즈지스와프 벡신스키
세 번 보면 죽는 그림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의 영화 ‘판의 미로’가 개봉했을 때, 많은 부모와 자녀들이 극장에서 영화를 보고 트라우마가 생겼다고 말한다. ‘나니아 연대기’ 비슷한 성장 모험 판타지를 기대하고 갔다가 어둡고 잔인하고 기괴한 기분 나쁜 괴물들이 번갈아가며 등장해 어린이들에게 충격을 가했다. 특히 석류 한 알을 집어먹은 오필리아를 쫓아오는 손바닥에 눈이 달린 괴물은 어른들에게도 엄청난 충격과 공포를 선사했다.
‘판의 미로’ 외에도 평소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의 영화에는 기괴하고 음침한 괴물들이 자주 등장한다. 감독은 대부분 즈지스와프 벡신스키의 그림에서 영감을 받아 창작해낸 괴물들이라고 말한다. 기예르모 감독뿐 아니라, ‘베르세로크’라는 다크 판타지 만화를 그린 일본의 미우라 켄타로 만화작가도 즈지스와프 벡신스키의 그림들을 오마주한 작화들을 많이 넣어 만화의 내용을 더욱 풍성하게 하였다. 영화 ‘에일리언’의 크리처 디자인 역시 마찬가지로 벡신스키의 작품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이쯤 되면 벡신스키라는 화가는 도대체 뭘 그린 사람일까 궁금해진다. 인터넷에 세 번 보면 죽는 그림을 검색하면 벡신스키의 목이 잘린 섬뜩한 여성의 그림이 나온다.
근거 없는 괴담이지만 처음 벡신스키의 그림을 접한 사람은 기괴함과 함께 결코 잊지 못할 그림이 된다. 마치 해맑게 ‘판의 미로’를 보고 그 후유증이 쉬이 사라지지 않는 것처럼.
아우슈비츠 수용소 근처에서
1929년 2월 24일 남부 폴란드 사노크에서 측량 기사였던 아버지와 어머니 사이에서 즈지스와프 벡신스키가 태어났다. 평범한 중산층으로 태어났지만 시대는 평범하지 않았다. 10살이 되던 해 발발한 제2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폴란드는 나치에 의해 분할 점령당했고, 무수히 많은 유대인들이 학살되고 있었다.
벡신스키가 다녔던 학교는 아우슈비츠 수용소가 있었고 어린아이가 보는 세상은 아름답고 즐거운 곳이 아니었다. 파괴된 건물들, 잿더미로 가득한 도시, 탱크와 철모 등 전쟁과 관련된 세상. 게다가 들어가는 것만 볼 수 있는, 결코 아무도 살아서 나오지 않는 아우슈비츠 수용소.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어린 시절에는 몰랐겠지만 자라면서 점차 그 의미를 이해하게 되었다. 전쟁이 끝난 후에도 그 기억은 벡신스키에게 깊이 각인되었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전쟁 후 새로 지어야 할 건물이 많으니, 많은 돈을 벌 수 있도록 건축학을 공부하기를 권했다. 벡신스키는 아버지의 뜻을 따라 건축학을 공부한 후 건축 현장에서 감독 일을 하게 된다. 기계적인 작업들 속에서 벡신스키는 금방 무료함을 느끼고 취미로 사진을 찍기 시작한다. 영화감독이 원래 꿈이었던 그에게 사진은 시각 예술에 대한 갈증을 달래주는 대안이었다. 사람의 얼굴이나 신체의 일부분, 조각난 인형, 기괴하게 변형된 오브제들을 찍으며 현실을 변형한 사진을 찍었다. 이때부터 이미 그는 뒤틀린 현실, 악몽과 환상을 오가는 작업을 진행하고 있었다.
환상적인 시기
포토샵이 없던 그 시절, 사진만으로는 머릿속으로 상상한 이미지를 구현하기는 어려웠다. 벡신스키는 더욱 전위적인 작품을 만들기 위해 196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드로잉과 회화 작업을 시작했다.
지옥, 환상, 쾌락, 악몽 등의 배경 속에서 인간인지 괴물인지 악마인지도 분간하기 어려운 생명체들이 등장하면서 점점 더 세밀하고 사실적으로 그림을 그렸다. 악마에게 계시를 받아 환상을 보고 그림을 그린 듯한 이 그림을 초현실주의를 넘어 환시 미술이라고 불렀다. 새로운 미술, 그것도 그 누구도 쉽게 범접할 수 없는 끔찍하지만 장엄한 벡신스키의 미술은 아무런 교육도 없이 독학으로 시작되었다.
1964년 바르샤바에서 열린 첫 개인전은 그야말로 센세이션이었다. 어디서도 본 적 없던 기이함과 아름다움이 공존하는 그림, 한 번 보면 뇌리에 박혀 쉽게 잊히지 않는 그림, 보고 나면 후유증으로 고생해야 하는 그림에 많은 이들의 호평과 비평을 동시에 받았다.
그 다음 해부터는 유화를 배웠고, 자신이 원하는 완벽함에 도달하기까지 5년간의 그림 연구를 하였다. 건축학적인 지식으로 설계된 치밀한 구도와 유화의 질감과 색감이 더해지자 사람들은 더욱 열광했다. 벡신스키는 매우 빠르게 폴란드 현대 미술의 주요 인물로 부상했다. 전시회는 모두 성공했고 이 시기를 스스로 ‘환상적인 시기’였다고 말했다.
내 그림을 이해하려고 하지 마라
벡신스키의 작품은 선풍적인 인기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의 해석이 개입됐다. 전쟁을 반대하거나 종교의 무지함, 역사와 정치에 대한 비판 등으로 그림의 의미는 점점 확대되었다. 작품의 제목은 모두 ‘무제’였다.
신문, 박물관, 대중, 언론 등이 매번 작품의 뜻을 물었고 상징적 해석을 요구할 때마다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나는 내 그림을 잘 모른다. 굳이 이해하려고 들지 말라. 그림에 대한 의미는 무의미한 것이다. 만일 이미지가 하나의 상징으로 귀결된다면, 그건 더 이상 예술이 아니다. 단지 일러스트일 뿐이다.”
그는 이미 자신만의 철학을 가지고 있었다. 어린 시절 눈앞에서 본 전쟁의 이유를 아무리 물어도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처럼, 자신의 작품을 이해하고 해석하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었다. 보는 사람의 감각과 경험이 중요했지만 세상은 집요하게 그를 괴롭혔다.
결국 벡신스키는 1978년을 마지막으로 전시회를 하고 그림을 공개적으로 전시하는 것을 중단한다. 이후에 어떤 발표나 상을 수여한다 해도 거절했으며 고향을 떠나 고립된 생활을 자처한다.
악몽 같은 말년과 죽음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 벡신스키는 또 한 번의 변화를 시도한다. 드디어 젊은 시절 사진기로 다 표현하지 못해 그림으로 표현해야만 했던 것들을 컴퓨터로 할 수 있게 된 것. 70대의 나이이지만 컴퓨터와 포토샵이 주는 만족은 기대 이상이었기에, 더욱 실험적이고 정교한 작품 작업을 하게 된다.
은둔형 작가였지만 폴란드 출신 파리 대학교수였던 후원자 드모초프스키의 적극적인 활동 덕분에 점차 더 넓은 세상에 벡신스키의 그림이 알려지고 다시 작품들은 전시가 되기 시작했다.
이렇게 삶은 잘 마무리되는 듯했지만, 1998년 아내가 암으로 세상을 먼저 떠나면서 모든 것이 악몽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젊은 시절 건축 일을 하며 사진을 찍을 때에 아내는 유일한 그의 뮤즈였고, 평생의 동반자이자 유일하게 단절된 세상에서 함께 있을 수 있는 사람이었다. 아내가 떠난 슬픔도 잠시, 1년 뒤 크리스마스 이브에는 아들 토마슈가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그 시체를 발견한 사람은 벡신스키였다.
아내와 아들, 사랑하는 이들을 허망하게 보내고 더욱 은둔자 생활을 하며 거주하는 벡신스키에게 찾아온 악몽은 더욱 끔찍했다. 75번째 생일을 삼 일 앞둔 2005년 2월 21일 오랜 지인의 아들과 친척에게 17차례 칼에 찔려 그 자리에서 사망한다. 범행을 저지른 이들의 나이는 고작 각각 19살, 16살에 불과했다.
답은 인간의 내면에 존재한다
끔찍한 사고로 생을 마감한 후, 인터넷에서는 벡신스키의 그림에 온갖 루머가 붙어 돌아다녔다. 세 번 보면 죽는 그림부터 시작하여 우울증에 걸린 사람이 그린 그림, 자살한 사람의 그림 등. 비극적인 사건은 더욱 그의 그림을 극대화하는 후광 효과를 냈다.
의미와 상징, 해석을 묻는 질문에 이해하려고 하지 말라고 그 어떤 것에도 영향을 받은 것이 없다고 말한 벡신스키의 그림은 여전히 예측할 수 없다. 그럼에도 많은 이들은 그의 그림에서 죽음과 고통, 기괴함으로 얼룩진 전쟁의 트라우마, 죽음에 대한 공포, 실존적 불안을 읽어낸다.
때로는 현실이 환상보다 더 그로테스크하게 환상적이고, 탐욕으로 일그러진 세상이 악몽보다 더 악몽적이기 때문에 벡신스키의 그림은 보는 이들의 감각과 경험에 들어와 삶의 가장 어두운 부분을 비춘다. 인간 내면의 고독, 불안, 공포 그리고 삶과 죽음에 경계를 보여주며 각자가 느낄 수 있는 깊은 어둠의 감각을 일깨운다.
결국 벡신스키가 자신의 작품을 무제라고 지으며 보여주고자 했던 것은 한 인간의 개인적 트라우마가 아니라 인간 존재의 본질이었다. 해석이나 언어로 규정될 수 없는 무의식과 실존적 공포와 불안, 나아가 그것을 느끼는 자기 자신의 고유한 경험의 실재를 강조한다. 답은 개인의 내면에 존재한다. 끝없는 의문과 불확실성 속에서 그럼에도 살아감을 인정할 것인지 아닌지를 벡신스키는 그 실존을 묻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