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블로 피카소
일류의 조건
일본 작가 사이토 다카시의 ‘일류의 조건’은 절판되었다가, 박문호 박사의 추천으로 18년 만에 다시 출판되어 자기계발의 바이블로 자리 잡았다. 일류가 되기 위한 3가지 조건인 훔치고, 추진하고, 요약하는 힘을 기르고 숙달하면 인생을 훨씬 효율적으로 살 수 있다는 것이 책의 핵심이다.
여기서 훔치는 기술이란, 단순히 전문가의 기술을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것이라고 저자는 강조한다. 머리로만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생활에 녹여 습관화하는 것이 관건인 훔치기의 기술은 21세기인 현재만이 아니라 이미 역사 속에서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예술가들에게는 꼭 필요한 기술이었다.
“좋은 예술가는 모방하고, 위대한 예술가는 훔친다.”
아프리카 미술에서 입체파를, 어린아이의 그림에서 원시적 생명력을, 스페인 내전에서 ‘게르니카’를 나아가 많은 여성들의 마음까지 모두 훔친 이. 20세기 예술의 일류, 신화와도 같은 존재 파블로 피카소는 이미 일류의 조건을 시행하고 있는 사람이었다.
나는 라파엘의 환생이다
1881년 10월 25일, 스페인 말라가에서 태어난 파블로 피카소는 걷기도 전에 연필부터 쥔 그림 신동이었다. 이미 어린 나이부터 미술에 대한 재능이 뛰어났으며 미술교사인 아버지 밑에서 10살 때부터 본격적인 그림 공부를 시작했다. 아버지가 그린 비둘기 그림을 그대로 묘사하고, 아버지 무릎 위에 앉아 보았던 투우를 소재로 그림을 자주 그렸다.
14살, 아버지의 고집에 의해 바르셀로나 미술 학교 측에서는 아직 입학할 수 있는 나이가 되지 않은 피카소에게 입학시험에 응시할 수 있는 자격을 주었는데, 다른 이들은 한 달 정도 걸리는 과제를 하루 만에 완성시켜 시험관들을 당황하게 만들었다. 라파엘의 환생과도 같은 완벽한 그림을 그린 천재 소년의 입학을 고작 어리다는 이유로 마다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나는 네 살에 라파엘처럼 그렸고, 평생 어린아이처럼 그리는 법을 배우는 데 일생을 바쳤다.”
16살이 되자, 왕립 아카데미 입학시험을 치르게 되는데 이번에도 역시나 완벽한 데생을 제출하면서 스페인에서 내로라할 미술학교의 모든 시험을 가뿐히 통과했다. 다만, 학교의 수업은 너무나 따분하고 쉽고, 지루했다. 피카소는 자주 프라도 미술관에서 시간을 보내며 벨라스케스와 고야의 작품을 연구하고 모방 및 모사했다. 이때부터 이미 피카소는 거장들의 기술을 훔치는 방법을 체화하고 있었다.
청색 시대와 장밋빛 시대
1900년 열아홉 살이 된 젊은 예술가는 전 세계의 가난하지만 꿈으로 가득한 예술가들이 모이는 곳, 파리의 몽마르트르에 자리를 잡는다. 파리는 이중적인 곳이었다. 카바레, 물랭루즈 등으로 화려한 도심 이면에는 가난하고 병들어 구걸하거나 죽어가는 사람들이 존재하는 곳, 피카소는 소외되는 이들의 슬픔과 비참함을 다뤘다. 청색이야말로 우울을 표현하는 색 중의 색이었다고 생각한 피카소는 청색을 통해 세계와 사물을 보았고, 청색 옷을 입고 다녔다.
그 시절 파리는 가난하고 추웠으며, 절친한 친구 카사헤마스마저 실연의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비루한 삶을 사는 사람들뿐 아니라 피카소의 시절도 파란색이었다. 청색시대의 피카소는 모든 것이 불안하고 우울했다. 팔리지 않는 작품은 땔감으로 사용했다.
1904년 피카소는 바토바부아르의 낡아빠지고 엉성한 건물에서 화실을 마련했다. 어느 비가 억수같이 퍼붓던 날, 비를 피해 젊은 여인이 피카소의 집에 뛰어들어왔는데, 그 여인이 첫 번째 연인 페르낭드 올리비에다. 20세의 동갑내기였던 두 사람은 사랑에 빠졌고 이전의 우울함 대신 장밋빛 인생, 라비앙 로즈의 색채가 담긴 따뜻한 그림이 탄생한다. 분홍색, 베이지 톤의 따뜻한 장미색으로 화풍이 변하며 어릿광대와 곡예사 등 광대 그림을 즐겨 그렸다.
입체주의의 시작
1907년, 사방 6m에 달하는 <아비뇽의 처녀들>이 완성되었다. 아프리카 가면의 원시성, 세잔의 기하학적 구성 등 100장이 넘는 준비작업을 거쳐 탄생한 입체주의의 시작이었다. 두 번째 연인 에바를 모델로 피카소는 더욱 입체주의에 집중한다. 조르주 브라크와 공동으로 입체주의의 미술 양식을 창안하고 종이와 신문, 문자 등을 도입하여 작품을 만들었다.
에바가 결핵에 걸려 사망하게 되자, 귀족이었던 상류층 여인 올가를 만나 결혼하게 되며 올가의 요구에 따라 사실주의로 돌아가게 된다. 아내의 고위층 인맥을 이용하여 고객 맞춤의 그림을 그리고 작품 가격은 천정부지로 오르지만, 피카소에게 가정을 유지하고 영감 없는 그림을 그리는 일은 지루하기만 한 일이었다. 고전의 예술을, 다른 이의 영감을 훔쳐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나가는 새로운 자극이 필요했다.
1927년, 결혼 9년 만에 29살 차이가 나는 17살의 마리 테레즈를 길거리에서 만나 다시 한번 화풍의 변화를 맞이한다. 마리는 연인일 뿐 아니라 최고의 모델이기도 했다. 초현실주의의 영향을 받았던 시기의 마리의 모습은 두상이 변형되어 있고 철제 조각이나 용수철 냄비 뚜껑 등을 조합한 새로운 작품을 선보였다. 그러나 마리 또한 피카소와의 인연이 오래 가지 못했다. 더욱 강렬한 여인이 나타난 것이다.
게르니카와 우는 여인
초현실주의 사진작가인 도라 마르는 도발적이고 대담한 여성이었다. 술집에서 만난 도라는 스스로 손가락 사이를 찌르는 퍼포먼스를 하며 점차 그 속도를 올렸다. 손가락 사이사이 찔린 부위에서 피가 흐르며 금세 피투성이가 된 그녀의 손에 피카소는 손수건을 내밀었다. 순종적이고 천진난만한 마리와는 상반된 매력의 도라에게 단숨에 매료됐다.
도라를 만난 1년 후, 스페인 내전이 발발하고 나치의 폭격으로 게르니카가 초토화되는 일이 일어났다. 무차별 폭격으로 민간인들이 학살당했다. 소식을 들은 피카소는 6주 만에 약 7미터가 넘는 <게르니카>를 완성시킨다. 피카소의 회화사상 가장 폭력적이고 충격적인 그림으로 증오와 무지로 눈먼 피비린내 나는 폭격에 놀라 부릅뜬 눈, 20세기 최고의 비극적 작품으로 남게 된다.
도라의 영향으로 흑백 대비를 사용하고 불타는 집 공포의 여인인 도라, 죽은 아이를 안고 절규하는 여인 마리를 모델로 묘사했다. 모든 것이 불안정했다. 제대로 정리되지 않은 여자관계 속 매일 울고 있는 도라와 마리, 올가의 집착, 경악스러운 학살로 인해 큰 충격에 빠진 시민들과 어수선한 사회 분위기, 언제 터질지 모르는 전쟁, 퇴폐 예술로 규정짓는 나치의 행패까지. 피카소에게 이 시기는 모든 것이 ‘분노의 시대’였다.
나는 찾지 않았다, 발견할 뿐이다
여섯 번째 연인 프랑스와즈 질로와의 사랑과 파국적인 이별을 맞이하고, 74살에 마지막 연인 자클린 로크를 만나게 된다. 40살 연하인 여인인 자클린은 절대적 헌신형의 여성으로 피카소는 자클린과 결혼하며 드디어 한 여성에게 정착한다.
9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피카소는 자클린과의 결혼 생활을 하면서 작품 활동을 끊임없이 착수했다. 피카소가 세상을 떠난 후 자클린은 피카소의 유산을 공평하게 피카소의 연인들과 자식들에게 배분했다. 그리고 피카소가 사망한 지 13년 뒤, 피카소와 함께 지내고 싶다며 권총으로 생을 마감한다. 마리 테레즈도 피카소의 사망 소식을 듣고 4년 뒤, 자신이 어서 가서 피카소를 돌봐야 한다며 자살했다.
“나는 찾지 않았다, 발견할 뿐이다. 회화는 나보다 훨씬 강하다. 나는 회화가 원하는 것을 할 뿐이다.”
90세가 넘는 나이가 되어도 그는 여전히 회화에 사로잡혀 있었다. 계속해서 새로운 방법과 새로운 주제, 새로운 색채를 미술사에서 훔치고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다. 피카소가 세상을 떠나고 남긴 작품은 거의 50,000만 점 정도였다.
입체주의의 시작으로만 주로 알려져 있으나, 천부적인 재능으로 사실주의, 추상주의, 표현주의 등 다양한 회화적 기법을 섭렵했고 자신만의 독특한 회화적 기법을 개발해냈다. 미술사의 전통과 아프리카 등 다양한 나라의 문화 등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발견하고 훔치고 변형시킨 그는 여전히 20세기 예술의 일류로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