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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현비 Dec 11. 2024

중요한 건 누가 내 그림을 좋아하는가다

구스타프 클림트

세상에서 가장 로맨틱한 그림


벨베데레 궁전에 있는 오스트리아의 자랑이자 세상에서 가장 화려하고 로맨틱한 그림, 황금의 화가인 구스타프 클림트의 <키스>는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으며 여전히 황금빛으로 빛나고 있다.  


구스타프 클림트, <키스>, 캔버스에 금, 유채, 180×180cm, 1907~1908, 빈 벨베데레 미술관


남자가 여자의 몸을 안고 볼에 막 입을 맞추려는 순간의 모습, 절벽 위에 있는 것 같은 구도, 기하학적인 무늬와 간절함이 묻어나는 몸짓의 남성과 상반되게 남성의 목에 손을 얹으려다 만 애매한 손짓의 표정 없는 여성. 그 위에 칠해진 금의 반짝임은 하나의 성화처럼 보인다.


너무나 인상 깊어 다른 클림트의 작품을 보면 이게 클림트가 맞는지 다시 한번 설명을 보게 될 정도로 <키스>라는 작품은 강렬하다. 그만큼 클림트의 인생에서도 이 그림은 자신의 인생을 단 한 점에 압축한 작품이다. 


수많은 모델들과 거리낌 없이 성적 관계를 맺으며 살았던 클림트에게 이렇게 누군가를 갈망하는 마음이 있었을까? 클림트는 사랑이야말로 지상 최대의 가치이며 행복이며 영원한 꿈이라고 했다. 그러면서도 정작 가장 사랑했던 여성과는 끝내 결혼하지 못했다. 


“내 그림을 보면 거기에 답이 있다.”


여전히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으면서 다양한 해석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클림트는 자신의 예술을 황금시대로 만들기까지 단 15년밖에 걸리지 않았고 역사상 가장 강렬한 황금의 화가로 남았다. 그리고 그의 예술은 앞으로도 영원히 빛날 것이다. 



천장화를 꼼꼼하게 잘 그리는 젊은이들


구스타프 클림트는 7남매 중 둘째로 오스트리아, 비엔나 인근에 위치한 바움가르텐에서 1862년 7월 14일 태어났다. 당시 오스트리아 제국은 전쟁 이후 민족주의 확산과 정치적인 이유로 새로운 도시계획에 힘을 주고 있었다. 겉은 화려하지만 비엔나는 경제적으로 큰 위기를 맞이하였고 많은 사람들이 빈곤에 허덕였다. 


금 세공사인 아버지 밑에서 7남매가 살아야 했으니 클림트의 가정은 항상 가난할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 직업 덕분에 금을 세심하게 다루는 재주를 어깨너머 일찌감치 배웠고 14세에 자신과 같은 미술 재능을 보인 친동생 에른스트와 빈 공예학교에 장학금을 받고 입학한다. 


클림트와 동생 에른스트는 그림을 무척 잘 그렸다. 17살이 되자 클림트 형제는 친구 프란치 마치는 ‘쿤스틀러 컴퍼니’ 라는 예술 공방을 차리고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한다. 도시정비 계획이 진행되고 있던 비엔나에는 장엄한 공공건물이 대대적으로 들어서고 있었기에 벽화나 실내 장식에 대한 공급과 수요는 항상 붐볐다. 


기회는 재빠르게 다가왔다. 당시 ‘회화의 왕자’로 불리던 인기 화가 한스 마카르트가 갑자기 사망하고 미완성된 작업을 클림트가 마무리하면서 다음 일감도 자연스럽게 이어받는다. 새로 생긴 부르크 극장의 계단 천장화를 맡게 되어 꼬박 2년이라는 시간을 쏟아 붓는다. 세 화가는 부르크 극장 천장화를 그린 공로로 황제 메달을 수상했다.


‘천장화를 꼼꼼하게 잘 그리는 젊은이들’에 대한 입소문은 빠르게 퍼졌고 경제적 성공과 명성을 불러왔다. 서른이 되기도 전에 맛본 성공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클림트를 흔들었다.  


구스타프 클림트, <금붕어>, 캔버스에 유채, 181×66.5cm, 1902, 스위스 졸로투른 시립미술관


나의 친애하는 금붕어들에게


성공의 절정기에 선 서른 살의 클림트에겐 갑작스러운 죽음들이 방문한다. 아버지가 뇌출혈로 쓰러져 사망하고 그로부터 6개월이 채 지나지 않아 모든 작업을 함께해 온 동료이자 동지인 동생 에른스트가 심근경색으로 급사한다. 에른스트는 헬레나 플뢰게라는 상인 가문의 딸과 결혼했고 딸 헬레네-에밀리도 있었다. 두 사람의 연이은 사망으로 클림트는 남은 가족들과 에른스트의 아내와 조카, 헬레네 플뢰게의 동생이자 평생의 연인이 되는 에밀리까지 함께 살게 된다. 


가족의 죽음 때문인지 이전부터 내면에서 올라오는 자아실현의 욕구 때문인지 클림트는 잠시 벽화 작업을 중단하고 공방 파트너 프란츠 마츠와도 결별한다. 


1897년 클림트는 새로운 변화를 찾아 나선다. “각 시대에는 그 나름의 예술을, 그 예술에는 자유를”라는 신조 아래 젊은 예술가들과 비엔나 분리파를 결성하고 첫 번째 회장으로 선출된다. 전통적인 아카데미 신고전주의 화풍을 이제는 탈피하고 예술의 넓은 세계로 넘어가자는 목적이었다. 분리파의 첫 전시는 성공을 거두며 대중들에게 그 이름을 단숨에 알리며 많은 디자이너, 건축가, 공예가들이 합류한다. 


그러나 갑작스러운 전통의 탈피는 의뢰자들에게는 너무나도 당혹스러웠다. 빈 대학 본부 건물의 법학, 철학, 의학의 주제를 담은 천장화를 의뢰한 예술위원회는 클림트의 스케치에 발칵 뒤집어졌다. 누드의 여성들이 서로 얽힌 채로 허공을 떠다니는 모습을 본 사람들은 이게 과연 예술인가에 대해 거센 비판을 가했다. 지능이 모자란 것 아니냐는 의견까지 나오며 이 논쟁은 3년간 이어지다 결국엔 클림트는 계약금을 돌려주고 청탁을 거절한다. 


계속되는 반대와 온갖 공격에 클림트는 ‘나의 평론가들에게’라고 제목을 붙인 그림을 그린 후 출품하려 했다. 우둔함의 상징인 금붕어와 그런 금붕어를 비웃는 여성의 그림, 그러나 주변의 반대로 ‘금붕어’라는 제목으로 변경되었고 클림트는 이후로 다시는 공공건물 작업을 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구스타프 클림트, <아델레 블로흐-바우어의 초상>, 캔버스에 금, 은, 유채, 138×138cm, 1907, 뉴욕 노이에 갤러리


오스트리아의 모나리자, 우먼 인 골드 


자신의 예술을 추하다고 하는 비평가들에게 위풍당당하게 맞서 비엔나 분리파를 선언하기 위해서 클림트는 신전 제체시온에 <베토벤 프리즈> 벽화를 그린다. 34미터에 달하는 얼어붙은 음악, 그중에서도 베토벤이라는 인물은 모든 고난을 이겨낸 강철 같은 예술가들의 ‘왕 중의 왕’이었다. 엄숙하고 격정적인 찬가이자 중년에 접어든 클림트는 예술 세계를 세상에 알리는 선언으로 베토벤을 선택했다. 베토벤 시리즈에 사용된 금은 마치 예술가를 신처럼 보이게 했다. 이로써 클림트의 황금시대가 시작되었다. 


비잔티움의 황금빛 모자이크 매킨토시 디자인 속 켈트 여신 등 모두 살아있는 인간의 생명령보다 클림트가 중시한 것은 정교하고 화려한 디테일이었다. 클림트는 동시대보다 과거와 이국에서 더 큰 영감을 얻었고 클림트의 손끝에서 완전히 새로운 모습으로 재탄생했다. 


<키스>와 더불어 황금시대를 대표하는 <아델레 블로흐-바우허의 초상>은 예술가를 후원하는 유대인 부호 페르디난트가 부탁한 아내의 초상으로 4년 만에 완성되었다. 그만큼 모든 그림들 중 가장 많은 금과 은이 들어갔다. 


오스트리아의 모나리자, 우먼 인 골드로 불린 그림의 주인공 아델레와는 연인 관계이자 황금시대를 함께 했다. 실제로 두 번 연속 같은 사람을 모델로 그린 경우는 아델레가 유일했다. 10년간 클림트를 사로잡았던 황금시대는 이제 저물고 새로운 무언가를 찾고 있었다.  


구스타프 클림트, <에밀리 플뢰게의 초상>, 캔버스에 유채, 181×84cm, 1902, 빈 시립박물관


에밀리를 불러와!


많은 여성이 있었고 개방적인 만남을 이어졌지만, 클림트에게 있어 영원한 뮤즈는 에밀리 플뢰게였다. 죽은 동생의 아내의 여동생, 의상 디자이너이자 유일하게 클림트에게 초상화가 마음에 안 든다고 다시 그려오라고 한 여성이었다. 연인, 가족이자 예술로 소통할 수 있던 유일한 여성, <키스>의 주인공으로 추측되며 영감을 주는 신여성의 모습을 지닌 에밀리와는 평생 함께 했지만 결코 에밀리를 누드로 그리거나 결혼하려고 하지는 않았다.  


‘클림트 장군’이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클림트는 강한 사람이었다. 비엔나 분리파의 리더였고 자신의 생각을 쉽사리 굽히지 않고 뚝심을 지닌 사람이었다. 그렇지만 강한 사람에게 모두가 수긍하는 것은 아니었다. 분리파 내부에서의 분열이 일어났고 순수회화를 고집한 작가들과의 불화로 분리파를 결국엔 탈퇴하게 된다. 교수가 되고 싶었던 그의 바람과는 달리 학교는 그를 원치 않았다. 


50대로 접어든 클림트는 더 이상 황금빛을 사용하지 않았다. 이제 화가로서 더 올라갈 길이 없다는 사실을 직감한 그는 아틀리에에서 은둔에 가까운 삶을 살았다. 클림트가 두려워했던 것은 아버지와 동생처럼 갑작스럽게 찾아오는 죽음이었다. 그토록 두려워하던 방식대로 운명의 장난처럼 사망한 아버지와 동일한 나이 56세, 1918년 1월 11일 뇌출혈로 쓰러졌다. 쓰러지면서도 “에밀리를 불러와!”라고 하며 에밀리를 찾았다. 쓰러진 지 한 달이 채 못되어 독감으로 세상을 떠난다.  


구스타프 클림트, <죽음과 삶>, 캔버스에 유채, 177.8×198.1cm, 1910~1915, 빈 레오폴트 미술관


중요한 건 누가 내 그림을 좋아하는가다


클림트는 유산의 절반을 에밀리에게 남겼고, 에밀리는 사후 나타난 열네 명의 사생아 중 진짜 클림트의 자녀로 확인된 네 명에게 유산 중 일부를 분배해 주었다. 주고받은 편지의 대부분을 불태워 없애 버렸고 이후에도 독신으로 살았다.  


고전적인 역사화에서 출발하여 자신만의 독특한 화풍으로 주저없이 밀고 나간 클림트는 끊임없이 멈추었다 나아가는 인물이었다. 젊은 나이에 이른 성공을 기반으로 거침없이 자신의 화풍을 바꾸고 추하다는 평가에 이해하지 못하는 이들에게 일일이 설명하려 하지 않았다. 삶의 한자리에 안주하지 않고 불확실한 가능성에 주저 없이 도전하는 그의 예술은 오늘날에도 앞으로도 영원히 빛날 것이다. 


“중요한 점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내 그림을 좋아하는가가 아니라, 누가 내 그림을 좋아하는가 하는 문제다.”


반 고흐 뮤지엄에서 열린 클림트 특별전에서, 직접 촬영
베토벤 프리즈
현재 진행 중인 전시, 국립중앙박물관 <비엔나 1900> 중 클림트 작품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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