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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이 잠들면 괴물이 깨어난다

프란시스코 고야

by 김현비

귀머거리의 집


스페인 마드리드 외곽에 위치한 ‘귀머거리의 집’이 발견되었을 때 많은 이들이 충격에 휩싸였다. 세상의 수많은 귀신들린 집, 흉가 체험을 즐겨 찾는 사람이라도 고야의 귀머거리의 집에 들어서서 검은 그림 연작들로 가득한 내부를 마주한다면 오금이 얼어붙을 것이다.


원래 집주인이 청각 장애를 가지고 있기에 ‘귀머거리의 집’이라고 불리던 장소를 청각 장애를 앓고 있었던 노년의 고야가 매입한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고야는 4년 동안 집 안에만 머물며 회반죽을 모든 벽에 바르고 총 14점의 거대한 광기의 검은 그림만을 그렸다.


01.jpg 프란시스코 고야, <자식을 잡아먹는 사투르누스>, 1820~1823년, 석화벽 유화를 캔버스로 옮김, 143.5 x 81.4cm, 프라도 미술관


거인, 악마, 마녀, 괴상한 노인, 일그러진 얼굴들과 공포와 광기의 표정들. 그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것은 <자식을 잡아먹는 사투르누스>로 한 번 보면 쉽사리 그 그로테스크함이 잊히지 않는다. 자신의 아들에게 권좌를 빼앗긴다는 신탁을 받은 사투르누스가 자식이 태어나는 족족 먹어치웠다는 그리스 신화를 기반으로 이전에도 많은 화가들이 즐겨 그렸던 주제였다. 아이를 잡아먹는 위협적인 포즈만 취하던 다른 그림들과 달리 이미 신체의 일부를 먹어 치운 결코 다음 동작을 멈출 생각이 없는 살점을 파고드는 손가락, 튀어나올 듯한 눈 흰자에 서린 광기와 살기, 넘치는 아드레날린으로 발기된 성기까지 이렇게까지 적나라하게 표현한 모습은 섬뜩함을 넘어 폭력적이다.


도대체 어떤 인생을 살아야 이런 공포와 광기가 나올 수 있을까? 들리지 않아 자신만의 고독과 고요의 세상에 갇힌 화가에게는 어떤 괴물이 내면에 도사리고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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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로지 성공만을 위해


프란시스코 고야는 1746년 3월 30일 화려한 궁정에서 멀리 떨어진 스페인의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다. 귀족 출신 어머니, 도금공인 아버지 밑에서 생계를 겨우 유지하며 살았고, 주변 환경은 메마르고 황량한 낙후된 지역으로 그 어떤 자연이나 문화의 영감을 받기는 어려운 곳이었다.


7살이 되던 해 고야의 가족은 사라고사라는 스페인의 큰 도시로 이사하게 되며, 13살의 나이에 호세 루상의 아틀리에에서 무료 수업을 받으며 데생 기초를 다진다. 루상은 판화부터 석고상, 생물 묘사까지 세세하게 고야에게 알려주었고, 고야 역시 자신의 유일한 스승은 루상이라고 후반기에 회고했다.


낙후되고 척박한 환경 속 가난했던 고야는 부와 출세를 원했다. 마드리드의 왕립 미술 아카데미 시험에 응모했지만 두 번이나 낙선하고 로마로 유학을 떠난다. 1771년, 25세의 고야는 고향의 대성당 천장화를 그리는 화가 선발을 위해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다. 스페인 촌티를 벗고 모든 문화의 중심지인 로마로 유학까지 다녀온 유학생이었지만, 천장화 작업을 따내기 위해 경쟁자가 요구한 보수의 반을 제시하여 자리를 차지했다.


이 젊은이는 화가로서 성공할 수만 있다면 뭐든 할 준비가 되었다. 그리고 유학으로 공부했던 그림과는 달리 오직 주문자의 요구대로 지배 계급의 취향을 적극 반영하며 성공의 첫걸음을 내딛는다. 오로지 성공만을 위해.


02.jpg 프란스시코 고야, <카를로스 4세와 그의 가족>, 1800~1801년, 캔버스에 유화, 280x336cm, 프라도 미술관


성공 후에 보이는 것들


1773년 27세의 고야는 어릴 적부터 친구이자 선배였던 가난한 궁정화가 바이유의 여동생과 결혼한다. 마드리드의 바이유의 집에 머물면서 바이유의 인맥으로 당시 최고 궁정화가 멩스를 알게 된다. 두 사람은 다양한 미술작품을 접했고, 이때 고야는 벨라스케스와 렘브란트 그림을 마음의 스승으로 섬기게 된다.


이 훌륭한 인맥은 고야 출세의 훌륭한 발판이 되었다. 멩스의 추천으로 태피스트리 밑그림을 그릴 수 있었고 태피스트리의 주제로 서민의 의상, 관습, 풍습 등을 그렸다. 그림을 의뢰한 귀족들은 서민 생활에서 나름의 이상을 찾으려고 했고, 화가로서 고야는 서민의 삶을 공감한다기보다는 출세에 대한 야망을 위해 서민들의 이상화한 모습을 귀족들의 마음에 쏙 들게 그렸다.


1786년 궁정화가가 되기 몇 년 전부터 고야는 왕의 동생과 친분을 쌓아 귀족사회에 인맥을 넓히고 초상화 주문을 대폭 받으며 인지도를 높였다. 국왕 직속 화가로 지명되자 수많은 왕족과 귀족의 초상 주문은 더욱 밀려들었고, 이제 고야는 반값에 그림을 그려주겠다는 말은 더 이상 하지 않아도 되는 부와 명예를 다 거머쥔 성공한 화가였다.


그토록 원하던 출세를 이루었지만, 그 속에는 계몽주의의 영향을 받은 지성인이 자리 잡고 있었다. 카를로스 왕가의 무능함과 부패, 귀족들의 허영, 성직자들의 위선, 미신에 집착하는 서민들의 이면들을 보며 미묘한 풍자와 비꼼이 점차 그림에 야금야금 반영되었다. 성공 후에 보이는 것들, 그것은 그토록 원하던 황금빛 인생이 아니라 인생에 대한 공허함, 인간이라는 존재에 대한 어두움이었다.


03.jpg 프란시스코 고야, <이성이 잠들면 괴물이 깨어난다>, 1797~1798년경, 판화, 21.5x15cm, 프라도 미술관


진실한 기괴함을 보여주겠다


세기말인 1790년대는 혼란의 시대였다.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며 스페인에는 처형당한 프랑스 왕 루이 16세의 사촌 카를로스 4세가 즉위했고 스페인의 지배계급은 큰 변화를 겪었다. 이단심문이라는 명목으로 프랑스 혁명의 인권선언 뉴스를 막고자 많은 이들이 화형이나 참수형을 당했고 치솟는 물가와 불안정한 정세에 서민들은 더욱 힘들어졌다.


1792년 늦가을, 고야는 안달루시아를 여행하는 중 심한 고열을 앓는다. 그 후유증으로 귓병이 생겨 46세의 나이에 청각을 잃게 된다. 이제 출세만을 꿈꾸며 귀족과 왕족들의 니즈에 맞춰 아부하던 야심 가득한 젊은 화가는 새로운 예술관을 가지게 된다. 규범화된 낡은 미술에서 해방되고 계몽주의 견해를 반영한 예술관은 점점 더 강렬해졌다.


고야는 이단심문소를 비판하기 위해 <로스 카프리초스> 연작 판화에 몰두한다. 심문을 교모하게 피하고자 기괴함을 앞세워 정치에 대한 풍자를 숨기는 동시에 ‘진실한 기괴함을 보여주겠다(시인 보들레르의 말)’라는 생각으로 최초로 정치적 의사를 표명했다. 사회의 악폐와 인습, 위선, 어리석은 남녀관계, 매춘부, 마녀, 무능한 정치가, 슬픈 민중을 기괴한 모습으로 그려냈다.


<이성이 잠들면 괴물이 깨어난다>에서 잠들어 있는 사람은 고야 자신이다. 사람들에게 기쁨을 주는 그림을 그리는 자기 자신을 재우면, 상상과 이성이 결합된 괴물이 깨어난다. 그리고 그 괴물은 이성이 사라진 세상에 대한 폭로를 하는 역할을 맡았다. 진실함 기괴함을 보여주는 괴물.


판화는 신문 광고를 통해 꽤 높은 가격에 판매를 시작했지만 곧 이단심문소에 의해 판매가 금지되었고, 수석궁정화가로 취임한 고야는 미판매 판화집을 국왕에게 바쳐 아들의 장학금을 받았다.


04.jpg 프란시스코 고야, <1808년 5월 3일, 프린시페피오 언덕의 학살>, 1814년, 캔버스에 유화, 26.8 x 34.7 cm, 프라도 미술관


예술가는 거울을 들이대는 자


1808년 나폴레옹의 스페인 침략으로 잔혹한 학살이 시작되며 나폴레옹의 형 호세 1세가 스페인 왕에 책봉된다. 결국 마드리드에서 시작된 시민 폭동을 계기로 독립전쟁은 6년간 계속되었다. 전쟁은 끝나고 정권은 계속 바뀌었지만 고야는 여전히 궁중화가였다. 스페인, 프랑스 세력 사이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자신의 이데올로기는 감춰야만 했고 여전히 권력 앞에서 작아져야만 했다.


명령으로 인한 귀족과 왕족의 그림을 그리면서도 고야는 자신이 그려야 할 그림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예술가는 거울을 들이대는 자, 피로 쓴 기록자, 진실의 증인으로서 사회적 책임을 가져야 한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1810년부터 그린 <전쟁의 참화>는 전쟁의 기근, 성직자 비판, 겁탈 등 전쟁의 비참함을 폭로했다. 가해자와 피해자가 명확히 누구인지도 알 수 없는 고통을 부르짖는 민중을 그렸다.


1819년, 72세의 고야는 마드리드 교외 언덕에 위치한 ‘귀머거리의 집’을 매입하고 은거한다. 검은 그림들 연작을 그린 후, 78세의 나이에 병 치료 목적으로 프랑스 도시 보르도에 거주하다 82세의 나이로 눈을 감는다.


05.jpg 프란시스코 고야, <개>, 1820~1823년, 석회벽 유화를 캔버스로 옮김, 131 x 79 cm, 프라도 미술관


모래 늪의 개


귀머거리의 집에서 발견된 검은 그림 연작 중 가장 마지막에 있는 <모래 늪의 개>는 앞의 그로테스크한 그림들과 느낌이 사뭇 다르다. 모래 폭풍이 세차게 일고 있는 황량한 공간에 개 한 마리가 머리만 내밀고 무언가를 바라보고 있다. 곧 닥쳐올 모래 폭풍에 의해 그 내민 머리마저도 흔적도 없이 사라질 것이다.


늪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발버둥 치다 그 힘마저 다 소진되어 죽음을 앞둔 개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허공을 응시하는 공허한 눈빛, 고독하고 무망한 영혼, 망연한 인생, 이것은 또 하나의 고야의 자화상이다.


출세와 성공만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달려온 젊은 나날을 지나 끊임없이 혼란한 시기 속에서 살아남기 위한 타협과 몸부림, 그럼에도 동시에 시대에 대한 고발과 부조리함에 저항하며 살아간 모순적인 화가. 가장 인간적이고 역사적이고 현실적인 증언을 남긴 화가, 그가 남긴 광기와 공허는 시대를 넘어 여전히 많은 이들에게 강렬한 울림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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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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