 100년이 지난 지금도 자유롭고 진솔한 인간의 모습을 보여준다.
“나는 내 그림들이 100년 후에도 신선하게 보이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