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크 샤갈
그러니까 화가지!
클러치(clutch)란 두려움이나 통증을 꽉 움켜진다는 뜻으로, 결정적 순간에 흔들리지 않는 사람을 클러치맨이라고 부른다. 일생일대의 중압감과 맞닥뜨리게 되는 상황에서 자신의 능력을 믿고 발휘하는 나아가는 부와 명예를 이뤄낸 사람을 흔히 성공한 사람이라고 말한다.
초현실주의, 입체주의가 유행하던 시절 자신만의 화풍과 색채로 그린 샤갈의 그림을 보고 사람들은 손가락이 7개나 되는 기이한 그림이라고 수군거렸다. 7개의 손가락은 이디시어로 ‘손이 빠른’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자신의 최고 유화라고 손꼽히는 그림을 그리는 이젤과 풍족함을 상징하는 다양한 색깔의 물감을 짜놓은 팔레트를 들고 있는 샤갈의 모습에서는 망설임과 흔들림이 없다.
머리를 손질하고 좋은 옷을 꺼내 입고 단춧구멍에는 꽃을, 수놓은 넥타이를 맨 신사의 당당함. 7개의 손가락을 통해 본인은 빠르고 다양한 색채를 구사할 줄 알며 성공한 예술가라는 것을 선포한다. 그는 수군거리는 사람들을 향해 외쳤다.
“그러니까 화가지!”
가난한 유대인, 나치에 의해 핍박받고 망명생활을 해야만 했던 예술가, 그는 전쟁과 가난이라는 통증 앞에서 나약하지 않았다. 7개나 되는 자신의 손가락으로 더욱더 삶의 통증을 꽉 움켜쥐었다.
우리 집안에서 어떻게 너 같은 아이가 태어났을까?
마르크 샤갈은 1887년 7월 7일 러시아 차르 지배하의 유대인 공동체를 이루고 있던 비테프스크의 가난한 잡화점의 9남매 중 맏이로 태어났다. 히브리어와 성서를 유대인 학교에서 배운 샤갈은 13살에 공립학교로 진학한다. 당시 유대인은 비종교적인 학교에 다니는 것이 금지되어 있었으나, 샤갈의 어머니가 바친 뇌물 덕에 샤갈은 러시아어와 기하학 등을 배울 수 있었다.
그러나 학교는 샤갈에겐 너무 고달팠다. 반유대주의 차별과 낯선 언어, 유대교와는 부딪치는 가치관, 무엇보다 뇌물까지 쓴 어머니를 실망시키지 않기 위해 항상 긴장하며 또래들의 괴롭힘과 교사들의 노골적인 눈빛을 받아냈다. 발표를 하러 앞에 나가면 말을 더듬었고 학교를 다니는 것이 ‘비극’이라며 울먹거렸다.
어머니의 원래 바람대로 교사나 고등교육을 받은 직업을 가진 사람이 되려는 노력보다는 기하학을 배우며 그림에 관심을 보이게 되자, 반대할 것 같았던 어머니의 입에서는 의외의 이야기가 흘러나온다.
“얘야. 너는 재능이 있어. 나는 알아. 우리 집안에서 어떻게 너 같은 아이가 태어났을까?”
샤갈의 작품 중 대부분이 자신의 고향과 가족, 기르던 가축, 유대인들의 전통이 돋보이는 축제 등인 것은 어린 시절 가족이 가장 큰 자신의 지지자이자 보호자였기 때문이었다. 비록 러시아에서 태어났지만 샤갈의 뿌리는 유대인이자 사랑하고 자신을 믿어주는 가족의 일부였다.
러시아에서 나의 것들을 가져왔고, 파리는 그것들에 빛을 비춰주었다
19살이 된 샤갈은 관학풍의 화가로 유명한 예후다 펜에게 두 달 동안 그림 지도를 받은 후, 다음 해에 러시아의 수도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떠나 예술 학교에 다니게 된다. 학교의 젊은 교사의 도움으로 병역 면제, 장학금까지 받게 되지만 미천한 지방 출신이었던 샤걀이 가난을 피하기는 어려웠다. 타오르는 등잔불을 무망하게 바라보며 가난과 가족에 대한 그리움을 삼켰다.
“나는 타오르는 등잔불을 부러워하며 바라본 것이 한두 번이 아니다. 나는 이렇게 생각했다. 아, 등잔불은 자기 마음대로 탈 수 있구나. 목이 마르면 자신의 석유를 마시잖아. 나도 그럴 수 있다면…”
1910년 샤갈은 러시아를 떠나 예술의 도시 파리로 향한다. 당대 화가들인 고흐, 세잔, 고갱 등을 보며 자신의 그림의 색과 빛을 연구했다. ‘벌집’이라는 의미를 지닌 뤼셰라는 곳에 작업실을 얻은 샤갈은 가난한 예술가들과 함께 작업을 하면서도 당시 유행하던 입체주의, 야수파, 초현실주의 등 어느 물결에도 참여하지 않았다.
샤갈은 자신의 고향, 가족, 가축 등 유대인의 현실적인 삶과 꿈이 뒤섞여 있는 그림을 그렸다. 많은 이들과 함께 시끌벅적한 작업실에 있기보다는 홀로 루브르 박물관에 가서 박물관의 그림을 연구하고 돌아온 후 그는 자신만의 화풍을 완성시켰다. 샤갈에게 있어 나의 뿌리와 정체성은 유대인이었기에 파리의 화려한 화풍들은 그저 그림을 완성하기 위해 들어오는 햇살이었다.
“나는 러시아에서 나의 것들을 가져왔고, 파리는 그것들에 빛을 비춰주었다.”
러시아의 미술가 레오 바크스트는 샤갈의 그림을 보고 “이제 자네의 색채는 춤을 추고 있군”이라며 감탄했다.
그녀의 침묵은 나의 것이다
1909년 고향 비테프스크에서 벨라를 처음 본 순간, 샤갈은 알았다. 어린 시절 어머니가 샤갈의 재능을 보고 “나는 알아, 너는 재능이 있어”라고 한 듯이 벨라가 자신의 아내가 될 것이라고, 내 평생의 사랑이 될 것이라는 것을 샤갈은 한눈에 알아본다.
부유한 보석상의 딸이었던 벨라 로젠펠드는 러시아 문학까지 전공한 지성인이자 금수저였다.
“그녀가 걸어오는 순간, 나는 그녀가 나의 아내가 될 것임을 직감했다. 그녀의 침묵 속에서 나는 나를 알아보았다. 그녀의 침묵은 나의 것이었다. 그녀의 눈은 바로 나의 눈, 나의 영혼이었다. ”
물론 가난한 잡화점의 아들, 화가라는 직업으로 돈이나 벌 수 있을까 하는 염려에 벨라 집안의 반대가 있었지만 두 사람은 1915년에 결혼하여 벨라가 먼저 사망하는 순간까지 벨라는 샤갈의 뮤즈이자 안식처가 되어주었다.
고향에서 8년 동안 지내게 된 샤갈은 벨라와 결혼하여 딸 이다를 낳는다. 벨라와의 결혼이 너무나 행복했던 샤갈은 사랑과 기쁨이 훅 날아가 버리지 않도록 무중력 상태의 벨라와의 사랑, 결혼, 연인 등을 주제를 소중히 기록한다. 충만하고 열정적인 그림은 가난하고 외로웠던 청년에게 새로운 작품 세계를 열어주었다.
“벨라는 오랫동안 내 그림 속을 날아다니며 내 예술을 인도했다.”
다시 울기 위해 눈물을 닦아야만 했다
1923년 제1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파리로 망명 후, 1941년 제2차 세계대전으로 파리에서 미국으로 망명 길에 오른 샤갈은 성서와 삽화,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극장의 무대 디자인을 맡게 된다. 나치 군대의 공격으로 인해 그림 작업을 계속할 수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샤갈의 명성은 세계적으로 확고한 위치를 굳건히 하고 있었다.
그러나 본인의 예술의 원천이었던 아내의 죽음을 망명 생활 중 맞이하게 되자 샤갈의 작품은 점차 어둡고 우울한 색조로 변한다. 조국 러시아의 동포들은 학살당하고, 자신의 작품은 추방되고 소각 당하면서 고단한 유랑 생활을 하는 것을 그나마 버틸 수 있었던 것은 사랑하는 아내와 함께 있다는 사실이었다. 벨라가 사망한 후 샤갈은 9개월 동안 붓을 들지 못했다.
1947년 망명생활을 마치고 파리로 돌아온 샤갈은 이렇게 회고한다.
“내가 풍요롭게 발견하고 재체험한 자리에서 나는 그곳에서 다시 태어나야 했고, 그곳에서 다시 울기 위해 눈물을 닦아야만 했다. 결정적으로 모든 것이 내 안에서 깨어나고 내 사고와 내 삶의 틀이 되기 위하여 부재, 결핍, 전쟁, 고통 등이 있어야 했다.”
뿌리를 빼앗긴 설움과 가장 의지하고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지만, 다시 울기 위해 눈물을 닦고 다시 태어나기 위해 고난은 불가피했다는 것을 그는 받아들였다. 이후의 작품에서도 벨라는 여전히 아름다운 샤갈의 예술을 인도했다.
사랑이 내 그림의 모든 색채입니다
파리로 돌아온 샤갈은 러시아 태생의 25세 연하의 여인 발렌티나 브로스키, ‘바바’라는 애칭을 지닌 여인을 만나 새로운 생활을 시작한다. 바바는 샤갈이 자신을 되찾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며 함께 남프랑스의 프로방스에 정착한다.
바바와 안정된 생활을 하면서 더욱 다채로운 구도와 이미지를 사용했으며 그림뿐 아니라 도자기, 스테인드글라스 제작 등 수많은 작품을 의뢰받는다. 교회의 실내 장식, 극장 로비의 벽화, 성당의 창 등 종교 공동체를 위해 작업 활동을 충실히 하였으며 사랑과 예술을 통해 종교의 믿음을 표현했다. 1985년 98세의 나이로 마지막 작품 ‘또 다른 빛을 향해’를 남기고 프랑스 생폴트방스에서 세상을 떠났다.
‘큰 걸음’이라는 뜻을 가진 마르크 샤갈의 본명은 모이슈 세갈이다. 러시아의 유대인 빈민촌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부터 화가의 길을 걸어왔던 그의 재능은 어머니가 확신했고, 아내가 확신했고, 본인 스스로도 흔들림이 없었다. 두 번의 세계대전으로 나치를 피해 망명생활을 이어가면서도 자신의 정체성인 유대인의 이데올로기를 그려나가며 뚜벅뚜벅 두려움과 고통의 길을 걸어나갔다.
그를 지탱해 준 것은 사랑이었다. 어머니의 사랑, 아내 벨라의 사랑, 이후의 바바의 사랑, 조국에 대한 사랑. 움켜쥔 사랑은 그가 큰 걸음을 옮길 때마다 색채로 빛났다.
“사랑이 내 그림의 모든 색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