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베르토 자코메티
끝이 어딘지 알 수는 없지만
스탠리 투치 감독의 ‘라스트 포트레이트’ 영화는 작가 제임스 로드가 자코메티의 마지막 초상화 모델이 되는 이야기를 그린다. "열흘이면 끝날 거야"라던 초상화는 몇 주, 몇 달로 늘어지고, 자코메티는 완성 직전의 그림을 번번이 지우며 다시 시작한다. 신경질적인 선들은 계속해서 캔버스에 쌓이지만 결코 완성되지는 않는다.
"모든 게 미완성이야."
모델이 자세를 바꾸면 격분하고, 소리를 지르고, 작업 중간에 매춘부를 만나러 가기도 한다. 어수선하고 혼란스러운 일상 속에서도 그의 시선은 언제나 인간의 본질을 향해 있다. 마치 그의 조각 작품처럼 길고 가느다란 실존의 그림자를 드리운 채로. 자코메티에게 예술은 끝나지 않는 여정이었고, 그 여정 속에서 인간 존재의 본질을 붙잡으려는 시도였다.
"어디로 가야 하는지 그리고 그 끝이 어딘지 알 수는 없지만, 그러나 나는 걷는다. 그렇다. 나는 걸어야만 한다."
고상한 귀족
1910년 10월 1일 스위스의 보르고노보라는 산골마을에서 첫째 아들로 조반니 알베르토 자코메티가 태어났다. 아버지의 이름 또한 조반니였으므로 사람들은 아이를 알베르토라고 불렀고 조반니라는 이름은 거의 잊혔다. 고상한 귀족이라는 뜻을 가진 이름은 아이에게 잘 어울렸다.
순하고 부끄러움이 많았던 알베르토는 화가인 아버지의 모델이 되어주고 물감을 만지며 놀았다. 무엇보다 알베르토가 좋아했던 것은 마을에 있는 작은 동굴이었다. 동굴에서 만난 바위를 자신의 가장 큰 친구라고 여기며 자주 사색에 잠겼고, 고산지대의 자연현상들을 관찰하고 지역 특유의 황량함을 즐겼다. 어른이 된 후에도 알베르토는 어린 시절이 행복했다고 자주 말했다. 여느 남자아이들처럼 장난을 치고 뛰어놀기보다는 책을 읽고 몽상에 빠지고 돌을 관찰하는 고상한 행복이었다.
아버지가 화가였으므로 알베르토는 자연스럽게 예술에 관심을 많이 가졌다. 스스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자 아버지는 자신의 작업실 창가 근처에 알베르토를 위한 자리를 만들어주었다. 8남매나 되는 대가족 중에서 동생 디에고는 훗날 수제 가구를 제작하는 장인, 막내 동생 브루노는 건축가로 활동했다. 온화한 부모님은 형제들의 개성을 존중하고 예술에 관해 이야기하는 시간을 자주 가졌으며 격려하고 필요한 도움을 주었다.
기묘한 여행
1921년 여름, 이탈리아의 한 신문에 네덜란드인이 사람을 찾는다는 광고가 났다. 몇 달 전 나폴리로 가는 기차 여행 중 이름 모를 남자, 스위스계 이탈리아 미술학도를 찾는다는 내용이었다. 알베르토는 광고에서 찾는 사람이 본인임을 확신하고 우편으로 답장을 보냈다.
예순한 살의 나이의 부유한 독신 남성 네덜란드 헤이그 출신인 피터르 반 뫼르스, 그는 고작 열아홉 살 젊은이에게 깊은 인상을 받았으며 함께 여행을 했으면 좋겠다고 제안했다. 모든 비용은 자신이 부담할 것이며 목적지는 이탈리아 베네치아였다. 고작 한두 시간 정도 기차 여행에서 만났던 낯선 사람의 이상한 제안, 동성애의 목적이나 다른 불미스러운 목적이 있는지도 아닌지도 전혀 알 수 없는 제안을 알베르토는 두려운 마음으로 받아들였다.
두 사람은 북부 이탈리아에서 만나 기묘하고 어색한 여행을 시작했다. 진심으로 노신사 반 뫼르스는 알베르토에게 깊은 영감을 받고 함께 여행에 동반해 주길 초대한 것 같았다. 그러나 노인에게 치명적인 단점이 있었다. 건강, 비가 오는 날씨에 험난한 여행길을 버틸 체력, 결국 신장결석으로 극심한 고통으로 그는 한 호텔에서 앓아누웠다.
알베르토는 고통에 몸부림치고 호흡이 점점 짧아지는 죽어가는 반 뫼르소를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의사들이 손쓸 수도 없이 그는 알베르토 옆에서 심장마비로 죽음을 맞이했다. 눈앞에서 함께 살아 움직이던 이가 갑작스럽게 죽어감을 본 이 경험은 알베르토에게 존재에서 비존재로 옮겨감, 삶의 부조리하고 연약하며 보잘것없음을 깨닫게 했다. 기묘하게 시작된 여행은 기묘하게 소실되었고 알베르토의 인생은 완전히 변했다.
“그날 한순간에 나의 일생이 변했다. 모든 것이 덧없이 느껴졌다. 인간은 어느 날 갑자기 살아 있는 게임을 이유 없이 그만두어야 함을 깨닫는다. 욕망이 너의 눈을 가려 삶을 이끌었다면, 인생은 생각보다 허망하고 덧없는 꿈이었음을 탄식하리라.”
매우 크게 되거나 미쳐버릴 것 같은 천재
20살이 된 알베르토는 회화와 조각 사이에서 진로를 고민하다 파리의 그랑드 쇼미에르 아카데미로 가 조각을 배웠다. 그의 스승인 부르델과의 사이는 좋지 못했다. 욕망에 이글거리는 청년인 알베르토가 독창적으로 자신의 작품을 만들기 시작했을 때 스승은 오히려 비아냥거리며 알베르토를 무시하곤 했다. 학우들은 알베르토를 보며 “매우 크게 되거나 미쳐버릴 것”이라고 말했다.
당시 파리는 입체파 미술가들이 많이 활동하며 영향력을 높이고 있었기에, 알베르토 또한 자신의 조각 능력을 입체파의 영역 안에서 테스트해야 함을 느꼈다. 입체파와 초현실주의자들과 교류하기 시작하며 함께 이탈리아 전시에도 참여했다. 젊은 천재 미술가가 호의적인 관심을 두는 것을 초현실주의 예술가들은 환영했다.
초현실주의의 영향을 받은 작품들은 명성 높은 화랑에서 후원자가 생겼고 비평지에도 좋은 평이 실리면서 부와 명예를 얻기 시작한다. 파리에 온 지 10년 만에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고, 자기 예술의 가치를 증명했지만 알베르토는 외로웠고 자신의 작품에 만족하지 못했다. 사랑하던 아버지의 죽음에 삶과 실존에 대한 생각이 다시 머리를 들었다. 이전에 했던 것과는 다른 작품을 만들기 시작하자 초현실주의자들은 그를 격렬하게 비난하기 시작했다. 한순간에 시대의 주도적인 흐름에 역행자가 되어 버렸다.
초현실주의와의 이별을 선택한 알베르토는 자기가 본 것의 진실한 대응물을 만들고자 노력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다시 파리로 돌아온 시기에는 10년 동안 대중에게 선보인 작품이 없었기에 후원자도 화랑도 모두 알베르토의 작품을 사거나 후원하려 하지 않았다.
보는 것(seeing)이 곧 존재하는 것(being)
철저하게 고독한 상태에서 그의 조각은 점차 키가 커지고 날씬해졌다. 재료마저 촉각적이고 신경질적이며 인간의 피부와는 다른 질감을 내면서도 동시에 생명력 있게 표현했다. 사람의 눈은 입체적으로 지각하지 못하기 때문에 평면 상태에서 거리감을 표현하기 위해 인체의 폭을 얇고 가늘게 만들었다. 어느 방향, 어느 거리에서도 최소한의 질량만이 남은 형체들은 가까이 다가갈 수 없다는 느낌을 주며 인간의 실존을 유지하기 위한 최소한의 거리를 의미했다. 보는 것(seeing)이 곧 존재하는 것(being), 인간을 그저 한 형태로 보는 것이 아니라 존재의 본질을 봐야 한다고 믿었다.
전쟁이 끝나고 유럽에서 건너온 죽음과 고독, 허무를 체험할 수 있는 작품은 뉴욕에서 큰 인기를 얻었다. 1955년 뉴욕 구겐하임 미술관에서 대회고전을 열고, 카네기 제단의 피츠버그 국제 조각 대상, 베니스 비엔날레 조각 대상 등을 수상하며 화려한 성공을 거둔다.
그러나 이러한 성공에도 알베르토는 자신이 보았던 죽음의 모습을 계속 생각하며 무서운 고독과 집요한 자기 응시의 탐구를 위해 작은 아틀리에에서 작품 활동을 이어갔다. 1965년 암으로 인해 고향으로 돌아갔지만, 1966년 1월 11일 과로로 인한 심장발작으로 쓰려져 생을 마감한다.
알베르토의 삶은 끊임없는 걸음이었다. 그의 작품 속 길고 가느다란 인간 형상들은 마치 자신의 생애처럼 끊임없이 걷고 있다. 어디로 가는지 모르지만, 멈출 수 없는 존재의 여정을 담아내고 있다. 완성이란 없으며 보는 것이 곧 존재하는 것이기에 실존하는 것들을 계속 보아야만 했다. 인생은 연약하고 허무하고 덧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존재하고 있으므로, 걸어야만 했다. 나약해 보이지만 결코 무너지지 않는 그의 작품은 인간의 본질을 바라보아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