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시스 베이컨
내 안에 몬스터가 이만큼 자랐어!
우라사와 나오키의 만화 <몬스터>에 나오는 잔혹동화는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 봐도 그 내용이 섬뜩하다. 이름이 갖고 싶은 괴물이 사람들 몸속에 들어가 사람을 먹어 치우고 이름 없는 괴물이 되기를 반복하다 사내아이의 몸속으로 들어가 자라난 뒤, 모든 것을 먹어치워버린다. 멋진 이름이 생겼지만 그 누구도 불러줄 이 없는 고독한 세상이 되어버렸다. 괴물이 다 먹어버렸으므로.
괴물을 떠올려보라고 하면 각자의 문화와 나라 속에서 연상되는 다양한 괴물의 이미지가 있겠지만, 내 안의 괴물을 떠올려보라고 하면 그 이미지는 완전히 달라질 것이다. 프란시스 베이컨의 회화를 보다 보면 불쾌한 감정이 먼저 올라오면서 자꾸만 이것이 인간 내면의 몬스터의 모습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만화 몬스터에서 주인공 요한이 닥터 덴마에게 울부짖었던 대사처럼 프란시스 베이컨의 작품들은 말초신경계를 헤집으며 울부짖는 듯하다.
“나를 봐! 나를 봐! 내 안에 몬스터가 이만큼 자랐어!”
꺼져, 프란시스!
프란시스 베이컨은 1909년 10월 28일 아일랜드 수도 더블린에서 아버지 에드워드 베이컨의 5형제 중 둘째로 태어났다. 아일랜드에서 태어났지만 아일랜드인이 아니었고 아버지는 경마 조련일을 하기 위해 아일랜드로 온 퇴역 장교였다. 프란시스는 엘리자베스 왕조의 철학자였던 같은 이름의 프란시스 베이컨의 후손이기도 했다.
프란시스의 아버지는 독선적이고 강압적인 사람이었다. 자주 소리를 지르고 화를 냈으며, 한곳에 오래 머물지 못해 영국과 아일랜드를 자주 전전했다. 잦은 이주와 고질적인 천식으로 인해 프란시스는 정규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했고, 그나마 18개월가량 다닌 기숙사 학교에서는 적응을 하지 못해 금방 그만두게 된다.
비교적 여유 있던 가정이었지만, 약하고 예민한 감수성을 가진 아들을 이해하지 못했던 아버지는 정신교육을 시키겠다는 명목으로 마구간에서 마부들과 생활하게 했다. 14살부터 시작된 마부들과의 성 접촉은 프란시스의 동성애적인 성 정체성에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었다.
15살 또는 16살의 어느 날, 프란시스는 어머니의 속옷을 몰래 입어보다가 하필이면 아버지에게 들키게 된다.
“꺼져, 프란시스!”
집에서 내쫓긴 프란시스는 그대로 가출하여 런던의 길바닥에서 방랑 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훗날 프란시스는 아버지를 이렇게 묘사한다.
“치사한 놈의 아버지.”
괴물의 탄생
치사한 놈의 아버지였지만, 예기치 않은 미술 교육의 기회는 아버지로부터 온다. 영국 길바닥에서 방랑하고 방탕한 생활을 하는 아들이 걱정되었는지 프란시스의 아버지는 자신의 친구에게 프란시스의 미술 교육을 위탁한다. 그림을 그리든지 말든지 좋아하든지 말든지 프란시스의 꿈에는 관심도 없던 아버지였지만, 탕자로 살아가는 모습을 차마 눈 뜨고 두고 보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덕분에 프란시스는 파리에 체류하면서 초현실주의, 바우하우스, 아방가르드 등 다양한 예술적 체험을 하게 된다. 장식 미술을 시작한 프란시스는 동성애 연인이자 재정적인 후원자인 다양한 인연을 쌓아가며 실력을 인정받는다.
1933년 <십자가> 작품을 선보인 전시가 성공적으로 마치지만 그 뒤로는 전시가 잘 진행되지 않았다. 프란시스는 극단적인 보헤미안 생활을 더욱 적극적으로 하기 시작했다. 대부분의 재산은 노름으로 탕진하며 20대를 보낸다.
그리고 1944년 35살의 프란시스 베이컨을 ‘괴물 작가’로 출발하게 하는 충격적인 작품 <십자가 발치에 있는 인물에 관한 세 습작>을 세상에 선보인다.
시대의 잔혹성을 일깨우는 듯한 작품은 전쟁의 불행을 애써 잊으려던 대중을 흔들었다. 전시장을 들어서자마자 공포에 질려 도망치듯 빠져나가는 사람도 많았다. 보기 싫어도 자꾸만 보게 되는, 온 감각이 불쾌해지고 신경계를 긁어대는 잔혹한 그림 앞에서 많은 이들이 충격에 할 말을 잃었다.
“뭐라 이름 붙여야 할지, 이 느낌을 뭐라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다. – 존 러셀-“
나의 인생 전체가 내 그림 속에 들어와 있다
프란시스는 1961년 마구간을 개조하여 아틀리에로 죽을 때까지 여기서 작업했다. 이 작업실에 들어와 본 사람은 손에 꼽을 정도였고 작업하는 동안에는 아무도 들어갈 수 없었다. 무엇보다 작업실의 먼지를 캔버스에 발라 작업을 했기에 20년간 청소를 하지 않았다. 혼돈 속에서 편안함을 느낀다고는 했지만, 어린 시절부터 앓아온 천식을 더욱 악화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이른 나이에 성공을 했지만, 대부분의 재산은 여전히 노름으로 탕진했다. 새벽 6시 무렵부터 정오까지 일하고 작품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가차 없이 부숴버렸다. 그러고는 도박장에 가서 판돈을 걸었다. 고통과 열정을 반복하는 삶이었다.
프란시스의 연인들도 그에게는 고통과 열정의 순환이었다. 첫 번째 연인이었던 피터 레이시는 프란시스가 테이트 갤러리에서 첫 회고전을 열던 날, 악화된 병으로 사망하게 된다. 두 번째 연인 조지 다이어는 변덕이 심하고 오랜 시간 우울증을 앓고 있었다. 조지는 1971년 파리의 회고전이 개최되는 프란시스 베이컨이란 화가의 가장 큰 성공의 날, 프란시스가 보란 듯이 자살했다.
인간과 괴물 사이, 그 속에서 시작된 프란시스의 작품들은 점차 괴물이 되어가고 있었다. 더욱더 날 것으로, 더욱더 기괴하게, 더욱더 고통스럽게 그려진 그림들을 프란시스는 ‘나의 리얼리즘’이라고 표현했다. 사물의 시각적 외양을 묘사하지 않는 대신 실재하는 시각과 지각의 경험을 그린 그림은 프란시스의 인생 전체가 들어가 있었다.
한 인터뷰에서 프란시스에게 그림의 잔혹성과 폭력성에 대해 묻자 이렇게 대답했다.
“나는 내 그림이 폭력적이라 생각하지 않습니다. 우리 삶이 내가 그리는 것보다 훨씬 폭력적이지 않습니까?”
나는 왜 정육점의 고기가 아닌가?
작업실의 먼지들로 인해 심해진 천식이 결국엔 그의 발목을 잡았다. 1992년 마드리드에서 전시회를 준비하던 중, 천식으로 인한 발작 증세가 오고 6일 뒤 사망한다. 150살까지 살고 싶다고 했던 바람은 이루지 못했다.
그는 자주 정육점의 고기와 내가 어떤 부분이 다르지 않는지 반문하고 집착했다. 회화의 인물들은 가죽이 벗겨지고 피 흘리고 곳곳에 멍이 들어있다. 정육점에 걸린 해체된 고기 덩어리들과 다를 바 없는 형태로 그림을 그렸지만, 고깃덩어리와는 다르게 프란시스의 그림들은 유동한다. 뒤틀리고 비명을 지르며 악몽에 절규하고 고독에 몸부림친다.
보이지 않는 힘, 원초적 감각 속에서 느껴지는 리듬과 에너지는 들뢰즈의 말처럼 ‘감각을 신경계에 직접 호소’하고 전달한다. 살아 있다는 것은 프란시스에게 정육점의 고기와 같이 비참한 일이고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고통받고 고독에 몸부림치는 자기 자신 내면의 커져가는 괴물을 토하는 것으로 그는 모든 감각의 밸브를 열었다. 나를 봐, 내 안에 몬스터가 이렇게 커졌어!
그리고 인간의 모습으로, 다시 삶으로 돌아갔다. 삶으로 돌아가 다시 내면의 몬스터에게 잡아먹히지 않도록 ‘명랑한 절망감’을 가지고 다시 우연히 작품을 할 수 있는 순간을 기다리며 말한다.
“나는 정상적인 사람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건 삶이 아니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