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로드 모네
신의 눈을 가진 사람
거대한 수련 연작을 무려 8점이나 만나볼 수 있는 곳, 프랑스 파리의 오랑주리 미술관을 방문했을 때의 기억은 강렬하여 쉽사리 잊히지 않는다. 일단 높이 2m, 너비 91m의 기다란 수련 연작이 타원형의 전시 공간에 둥그렇게 말려 있어 공간을 압도한다. 이 거대한 연작들은 모네가 직접 기증한 것으로 원래는 궁의 오렌지 나무를 보관하는 용도의 건물이 미술관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파리에는 루브르 박물관을 포함한 대형 박물관과 미술관, 관광지 등이 워낙 많기에 오랑주리 미술관은 이에 비하면 매우 작은 규모이지만, 다른 미술관에 비해 세련되고 깔끔한 디자인과 구성, 무엇보다도 모네의 수련 대규모 연작을 상시 볼 수 있다는 매력을 지니고 있다.
미술관은 다양한 기업 및 브랜드와도 협업을 진행하는데, 그중 2019년 VR 협업은 모네의 수련 그림을 더욱 풍성하게 이해할 수 있는 간접체험을 제공했다. VR 기계를 쓰면 방금 전에 보았던 수련 작품이 있는 타원형 방 한가운데에 위치하게 되고, 갑자기 미술관에 물이 조금씩 차오르게 된다. 물은 곧 미술관 천장까지 가득 채우며 잠기고, 금세 지베르니 정원의 수련이 있는 연못으로 이동한다. 이리저리 고개를 돌려보면 지베르니 정원의 다리도 보이고 각도별로 다양한 수련이 떠있는 모습이 펼쳐져 연못의 이곳저곳을 모네의 화풍 그대로 살펴볼 수 있다.
점차 시야가 흐릿해지는데 이는 노년에 백내장이 심해져 잘 보이지 않았던 모네의 시각을 재현한것이다. 모네의 시력에 따라 달라지는 수련의 모습을 가상세계로 보고 있으면 모네의 시간, 시력, 그가 보았던 빛과 색채까지 간접적으로 따라갈 수 있다.
동시대 화가 폴 세잔은 모네를 ‘신의 눈을 가진 유일한 사람’이라고 평가했다. VR이 보여준 화면대로 세상이 이런 빛과 색으로 보였다면 왜 ‘신의 눈’을 가진 사람이라고 하는지 어렴풋이 이해할 수 있을 것도 같다.
마침내 나는 눈을 떴다
1840년 11월 14일, 파리의 상인 가정에서 클로드 모네가 태어났다. 노르망디의 항구도시 르아브르에서 평탄한 유년기를 보낸 모네는 학업에는 특별한 관심이 없었다. 수업 시간 내내 선생님들의 캐리커처를 그렸고, 교과서 여백은 스케치와 낙서로 가득했다. 특히 뛰어난 풍자만화 실력으로 15살에 이미 지역의 유명인이 되었다. 한 장에 20프랑씩 받고 초상화 캐리커처를 그리며 제법 돈도 벌었다.
모네의 첫 스승이 된 것은 외젠 부댕이었다. 부댕은 젊은 모네에게 야외 풍경화의 매력을 가르쳐주었다. "자연의 빛은 매 순간 변한다. 우리는 그 순간을 포착해야 한다"라는 부댕의 가르침은 모네의 인상주의 작업의 토대가 되었다. 부댕과 함께 해변으로 스케치를 나가던 시절을 회상하며 모네는 "마침내 눈을 떴다".
화가가 되겠다는 아들의 결심에 아버지는 격렬히 반대했다. 유일하게 고모 마리만큼은 조카의 재능을 알아봤고 적극적으로 모네를 지원했다. 마리의 도움으로 모네는 1859년 파리로 오게 된다.
나가고, 떠나고, 함께 하는 예술가들의 리더
파리에서 예술 사립학교에 입학 후 1년 뒤 모네는 알제리 내전으로 군대에 소집된다. 그러나 장티푸스 감염으로 생명이 위독해지자 2년 만에 본국으로 돌아오게 된다.
다시 파리로 돌아온 모네는 화가 샤를 글레르의 화실에 입학했다. 당시 프랑스에서 돈을 버는 직업 화가가 되는 방법은 단 하나였다. 공적인 미술 교육기관인 에콜 데 보자르를 졸업하여 살롱전에 작품이 당선되어 화가로 인증받는 것. 오늘날 대학 입시 시험을 위해 미술 학원에서 똑같은 양식의 그림을 가르치듯, 화실은 학생들을 에콜 데 보자르를 입학시키기 위한 전통적인 미술 회화를 가르쳤다.
외젠 부댕의 가르침을 따라 자연과 풍경을 보는 눈을 떠 버린 모네에게 전통적인 회화 방식은 맞지 않았다. 설상가상으로 글레르의 화실이 문을 닫게 되자 함께 우정을 쌓은 친구들과 함께 퐁텐블로 숲 근처로 떠난다.
모델이었던 카미유와도 사랑에 빠지게 되며 두 사람은 결혼을 했고, 이를 반대한 아버지와 고모는 지원하던 생활비를 끊어버려 경제적으로 어려운 시절을 보낸다. 카미유가 모델이었던 <초록 드레스를 입은 여인>은 살롱에 출품되어 비평가들의 호의적인 평가를 받는다.
파리의 근교 아르장퇴유에 정착한 모네는 무명 화가와 예술가들과 함께 예술가협회를 조직하는데 이것이 바로 인상주의의 모태가 되었다. 친구들과 화실에 밖으로 나가고, 다른 지역으로 떠나고, 무명 예술가들을 모아서 함께 하자는 모네는 예술가들의 리더였다.
인상만 그렸다는 비아냥? 오히려 좋아
예술가협회가 조직된 이유는 새로운 시도와 혁신의 물결에 올라타 세상을 바꾸어 버리겠다는 거창한 의도는 아니었다. 이들은 매번 살롱전에 낙제했고, 낙제한 무명 화가들의 그림을 아무도 사주지 않았으므로 함께 모여 전시회를 열고 작품을 팔아보자는 취지였다.
1874년 첫 번째 그룹전에서 모네는 <인상, 해돋이>를 출품했다. 방문객이 거의 없는 적적한 전시회에 비평가 루이 르루아가 다녀갔고 다음 날 신문에는 ‘인상’만을 그리는 ‘인상주의자’다라는 비난의 글이 실렸다. 명백한 비아냥의 의도가 담긴 말이었으나, 몇몇 작가는 이 단어가 우리의 정체성을 잘 대변해 준다고 생각하게 되었고 점차 자신을 인상주의자로 인정하게 되었다. 비난은 오히려 모네를 인상주의의 리더로 확고히 하는 트리거 역할을 해주었다.
인상주의자로 자리매김을 하는 것과 별개로 생활의 궁핍은 계속되었다. 아내 카미유는 경제적 궁핍으로 인해 건강이 악화되었고 첫째 아들 장의 건강도 좋지 않았다. 결국 1879년 카미유는 둘째 아들 미셸을 출산한 후 세상을 떠난다. 카미유가 눈을 감는 순간까지 모네는 카미유를 모델로 그림을 그렸다.
색은 하루 종일 나를 집착하게 한다
예술가협회의 전시는 계속해서 적자와 혹평만을 남겼다. 르누아르, 시슬레, 세잔 등 많은 화가들이 탈퇴하고 모네 또한 다시 한번 살롱전에 도전하여 입선하는 데 성공하면서 전시회에 불참하게 된다. 수요와 공급이 없던 인상파 협회는 점차 붕괴되며 각자의 길을 가게 된다.
살롱전에 드디어 입선했으니 공식적인 화가로서 인정받은 모네는 최초의 개인전을 연다. 그의 나이는 마흔 살이 거의 다 되었을 때의 일이다. 경제적 궁핍에서 조금씩 벗어난 모네는 시골 마을 지베르니로 이주한다. 지베르니 집에 거대한 연못과 다리를 놓아 정원을 만들고 여러 명의 정원사를 고용할 정도로 안정적인 후원을 받으며 더욱더 빛이 넘치는 순간의 색채에 몰두한 <수련> 연작에 집중한다.
지베르니 정원의 <수련> 연작 이전의 <건초더미>, <루앙 대성당> 연작은 대중들에게 큰 충격을 가하며 대 성공을 거뒀다. 루앙 성당이 정면으로 보이는 장소 세 곳을 빌려 하루 10시간 씩, 아홉 개에서 열두 개까지 캔버스를 번갈아 가며 약 3달에 걸쳐 그림을 그렸다. 서로 다른 계절과 하루 동안의 시간에 따라, 다른 빛깔과 분위기를 담아낸 연작 시리즈는 소박하면서도 명상적이고 몽환적이었다. 집요하게 빛의 변화에 따른 색채를 포착하는 것, 오로지 그것만이 중요했다.
“색은 하루 종일 나를 집착하게 하고, 즐겁게 하고 그리고 고통스럽게 만든다.”
돌이라도 빛에 따라 모든 것이 달라진다
지베르니 정원에서 연꽃, 물, 풍경을 주제로 한 연작은 계속해서 성공을 거두며, 대중과 비평가들에게도 호평을 얻는다. 이제 인상주의자를 조롱의 의미로 부르는 이는 없었다. 그러나 시간 앞에서 인간은 무색하게 나이가 들고 신체 능력은 점차 퇴화한다. 신이 준 눈을 가진 이의 눈은 백내장 진단으로 실명 직전까지 이르게 되고, 세 차례의 수술을 받아 부분적으로 시력을 회복한다. 그러나 그토록 중요하게 여겼던 빛에 따라 달라지는 색채를 지각하기엔 역부족이었다.
이전처럼 보이지 않으니 모네는 자신만의 상상과 기억만으로 그림을 그려 나간다. 감성을 더한 내적 이미지로 목격하는 창조적인 시선이 새롭게 탄생하며 형태가 거의 없는 무정형의 예술, 원시적이고 추상적인 형태의 예술로 나아가게 된다. 사랑하는 아내를 잃는 순간조차도 그려야만 했던, 인생 전부를 바친 빛 변화를 포착하는 신의 눈을 가진 자는 시력을 잃었지만, 역설적으로 새로운 내면의 눈을 떴다.
“돌이라도 빛에 따라 모든 것이 달라진다”라고 했던 모네의 말처럼 빛은 시시각각 모든 것을 비추고 변화시킨다. 찰나의 아름다움을 포착할 수 있는 것은 내면의 눈을 뜬 사람이 발견할 수 있는 자의 특권이다. 평생의 고뇌였던 색채는 마침내 빛나는 순간들이 된 예술로 오늘날 우리와 마주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