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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은 남들이 보게 만드는 것이다

에드가 드가

by 김현비

나는 인상주의자가 아니다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 ‘물랭루즈’ 등 19세기 프랑스 파리의 벨 에포크 시절을 담은 영화를 보면 강력한 개성을 지닌 화가들과 그림자같이 뒷모습이나 옆모습 등만 살짝 스치는 화가가 가끔씩 등장한다. 자세히 봐야지만 알 수 있는, 있는 듯 없는 듯한 존재, 관찰자, 도시의 그림자, 여성 혐오자, 관음증 등 다소 부정적인 이미지의 수식어가 잔뜩 있는 화가, 에드가 드가다.


성격도 사교적이지 않아서 더욱 괴짜 이미지가 가득한 드가의 그림에서는 이러한 다양한 수식어들이 이상하게도 힘을 발휘하지는 못한다. 산업화로 인해 도시의 생활을 하는 인간의 고뇌, 불안, 탐욕 그리고 무엇보다 정서적 허무와 고독을 담은 표정들이 보는 이의 마음을 흔든다. 있는 듯 없는 듯한 존재이지만, 관찰하는 존재의 시선이 도시의 표정을 향해 있음을 역으로 드러낸다.


프랑스어로 플라뇌르라는 단어는 경제적으로 여유로워 대도시를 돌아다니는 관찰자를 의미한다. 인상주의는 도시가 제공하는 새로운 감각적 경험을 그린 것으로 플라뇌르의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것이 큰 특징이다. 플라뇌르의 예술이라는 점을 보았을 때, 인상주의에 가장 적합한 화가는 에드가 드가이지만 본인은 사실주의 화가로 불리길 원했다. 모두가 야외로 나가 빛의 움직임을 쫓고 있을 때, 드가는 무용수, 빨래터, 광장, 카페 등 도시 속에 머물렀기 때문이다.


스냅 사진을 찍은 듯한 구조와 시선은 일반 사진보다 기발하고 우연히 포착한 것 같은 일상들과 무료한 표정들은 다른 인상주의 회화보다 더욱 인간적이다.


01.jpg 에드가 드가, <압생트를 마시는 사람>, 캔버스에 유채, 92×68.5cm, 1875~1876, 오르세미술관


나는 데생을 사랑해


1834년 7월 19일 일레르 제르맹 에드가르 드가(드가의 본명)는 파리에서 일곱 명의 아이 중 맏이로 태어났다. 은행장이었던 조부와 목화 사업으로 큰돈을 번 아버지 덕분에 부르주아로 태어나 돈 걱정 없이 유복하게 자랐다.


어머니는 드가가 12살 때, 막내 아이를 낳다가 세상을 떠났고 아버지는 재혼하지 않은 채 아이들을 키웠다. 사실 어머니는 삼촌과 부적절한 관계였고 그 광경을 드가가 목격한 적도 있다고 한다. 아버지는 어린 드가를 데리고 루브르 박물관에 자주 방문하며 어린 나이부터 거장들의 작품을 감상할 수 있도록 도와줬기에 아버지에 대한 존경과 애정을 성인이 돼서도 드러냈지만, 어머니에 대해서는 함구했다. 어머니의 부재 혹은 외도 때문일지, 드가는 평생을 독신으로 지냈고 어느 여성과도 적극적으로 사귀지 않고 어영부영 썸만 타다 끝나는 등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다.


아버지는 교양 있는 귀족답게 미술품 수집에 관심이 많아, 루브르 박물관뿐 아니라 수집가들을 만나러 다닐 때에도 드가를 챙겼다. 장남인데도 불구하고 화가의 길을 걷겠다고 했을 때도 아버지는 크게 반대하지 않았다. 오히려 별 성과가 없을 때도 느긋하게 기다렸다. 경제적 여유와 자신의 성향을 인정하는 아버지 아래, 드가는 제도권의 인정은 크게 연연하지 않았다.


아버지의 뜻의 따라 법학부에 먼저 들어가 공부를 시작했지만, 곧 그만두고 에콜 데 보자르 미술학교에 입학했다. 고전주의미술을 대표하는 앵그르의 제자인 스승 아래에서 그림을 배웠고 자신의 데생을 앵그르에게 직접 보여줄 수 있는 기회도 생겼다. 앵그르에게 칭찬을 받았고 기쁜 마음으로 앵그르 자화상과 똑같은 포즈로 자화상을 그렸다. 앵그르의 차분하고 체계적인 예술과 윤곽선이 선명한 그림을 드가는 평생의 지침으로 삼았다. 그는 무엇보다 데생을 사랑했다.


02.jpeg 에드가 드가, <자화상>, 캔버스에 유채, 81.3×64.5cm, 1854 또는 1855, 오르세미술관


마네와의 운명적인 만남


드가는 성실하고 얌전한 학생이었다. 그러나 학교의 교육과정은 특별히 쓸모가 있지는 않았다. 조용히 학교를 그만두고는 친척들이 많이 거주하는 이탈리아로 유학을 떠나 7백 점이 넘는 르네상스 예술가들의 작품을 모사하고 친척들의 초상화를 자주 그렸다.


이탈리아 유학을 마치고 파리로 다시 돌아왔을 때, 본격적인 화가로서의 활동을 위해 이제 그도 살롱에 도전을 해야만 했다. 경제적으로 아무리 여유로울지라도 사회의 관례에는 맞춰야 하는 법이다. 살롱의 취향에 맞는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세계를 여행하고 세상을 자유롭게 보던 부르주아가 고전적이고 전통적인 그림을 그리기에는 뭔가 어정쩡했다. 그렇기에 자신과 같이 애매한 포지션의 화가를 만난 것은 운명이었다.


여느 날처럼 루브르 박물관에서 스케치를 하던 드가를 보고 마네가 먼저 말을 걸었다. 마네 역시 부르주아 출신이며 살롱전에 걸맞은 그림을 그리기 어려워했던, 파격적이고 과격한 그림을 그리던 대담한 인물이었다. 자신의 예술에 대해 갈팡질팡하던 드가는 마네를 만나고 나서 더 이상 역사화가 아닌 일상적인 주제를 그리기 시작했다. 두 사람은 동료이자 미묘한 라이벌 관계를 이어나가며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받았다.


한 번은 마네 부부의 초상을 드가가 그려준 적이 있는데, 자신의 아내 부분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이유로 마네는 캔버스의 1/3 가량을 잘라버렸다. 사과조차 하지 않는 마네의 당당한 태도에 당연히 절교했어야 맞지만 드가는 그러지 못했다. 그저 충격을 받은 채 그림을 다시 들고나오는 행동만을 취했다.


사교적이고 대담한 기질을 가진 마네는 소극적이고 친구 하나 없는 드가를 자신보다 열등한 존재라고 여겼다. 마네의 영향력 안에 있었던 드가는 인상주의 전시회에 적극적으로 참가하면서 마네에게서 독립하기 시작한다. 세간의 인정과 명성을 중시했던 마네와는 달리 아웃사이더가 되어도 상관없다는 드가의 초연함이 두 사람의 가장 큰 차이였다.


03.jpg 에드가 드가, <마네 부부>, 캔버스에 유채, 65×71cm, 1868~1869년경, 기타큐슈시립미술관, 기타큐


열쇠 구멍으로 들여다보는 것 같은 그림


드가는 계속해서 인상주의 전시 그룹을 이끌었다. 살롱에 작품을 더 이상 내지 않았고 역설적으로 자신은 사실주의 화가라고 생각하면서도 인상주의 그룹이 독립성을 지킬 수 있도록 강경한 태도를 유지했다. 경제적 부와 대중의 사랑, 인정과 명성은 드가에게 그다지 중요한 요소가 아니었다. 당장 작품을 팔지 않아도 생계에 큰 지장이 없었기에 그가 원하는 것은 미술계에서 자신의 성격을 분명하게 드러내는 것이었다.


메리 커셋이나 모리조, 수잔 발라동 등의 여성 화가들을 지원했을 뿐 아니라 당시 논란이 많았던 고갱까지 모두 인상주의 그룹에 받아들였다. 전시회를 주도한 덕분에 인상주의는 더욱 풍성해지고 많은 이들이 전시에 참가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드가는 계속해서 무용수, 매춘부, 경마, 무용 등의 소박하고 일상적인 모습을 그리면서 기발하고 파격적인 구성과 풍부한 색감을 표현했다. 드가의 누드화는 노골적인 완벽하고 이상적인 몸매를 지닌 여성이 아닌, 주위를 의식하지 않은 채 자신의 공간에서 일상적인 생활을 하는 여성의 모습이 표현되어 있다. 마치 열쇠 구멍으로 들여다보는 것 같은 그림은 관음적이라고 부정적인 평가에도 불구하고 외설적인 장면이 들어가 있지 않다. 여성을 혐오한다는 꼬리표도 평생을 따라다녔지만, 혐오보다는 여성 노동자들의 갈등과 고통, 소외가 먼저 보인다.


나이가 들어서도 드가는 새로운 매체에 관심이 많았다. 유화보다는 파스텔을 선호했고, 당시 화가들이 사진에 거부감을 가졌지만 드가는 사진기를 적극 활용했다. 판화 기법 중 모노타이프(석판에 물감 묻힌 붓으로 그림을 그린 뒤 찍어내는 것)을 활용하기도 하고 조소 작업과 더불어 실제 토슈즈와 리본 등을 조각에 입히는 파격적인 재료의 혼합을 이용하기도 하였다. 그는 나이가 들수록 알고 있었다.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이 많지 않다는 것을.


04.jpg 에드가 드가, <목욕통>, 마분지에 파스텔, 60×83cm, 1886, 오르세미술관


예술은 내가 보는 것이 아니라 남들이 보게 만드는 것이다


사실 드가는 한쪽 눈의 시력이 젊은 시절부터 좋지 않았다. 30대 중반에 이미 오른쪽 눈이 거의 보이지 않았고 밝은 빛을 견디기 어려워했다. 나이가 들수록 시력은 점점 더 나빠졌고 50대와 60대를 보내면서 시력이 사라지는 것은 화가로서 사망선고나 다름없다고 자주 절망했다. 70대에는 겨우 사물의 윤곽과 색채만을 흐릿하게 구별했기에 회화보다 조각을 주로 작업했다.


눈도 거의 보이지 않고 귀도 거의 들리지 않아 파리의 거리를 홀로 배회하던 노인은 경찰의 도움으로 집으로 돌아왔고 일흔여덟 살이 되던 1912년부터 드가는 더 이상 작업 활동을 하지 않는다. 바깥세상에 대한 관심도 두지 않은 채 세상과 점차 멀어져 가다 1917년 폐충혈로 조용히 세상을 떠난다.


열쇠 구멍으로 엿보는 듯한 익명의 관찰자, 플라뇌르의 시선은 단순히 스스로 본 것만을 보여주지 않는다. 그 순간을 남들이 보게 만든다. 발레리나의 우아함 뒤에 숨은 노동의 진실, 세탁부의 구부러진 등에 새겨진 삶의 무게, 목욕하는 여인의 자연스러움에 담긴 인간의 품위. 이 모든 것들을 드가의 눈을 통해 '보게' 되었다.


“예술은 내가 보는 것이 아니라, 남들이 보게 만드는 것이다.”


드가가 사랑한 것은 단순한 선의 데생이 아니라, 선이 만들어내는 형태였고, 형태가 담아내는 움직임이었으며, 움직임이 드러내는 삶이었다. 삶이 만들어내는 고독과 소외, 고립된 개인의 순간을 보여주는 것이 그가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이었다. 오늘날에도 우리는 드가의 눈을 통해 세상을 다시 보고, 그가 포착한 인간의 고독과 아름다움 속에서 우리 자신을 발견한다.


05.jpg 에드가 드가, <발레 수업>, 캔버스에 유채, 83.5×77.2cm, 1874, 메트로폴리탄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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