잭슨 폴록
피카소, 그놈이 다 해 먹었다
20세기 예술의 신화와도 같은 이름, 파블로 피카소. 고흐와 마찬가지로 전 세계에 피카소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모든 상식을 뒤엎는 혁신적인 피카소 예술의 탄생은 현대 예술가들에게는 뛰어넘기 힘든 거대한 장벽이었다. 피카소보다 더욱 파격적으로 도드라져 보이려 노력해도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었다. 예술가들이 무엇을 해도 피카소의 그림자는 끈질기게 따라붙었다.
“빌어먹을 피카소, 그놈이 다 해 먹었다!”
많은 예술가들이 피카소의 그림자에 절망했고 그중에서도 미국 화가 잭슨 폴록은 술에 취하면 자주 이 말을 내뱉었다. 도저히 극복할 수 없을 것 같던 열등감은 자주 그의 마음을 무너뜨리고 고뇌하게 만들었다.
미국의 술주정뱅이, 자신이 예술 활동을 이어나갈 수 있도록 후원해 주는 후원자에게조차 오줌을 갈기는 악동 예술가 잭슨 폴록. 뉴욕 현대미술관 큐레이터의 말처럼 ‘회화의 춤을 가져온’ 액션페인팅은 피카소의 그림자로부터 시작되었다.
광야의 카우보이
1912년 1월 28일, 와이오밍 주 코디에서 폴록은 다섯 형제 중 막내로 태어났다. 화가의 길과는 거리가 멀어 보이는 황량한 서부의 대지에서, 그는 자연의 거친 기운을 온몸으로 흡수하며 자랐다. 폴록의 부모님은 끊임없이 새로운 기회를 찾아 이주를 거듭했고, 어린 폴록은 9살이 되기 전에 애리조나와 캘리포니아를 오가며 방랑자적 삶을 경험했다.
아버지는 계속해서 직업을 바꿨고 그에 따른 잦은 이주로 가정은 늘 불안정했다. 형들은 일찍 독립했고 막내였던 폴록은 광야에 고립된 채 자랐다. 끝없이 펼쳐진 평원, 사나운 말들의 움직임, 인디언 보호구역에서 목격한 원시적 의식들은 내면의 에너지로 자리 잡았다.
특히 어린 시절 그가 목격한 인디언들의 모래 그림 의식은 후일 그의 혁신적인 드리핑 기법의 영감이 되었다. 샤먼이 모래를 뿌리며 치유의 의식을 행하는 모습은 훗날 폴록이 캔버스 위에서 보여줄 퍼포먼스의 원형이 되었다.
16살이 되던 해, 폴록은 캘리포니아로 이주한 형 찰스를 따라 로스앤젤레스의 매뉴얼 아츠 고등학교에 입학하며 본격적인 미술 교육을 받았다. 광야에서 자유분방하게 자란 카우보이에게 학교생활은 맞지 않았다. 야생마 같은 반항적인 성격과 잦은 음주로 2년 만에 퇴학당했다. 이때부터 그의 알코올 중독은 시작되었고, 이는 평생 그를 따라다닐 악령이 되었다.
미술치료, 상처 입은 예술가의 탄생
1938년, 심각한 알코올 중독으로 정신병원에 입원한 폴록은 융 심리학을 전공한 조지프 헨더슨 박사의 치료를 받게 되었다. 헨더슨은 폴록의 그림에서 특별한 재능을 발견했고, 미술을 통한 치료를 시도했다. 매 세션마다 폴록은 자신의 무의식을 드로잉으로 표현했다. 이 시기 그가 남긴 수백 장의 드로잉들은 원시적이고 본능적인 형태들로 가득했다.
"모든 좋은 예술은 내면에서 나온다."
치료 과정에서 폴록은 융의 저서들을 탐독했다. 특히 집단무의식과 원형(archetype)의 개념은 그에게 깊은 영감을 주었다. 그는 자신의 개인적 무의식을 넘어, 인류 보편의 원초적 이미지를 추구하기 시작했다. 피카소의 그림자에서 벗어나 진정한 자신만의 예술을 찾아가는 과정이었다.
구상적 요소들이 점차 사라지고, 대신 원시적이고 신화적인 형태들이 등장하기 시작한다. 무의식의 탐구는 단순한 치료를 넘어 예술적 방법론이 되었다. 의식적인 통제를 벗어나 자동기술법(automatism)을 실험하기 시작했다. 초현실주의자들이 사용하던 이 기법을 폴록은 자신만의 방식으로 발전시켰다. 캔버스 위에서 즉흥적으로 움직이며, 무의식의 흐름을 물감의 흐름으로 전환하는 실험이 시작된 것이다.
특히 나바호 인디언들의 모래 그림 의식은 그에게 결정적 영감을 주었다. 샤먼들이 바닥에 모래를 뿌리며 행하는 치유 의식은, 그의 어린 시절 기억과 맞물려 새로운 예술 형식의 가능성을 열어주었다. 폴록은 캔버스를 바닥에 눕히고 그 주위를 돌며 작업하는 방식을 시도하기 시작했다. 이는 후에 그의 트레이드마크가 될 드리핑 기법의 시작이었다.
나는 물감과 함께 춤을 춘다
1947년, 폴록은 마침내 자신만의 독특한 기법을 완성했다. 롱아일랜드 스프링스의 헛간을 작업실로 개조하고 캔버스를 바닥에 눕힌 채 그 주위를 자유롭게 움직이며 작업하기 시작했다. 물감을 흘리고, 떨어뜨리고, 튀기는 드리핑 기법의 탄생이었다.
"나는 붓으로 그리지 않는다. 나는 물감과 함께 춤을 춘다."
물감을 담은 구멍 난 캔을 사용하거나, 나무 막대기나 주걱, 때로는 주사기까지 동원했다. 작업 과정에서 폴록은 완전한 몰입 상태에 들어갔다. 폴록은 마치 무아지경에 빠진 듯 캔버스 주위를 움직였고, 그의 몸짓은 정교한 춤과도 같았다.
페기 구겐하임의 후원을 받으며 <넘버 1>을 시작으로 폴록은 연이어 걸작들을 발표했다. 평론가들은 그의 작품에서 우주적 질서와 혼돈을 동시에 발견했다. 물감이 만드는 얽히고설킨 선들은 마치 은하수처럼 보였고, 때로는 원시 생명체의 움직임 같기도 했다. 보는 각도에 따라 다른 모습을 보여주는 이 작품은, 마치 안갯속을 걷는 듯한 신비로운 경험을 선사했다.
성공은 나에게 감옥이나 다름없었다
폴록의 기법은 미국을 열광시켰다. 1949년 라이프지에 실린 ‘잭슨 폴록: 미국에서 가장 위대한 생존 화가인가?’라는 기사는 그를 일약 스타로 만들었다. 42세의 나이에 얻은 화가로서의 명성과 부, 작품은 비싼 값에 팔려 나갔고 주문은 쇄도했다.
기뻐야 할 화가로서의 성공은 오히려 폴록의 삶을 깊은 고립으로 빠뜨렸다. 왕관을 쓰는 자, 그 무게를 견뎌야만 하지만 미국에서 가장 위대한 화가의 탄생이라는 타이틀의 무게는 좀처럼 가벼워지지 않았다. 언젠가 다시 무명의 시절 나락으로 떨어질 것이라는 불안감, 아무도 자신의 예술을 이해할 수 없다는 자괴감, 모든 사람을 실망시킬 것이라는 두려움 이 모든 것은 어느 것 하나 가볍지 않았다.
술은 다시 그의 삶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아내 리 크래스너의 헌신적인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의 음주는 걷잡을 수 없이 악화되었다. 작업실에서 보내는 시간은 줄어들었고, 한때 그의 트레이드마크였던 드리핑 기법도 점차 생명력을 잃어갔다. "나는 더 이상 춤추지 않는다"라는 그의 말은 예술적 침체를 암시했다. 드리핑 기법을 그만두고 붓을 다시 잡았지만 대중과 평론가의 반응이 좋지 않았고 폴록의 알코올 의존과 추태는 악화되었다.
나는 내 그림 속에 있다
2년 넘게 새로운 작품을 만들지 못했고, 젊은 연인과의 관계는 그의 결혼 생활을 위협했다. 1956년 8월 11일 밤, 술에 취한 채 자신의 차를 운전하던 폴록은 롱아일랜드의 한 나무를 들이받았다. 차 안에는 클리그먼과 그녀의 친구 에디스 메츠거가 있었다. 폴록과 메츠거는 즉사했고, 클리그먼만이 기적적으로 생존했다.
그의 죽음은 미국 현대미술의 한 시대가 끝났음을 알렸다. 동료 화가 빌렘 드 쿠닝은 "그는 우리에게 길을 열어주었다"라고 말했다. 44세의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떠났지만, 폴록이 미술사에 미친 영향은 지대했다. 그는 유럽의 전통에서 벗어나 순수하게 미국적인 예술을 창조했고, 회화의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피카소의 그림자에서 벗어나려 했던 젊은 화가는 이제 20세기 미술사의 거장으로 자리 잡았다.
아내 리 크래스너는 폴록의 유산을 지키는 데 여생을 바쳤다. 그녀는 1984년 사망하기 전까지 폴록-크래스너 재단을 설립하여 젊은 예술가들을 지원했고, 그들의 집을 스터디 센터로 변모시켰다. 오늘날 이스트 햄튼의 폴록-크래스너 하우스에는 여전히 그의 물감 자국이 남아있는 작업실 바닥이 보존되어 있다. 마치 영원한 춤의 기록처럼, 나 폴록이 내 그림 속에 여전히 존재한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