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에르 보나르
일상의 위대한 순간들
빔 밴더슨 감독 영화 ‘퍼펙트 데이즈’에는 매일 특별할 것 없이 반복되는 일상을 살아가는 도쿄 공중화장실 청소부 히라야마(야쿠쇼 코지)의 모습이 브이로그처럼 담겨 있다. 카세트테이프로 올드 팝을 듣고, 폴더폰과 필름 카메라를 사용하며 매일 같은 루틴을 수행하듯 살아내는 그의 삶은 낡았지만 아름답다.
때때로 갈등이나 과거 일들이 불현듯 찾아와 일상을 헤집어놓기도 하지만, 다시 현실을 충실히 살아내는 히라야마의 모습에서 그것 또한 삶의 일부임을 담담하게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모든 날들이 모여서 결국에는 위대한 ‘퍼펙트 데이즈’가 될 것이니, 일상을 아름답게 살아가는 모습은 하나의 예술이 된다.
필요한 말 외에는 하지 않고, 왜 그렇게까지 열심히 하냐는 질문에도 아랑곳하지 않는 완벽주의자, 식물과 나무 사이의 들어오는 햇살을 사랑하고 누구보다도 따뜻한 관용을 베풀 줄 아는 주인공의 모습은 19세기의 화가 피에르 보나르를 연상시킨다.
다양한 미술사조가 등장하고 변모하던 역동의 시기에서 자신의 일상에 대한 작업을 평생에 걸쳐 위대하게 완성한 화가. 자연 풍경과 고양이를 사랑하고 젊은 시절 아내의 일상만 384점을 그려낸 화가, 피에르 보나르.
자신의 작품이 전시 중임에도 마음에 들지 않으면 수정 작업을 할 정도의 완벽주의자이며 말수가 없고 소심한 성격까지, 영화 주인공 히라야마가 서양인이었으면 피에르 보나르의 모습이지 않았을까.
어머니, 저는 하루 온종일 그림만 그릴 작정이에요
피에르 보나르는 1867년 10월 3일 장미의 명산지 파리 근교 퐁트네오로즈 태어났다. 많은 예술가들의 불우한 탄생과 암울한 유년 시절과는 달리 보나르는 중산층의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나 자랐다. 국방부 관리인 아버지 외젠 보나르는 오르세 철도를 이용해 출퇴근을 했고, 어머니 역시 장미 재배 관리인으로 일하는 도시의 여성이었다.
유년 시절 파리를 기차로 오가며 그림에 흥미를 가지고 살던 도시의 아이가 화가가 되겠다고 했을 때에도 가족들은 그의 의사를 받아들였다. 단지 그림의 재능뿐 아니라 성적 또한 뛰어난 아이였으므로 아버지는 보나르가 법과 대학에 입학해 변호사가 되길 원했다. 보나르는 아버지의 바람대로 1885년 법과 대학 입학 후, 법학사 학위를 받고 1890년 변호사 시험을 치른다.
화가로서의 기회는 1891년에 찾아왔다. 프랑스-상파뉴(샴페인) 광고 포스터 공모주에 당선된 보나르는 100프랑의 상금과 명성을 얻게 된다. 이를 계기로 본격적으로 화가로 살아가기로 선언한다. 비록 원하던 변호사는 아니었지만, 보나르의 아버지는 아들의 그림이 당선됐다는 말에 기뻐 춤을 췄다.
법학사 학위를 따기 전, 미술 수업도 병행하며 조형예술 학교의 입학 허가를 받았던 보나르는 어머니에게 이렇게 말했다.
“어머니, 저는 하루 온종일 그림만 그릴 작정이에요.”
보나르의 말처럼 그는 한평생 한 여인의 일상을, 하루 온종일 그리고 또 그려냈다.
나를 망치러 온 구원자, 나의 작은 새, 마르트
20대 청년 보나르는 본격적으로 광고주로부터 요청받은 삽화를 그렸다. 같은 시기에 활동했던 툴루즈 로트레크는 보나르의 포스터를 보고 자극을 받아 석판화 제작을 시작하게 된다. 로트레크는 좋은 솜씨를 가진 인쇄업자를 친히 소개해 줄 만큼 보나르와 친분이 두터웠다.
부채, 접시, 가구 등 장식품을 주로 활용한 소박한 그림을 그리며 회화는 장식과 대립되는 것이 아니라 어울려야 되는 것이라 말하는 지적이고 소극적인 청년은 당시 역동하는 파리에서 특별히 눈에 띄지는 않았다. 소박하고 일상적인 실내 장식의 그림은 당시 외광과 순간을 연구하던 인상주의자들에게는 너무 단조로워 보였던 것이다.
26세가 되던 해, 보나르는 아내이자, 뮤즈, 어쩌면 나를 망치러 온 구원자, 평생을 돌보고 참아내며 모든 자유를 포기하면서도 사랑하고 인내한 여인, 작은 새 같았던 마르트를 만나게 된다.
보나르는 파리의 전차에서 내리는 한 젊은 여성을 보았다. 그리고 무작정 그녀의 직장으로 따라가서 죽을 때까지 함께 삶을 공유할 것을 설득했다. 파리의 거리에서 우연히 마주친 마르트는 당시 24세였으며 장례용 조화를 만드는 가게에서 일하고 있었다.
본명은 마리아 부르쟁으로 마르트는 세례명이었다. 두 사람의 동거는 32년 동안 이어졌고, 1925년이 되어서야 혼인신고를 했다. 보나르는 마르트가 마리아 부르쟁이 본명이라는 것을 32년 만에 혼인신고를 할 때서야 비로소 알았다. 가냘픈 체격과 아름다운 금발의 머릿결, 연보라빛 눈동자를 가진 마르트는 보나르에게 ‘한 마리 새처럼 보였다’. 그리고 그 작은 새를 돌보기 위해 온 일생을 바쳤다.
이제 내가 철저히 고립되길 원하네
마르트는 매우 내성적이고 폐쇄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30년이 넘는 시간 동안 본명도 알려주지 않을 정도로 자신에 대해 늘 감추는 버릇을 가졌고, 주변의 모든 것을 의심했다. 가냘프고 아름다운 외모와는 달리 깨진 항아리처럼 거칠고 쉰 신경질적인 목소리를 가졌다. 천식, 폐병 비슷한 증세가 있어 항상 숨을 헐떡거렸고 강박적으로 물에 들어가 몸을 씻어내는 목욕을 일종의 의식처럼 행했다.
사람을 극단적으로 싫어하는 마르트를 위해 시골로 이사한 보나르는 그녀를 위해 특별히 집안을 개조해 주었다. 언제든지 원할 때 목욕을 할 수 있도록 집안에 욕조를 배치하고 그녀가 좋아하는 가구들로 집을 채웠다.
그럼에도 마르트는 독점욕이 강해 보나르가 다른 사람과 있는 것을 매우 불쾌해했다. 손님이 집에 오면 노골적으로 물소리를 내며 욕실에서 첨벙거렸고, 잠시라도 함께 외출할 일이 있으면 온몸을 가리고 짙은 색 양산을 썼다. 72세의 나이로 사망하기 전까지 마르트는 집 안, 욕조 안에서 보나르와 함께 지난한 시간을 보냈다.
보나르가 지인에게 보낸 편지에는 이러한 상황이 적혀 있다.
“마르트는 이제 내가 철저히 고립되길 원하네. 그녀를 위해 나 자신 모든 사람과의 접촉을 피할 수밖에 없고, 나는 그래서 이미 수년 전부터 조용한 은둔 생활로 지낼 수밖에 없는 상황이네.”
보나르는 그녀를 위해 기꺼이 고립되었다.
나는 그저 바라볼 뿐
보나르와 마르트는 한 평생 한 집에서 하루 온종일 시간을 보냈다. 모든 관계로부터 고립된 보나르는 신경질적이고 강박적인 마르트를 참아내고 돌보고 바라봤다. 욕실에 있는 그녀를 바라보고, 방안의 그녀를 바라보고 거울을 통해 또 바라보고 같은 주제로 반복해서 그림을 그렸다.
목욕하는 마르트, 창가에서 햇볕을 쬐는 마르트, 침대에 누워있는 마르트, 식탁에 앉아 나를 바라보는 마르트, 고양이를 쓰다듬는 마르트, 나의 사랑, 나의 작은 새 마르트…
“나는 그저 바라볼 뿐이다.”
끊임없이 바라봐야만 하는 지난한 일상을 거울이라는 독특한 수단을 활용한 보나르의 그림 속 구조, 심리적인 색상의 선택은 같은 주제를 반복하는 일상에 부여한 따뜻한 시선이었다.
한 번도 마르트의 얼굴을 집중적으로 자세하게 그린 적이 없고, 마르트가 늙고 병 들어갈 때에도 젊은 모습으로 묘사했다. 보나르는 아내의 모습을 끊임없이 바라보고, 기억하고, 그려냈다. 기꺼이 과거의 한 시점에 남아 과거를 현재로 불러와 파노라마처럼 펼쳐놓았다. 낡은 기억이지만 아름답다.
마르트 외에도 잠시 모델이 되어준 여성과의 만남이 있었지만 이내 작별을 고했고, 마르트와 고양이를 돌보며 프랑스 남부 시골에서 1947년 생을 조용히 마감한다.
진실된 예술은 일상의 작은 기쁨들 속에 숨어 있다
청년이었을 때 보나르는 파리에서 젊은 화가들의 모임인 나비파의 일원이었지만, 마르트를 만난 후 파리를 떠난다. 60년 동안 한결같은 일생, 같은 주제, 같은 그림을 반복하며 살았다. 결핍 없는 가정에서 나고 자라 모난 부분 없이 겸손하고 조용한 인물이었던 보나르의 인생에서 마르트와의 특별한 관계를 제외하면 긴장과 역경은 없는 평범한 일상이었다.
보나르의 작품은 화단에서 매우 상반된 평가를 받아왔다. 누군가는 사소하고 진취적인 면모는 전혀 없는 그림이라고 비판했고 누군가는 우리 시대의 위대한 화가이자 걸작이라고 칭송했다. 상반된 평가 속에도 보나르는 그저 삶에 대한 애정을 묵묵히 표현해 나갔다.
어떤 날은 마르트와 보내는 일상이 답답했을 수도, 분명 숨 막히는 순간들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다시 붓을 잡고 대상을 바라보고 가장 아름다운 색을 입히고 고양이를 쓰다듬고 반짝거리는 햇볕이 내리쬐는 창문 바깥의 풍경을 바라보고 아내의 머리카락을 쓸어 넘겨주는 일상의 작은 기쁨들은 평생에 걸친 위대한 완성이 되었다.
한편의 알록달록한 시처럼 다가오는 보나르의 작품은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 같다.
“진실된 예술은 일상의 작은 기쁨들 속에 숨어 있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