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중섭
아빠는 털 잠바를 입고 그림을 그리고 있어요!
석파정 미술관에서 올해 이중섭의 미공개 엽서화를 여러 점 공개했다. 2022년도 서울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린 이건희 컬렉션 이중섭 전시에서 가족을 그리워하며 담은 작품을 많이 봤지만, 이중섭의 편지화는 볼 때마다 그 마음을 곡진히 헤아리기가 어렵다.
친구들이 돈을 모아 사준 따스한 털 잠바를 입고 붓을 들고 환한 웃음을 짓는 아버지 이중섭. 서울 전시만 성공하면 가족을 만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과 더불어 ‘아빠 힘내세요!’라는 글자들까지 춤을 추고 있는 것 같다. 하지만 결국 전시는 성공하지 못했고 가족의 품으로는 끝내 돌아가지 못했다.
자전거를 꼭 사주겠다는 아버지를 기다렸던 두 아이, 죽는 날까지 재혼조차 하지 않았던 아내 마사코, 또 오겠다는 약속을 지키지 못한 아버지. 가족이란 자신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 살아내도 각자의 아픔들이 존재하기 마련이다.
아고리와 아스파라거스 군
이중섭은 1916년 9월 16일 평안남도 평원군 조운면 송천리에서 부농(富農)의 아들로 태어났다. 양반 출신의 부모님은 지역에서도 유명한 지주였기에 유복한 유년 시절을 보내며 자랐다.
어린 시절부터 혀에 붓을 대가며 물기를 조절하는 방법을 스스로 터득하여 그림을 그리는 것을 좋아하던 미소년은 공부에는 영 소질이 없었다. 오산고등학교로 들어가 만난 미술부 교사 임용련은 중섭에게 서양 미술의 기법과 한글을 작품으로 전환하는 기법 등을 가르쳤다. 민족주의적 성향과 ‘ㅈ ㅜ ㅇ ㅅ ㅓ ㅂ’ 독특한 서명도 이 시기, 임용련의 가르침에 의해 형성된 것이다.
1937년 중섭은 일본으로 미술 공부를 하러 문학학원에 입학한다. 아내 마사코와는 이곳에서 만나게 된다. 당시 미술과에는 이씨 성을 가진 학생이 세 명이나 되어서, 교사가 ‘이 상!’이라고 부르자 세 명이 동시에 ‘하이!’라며 대답했다. 세 명의 학생을 구별하기 위해 생김새를 특징으로 별명을 붙여주었는데 중섭은 턱이 길어서 ‘아고리’라고 불렸다.
키도 크고 잘 생긴 턱이 긴 청년 ‘아고리’. 수줍게 복도에서 마사코에게 인사를 건네고 함께 음악을 들으러 다방에 가자고 데이트도 신청했지만, 당시 남학생과 단둘이서 다방에 간다는 사실이 너무 부끄러워 마사코는 고장 난 로봇처럼 삐걱거리다 재빨리 도망쳤다.
연인 사이가 된 이중섭의 애칭은 아고리, 마사코의 애칭은 아스파라거스 군이었다. 마사코의 발가락이 아스파라거스를 닮아서였다. 다소 짓궂은 느낌이지만, 두 사람은 서로의 애칭으로 부르고 불리는 것을 행복해했다.
어머, 저기 댁네 남편 지나가요!
당시 세상은 전쟁 중이었다. 미군기가 도쿄를 공습하면서 문화학원도 존속이 어려워졌고, 이대로 일본에 머무르면 중섭은 일본군 병사로 징병될 수밖에 없어 서둘러 귀향했다. 언제 다시 마사코를 만날 수 있을지 알 수 없었다. 중섭은 마사코에게 전보로 전쟁이 더욱 악화되기 전에 프로포즈를 한다.
마사코는 편지를 받고 조선으로 건너가기로 결심한다. 힘들면 언제든지 돌아와도 된다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꼭 끌어안은 후 이별을 고했다. 공습을 피해 목숨을 걸고 몇 날 며칠을 배와 기차를 타고 조선으로 건너간다.
1945년 5월 두 사람은 원산리 중섭의 집에서 혼인을 한다. 두 아이 태현과 태성이 태어나고 중섭의 부모님의 지원으로 행복한 신혼생활은 또 다른 전쟁이 집어삼켰다. 1950년 6월 25일 남북 전쟁이 발발하고 원산은 곧 불바다가 된다.
아직 젖도 못 뗀 갓난아이를 꼭 껴안고 부산으로 피난을 온 중섭 부부에게 그 해 겨울은 유독 추웠다. 한 번도 제대로 된 직장을 가져본 적도 없던 유복한 집안에서 살아온 중섭에게는 처음 느껴보는 추위와 배고픔이었다. 일용 노동직으로 겨우 간간이 일을 했지만, 그림만 그리던 미대 오빠 청년에게는 너무나도 거친 나날들이었을 것이다. 그림 말고는 살아갈 방도를 알지 못하던 사람에게 전쟁은 너무나 가혹한 격랑이었다.
부산은 당시 피난민으로 포화 상태였기에 정부에서는 피난민들에게 제주도로 건너가길 권장했다. 마침 조카 이영진은 한발 먼저 제주도로 건너가 미군 기지에서 일을 하고 있었다. 부산보다는 제주가 조금 더 따뜻할까 하는 생각으로 중섭은 가족과 함께 제주도로 건너간다.
가족이 누우면 방이 꽉 차는 단층집 한 칸 셋방살이를 하며 한라산에 올라가 부추를 뜯어 오고, 아이들과 함께 바다로 나가 작은 게를 잡아와 팔팔 끓여 먹었다.
생계를 위해 특별히 일을 하지는 않았지만 가족은 화목했다. 다함께 바닷가로 나가 게를 잡고 석양을 함께 한참 동안 바라보고는 했다. 빨래터에서 함께 빨래를 하던 동네 여인들은 중섭이 아이들의 손을 잡고 바다로 나가는 모습을 보며 마사코를 놀렸다.
“어머! 저기 댁네 남편 지나가요!”
마사코는 동네 여인들과 함께 까르륵 웃곤 했다.
금방 다시 만날 수 있을 테니까
행복한 것과는 별개로 먹는 것이 부실하니 아내와 아이들의 건강은 영양부족으로 악화되어 갔다. 중섭은 아내에게 도쿄로 아이들을 데리고 돌아가면 어떨지 묻는다. 생활력도 없는 남편을 차마 홀로 두고 떠날 수 없던 마사코를 중섭은 안심시킨다.
“금방 다시 만날 수 있을 테니까.”
정식 여권을 발급받기가 어려운 중섭은 1년 뒤 장모님의 인맥으로 일본 거물 정치인이 보내준 신원보증서와 선원증을 가지고 그토록 간절했던 가족에게 향한다. 일주일간 꿈같은 시간을 보낸 후, 이대로 그냥 쭉 일본에 불법 체류하고 싶어 하는 중섭에게 마사코의 어머니는 한국으로 일단 돌아가 정식 여권을 받고 당당히 일본에서 미술 활동을 하라고 권유한다.
또 올 거니까. 이 말을 중섭과 마사코 두 사람은 철석같이 믿었다. 그것이 작별인지도 모르고 작별 인사조차 하지 않았다. 또 올 거니까, 분명 우리는 금방 다시 만날 거니까.
삶은 외롭고, 서글프고, 그리운 것
드디어 기회가 왔다. 1954년 6월 경복궁에서 열린 한국전쟁 개전 4주년 기념 전람회에 출품한 소와 닭을 그린 작품을 본 미국인이 뉴욕에서 개인전을 가지자고도 제안했다. 이 정도면 서울에서 개인전을 열어도 성공할 것이라는 자신감이 붙었다.
개인전이 성공하면 그림 값을 수금한 후 도쿄로 가면 되었다. 아직 정식 여권은 발급받지 못했지만 어쨌든 자금은 생길 것이다. “아빠가 자전거를 꼭 사줄게.” 편지에 쓴 내용처럼 태현, 태성에게 했던 약속도 지킬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어떤 이유에서인지 그림 값이 수금이 되지 않았다. 대구에서도 개인전을 열었지만 큰 성과는 없었다. 이제 모든 희망은 사라졌다. 삶이란 그런 것일까, 외롭고 서글프고 그리운 것 그뿐인 것일까. 투숙했던 방에는 많은 은지화가 있었지만 친구에게 적당히 처분해 달라는 말만 남기고 술만 마실 뿐이었다.
이상 증세는 이 무렵부터 시작되었다. 경찰서에 들어가서 자신은 빨갱이가 아니라는 말을 반복했고, 정신병원에 입원해서도 사람 소리만 들리면 빗자루로 온 병원을 청소했다. 아이들을 데리고 들어와 얼굴이나 손발을 씻겨주며 “나는 세상에 도움이 되는 일을 할 거야”라며 웅얼거렸다. 아내의 편지는 봉투도 뜯지 않고 답장을 쓰지도 않았다. 음식은 누가 억지로 먹이기 전까지 거부했고 지나친 음주로 간은 회복 불가할 정도로 망가져 갔다.
아무리 쓸쓸해도 꺾이지 마라
악화된 건강 때문에 병원을 옮기고 난 어느 날 밤, 중섭은 간이침대에서 자고 있던 조카 이영진을 조용히 깨우고 말했다.
“영진아, 너는 고아다. 그렇다고 해도, 아무리 쓸쓸해도 꺾이지 마라. 부탁이다.”
1956년 9월 6일 오후 11시 45분 영안실에 안치된 이중섭은 무연고자로 기록됐다. 문병 왔던 친구가 이 소식을 전했고 9월 11일이나 되어서야 장례를 치른다.
중섭의 마지막 유언은 조카인 영진에게 한 말인 동시에 두 아들 태현과 태성에게도 남기는 말이었을 것이다. 비록 무능하고 외로운 아버지였지만 가족에게로 향한 마음은 꺾이지 않고 살아왔었다. 그러나 한 번 희망이 꺾이자 인생은 순식간에 무너졌음을 스스로 알고 있었다. 그러니 부디 내 가족들은 그런 쓸쓸함으로 무너지고 꺾이지 않길 바라는 마음이 마지막 순간까지 무망하기만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