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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것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편안해진다

칼 라르손

by 김현비

전쟁 중에도 지니고 있던 책


이케아 매장의 쇼룸에 들어서면 아기자기하고 아늑하게 꾸며진 방부터 세련된 서재, 요리가 저절로 하고 싶게 꾸며진 주방 등 다양한 인테리어가 펼쳐진다. 마음에 드는 쇼룸을 몇 개 들어가 방에 잘 어우러지는 소파나 의자에 앉아 생각한다. 이 방 전체를 그대로 집으로 가지고 가고 싶다. 이케아는 가구만을 파는 곳이 아니라 하나의 라이프스타일을 판매한다. 이렇게 살아보는 것은 어떨지 제안하는 라이프스타일은 수려한 파티룸이나 거대한 건물이 아니라 일상 속 소소한 아름다움을 제시한다.


스웨덴 가구 브랜드 이케아는 스웨덴 국민 화가인 칼 라르손과 그의 아내가 함께 꾸민 집 스타일이 자신들의 정신적 뿌리라고 자주 언급한다. 스웨덴 문화 중 하나인 ‘피카(fika)’ 즉, 잠시 삶의 속도를 늦추고 현재 함께하는 시간을 즐기는 작은 삶의 가치가 잘 반영된 작가의 그림은 이케아 쇼룸 그 자체이다.


01.png 칼 라르손, <주방>, 1898년, 수채화, 32×43㎝, 스웨덴 국립박물관


밝은색의 무늬가 있는 벽지부터 작은 액자와 장식품들, 빈티지한 가구와 알록달록한 러그, 그 안에서 웃고 떠들며 식사하는 아이들, 레이스가 달린 커튼 사이로 들어오는 햇빛은 손질이 잘 된 화분들, 언제든지 몸과 마음을 녹일 수 있는 벽난로, 요리하는 아내. 잘 꾸며진 행복한 가정의 모습을 엿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의 응어리가 녹는다. 무엇보다 수채화로 된 그림이기에 그 어떤 색도 홀로 튀지 않고 잔잔히 그림 전체에 스며들어 있다.


행복한 그림을 그려 출간한 책은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군인들이 성경 다음으로 지니고 있었다고 한다. 고단하고 비참한 전쟁 속에서 칼 라르손의 행복하고 따스한 가정의 그림은 반드시 가족 곁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이자 스스로에 대한 믿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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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태어난 날이 가장 거지 같은 날이야


보기만 해도 미소가 번지는 행복하고 아름다운 그림, 그런 그림만을 그린 사람은 세상의 풍파 한 번 겪지 않고 잔잔하고도 온화한 인생을 살았을 것 같지만 인간은 그렇게 단순한 존재가 아니다. 자신과 불행을 온몸을 바쳐 그림에 투사한 화가도 있지만, 역설적으로 태어날 때부터 행복하지 못해서 오로지 행복만을 주목했던 화가도 있다. 칼 라르손의 인생은 한 빈민가에서부터 시작된다.


02.png 칼 라르손, <자화상>, 1906년, 캔버스에 유채, 95.5×61.5㎝, 우피치 미술관


1853년 5월 28일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태어난 칼의 당시 상황은 행복하지 못했다. 콜레라가 들끓던 지역에서 태어나 언제 병에 걸려 세상을 떠나도 이상하지 않은 빈민가에서 태어난 데다 아버지는 술주정뱅이였다. 빚을 지고는 사라져버린 아버지의 만행으로 칼과 어머니는 거리를 떠도는 노숙자가 되었고, 이후 악착같이 살아남아야만 했다. 고사리 같은 손으로 하루 종일 땔감을 주우러 다니면서도 화가였던 외할아버지의 재능을 닮아 친구에게 얻은 연필과 노트로 그림을 그렸다.


빈민가와 거리를 떠도는 생활을 했지만 어머니는 칼의 재능을 내버려두지 않았다. 스웨덴 왕립예술아카데미에 칼을 보냈고, 성실하게 공부한 칼은 책과 잡지, 신문 등의 일러스트레이터로 활동하게 되며 가족의 생계에 보탬이 된다. 사정이 조금 나아지며 이제야 숨통이 트이나 했지만 아버지가 돌아왔다. 그것도 사고로 다리를 저는 채로. 아버지는 가족의 생계와 자신의 병원비까지 책임지는 칼에게 자주 이런 소리를 내뱉었다.


“네가 태어난 날이 가장 거지 같은 날이야.”


훗날 나만의 가정이 생긴다면 절대 아버지 같은 가장이 되지 않겠다고 칼은 수십 번도 더 결심했을 것이다. 유년 시절이 불행한 아이들은 대체로 더 일찍 철이 든다. 칼은 그렇게 어른이 훌쩍 되어 갔다.


03.jpg 칼 라르손, <예술가의 아내와 딸>, 1885년, 수채화, 66×50㎝, 스웨덴 국립미술관


나는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남자다


1877년 칼은 스웨덴 예술왕립예술아카데미를 졸업한 후 파리로 가서 5년간 머무른다. 프랑스에서 시작된 인상주의 화풍을 보고 배우지만, 점차 자신만의 수채화 화풍을 연구하고 전향한다. 칼은 개인적 예술적 발전을 넘어 자신의 조국을 위한 것이길 바랐다. 인상주의를 받아들이기도 낯설었던 프랑스에서 소소한 풍경화나 일상적인 아이들이 등장하는 그림은 더더욱 인기가 없었다.


스웨덴으로 다시 돌아와 돈을 벌어 다시 파리로 돌아갔지만 여전히 쉽게 성공을 이룰 수는 없었다. 비싼 물가의 파리에서 계속 머물 수 없었기에 친구의 권유로 파리 근교의 그뢰즈에 머물며 예술 활동을 이어간다. 그리고 그뢰즈에서 평생을 함께 할 동반자 여성 화가인 카린 베르구를 만난다. 부잣집 딸이었던 카린과 빈민가 출신인 칼, 두 사람의 결혼을 카린의 부모님이 반길 리 없었다. 카린의 적극적인 설득으로 두 사람은 1883년 6월에 결혼식을 올린다.


같은 해 그뢰즈에서 그린 그림은 드디어 파리 살롱전에 입선한다. 스톡홀름 국립미술관에서도 칼의 그림을 구입하였고 후원자도 생긴다. 두 사람이 결혼한 지 1년 후인 첫아이 수잔이 태어난다. 결혼식 때도 행복함에 울었었던 칼은 수잔이 태어나자 이런 기록을 남긴다.


“나는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남자다. 너무 기뻐서 공중제비를 돌았다.”


네가 태어난 날은 거지 같았다고 했던 아버지에게 받은 상처는 새로운 가족으로 치유되었다. 이후 첫째 수잔과 7명의 자녀와 함께 대가족을 이룬 칼은 어린 시절의 결심처럼 결코 아버지 같은 아버지가 되지 않았다.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남자로,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집과 가정을 꾸렸다.


04.jpg 칼 라르손, <브리타와 나>, 1895년, 수채화, 스톡홀롬 국립미술관


가족과 집이 내 생애의 최고의 걸작이다


1895년 카린의 아버지는 자기 소유의 작은 집을 딸에게 준다. 순트보른에 위치한 집은 ‘릴라 히트나스(작은 용광로)’ 이름의 소박한 집이었다. 두 사람은 벽과 가구를 새로 칠하고 작업실을 확장하고 옷감에 직접 수를 놓으며 집의 모든 것들을 새로 만들고 재활용했다. 8명의 아이들은 집안을 뛰놀며 함께 물건을 만들고, 수를 놓고, 식물과 동물을 돌봤다.


“나의 그림은 나의 집과 같다. 어떤 호사스러운 가구도 어울리지 않는다. 단순하지만 조화로운, 그렇지만 질 좋은 것이 우리 집에 어울린다.”


20여 년간 가정을 꾸리며 행복한 그림을 그려 나갔지만 매일이 행복한 날일 수는 없었다. 둘째이자 장남이었던 울프는 맹장염을 심하게 앓다가 18살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고, 아이들 중 매츠 또한 태어난 지 두 달 만에 삶을 마쳤다. 칼에게 대형 작업 의뢰가 들어왔을 땐 아내 카린 혼자 쉴 새 없이 소리 지르고 싸우는 아이들을 혼자 돌봐야만 했다.


칼에게 의미 있던 작품 중 벽화 작품인 ‘한겨울의 희생’ 또한 정부의 검열에 걸려 오랜 시간 치열한 싸움으로 이어졌다. 자신의 가장 위대한 업적, 나라를 위한 그림을 당국이 거부하자 동료 화가들과 함께 스웨덴 국립 박물관에 전시하게 해달라고 항소했지만 결국 거부당했다.


그럼에도 칼에겐 늘 돌아갈 곳이 있었다. 홈, 스위트 홈. 가족과 함께 보내는 순간과 집에서 가족들을 그리는 순간만큼은 그의 말처럼 “생애 최고의 걸작이”었다.


05.jpg 칼 라르손, <축하의 날>, 1898년, 수채화, 32×43㎝, 스웨덴 국립미술관


때로는 아름다운 것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편안해진다


칼은 1919년 뇌졸중으로 갑작스럽게 사망한다. 당시 스웨덴에서 가장 유명했던 화가였기 때문에 그의 죽음을 애도하기 위해 유럽 전역에서 많은 이들이 조문하고 슬퍼했다.

빈곤하고 우울했던 어린 시절, 자신의 부모로부터 존재를 부정 당했던 아이는 자라면서 신을 믿지 않았다. 만약 신이 있다면, 이렇게까지 자신을 비참한 존재로 만들지는 않았을 테니까.


그러나 가족이 생기고 큰딸 수잔이 교회에 가기 시작하면서 수잔의 권유로 함께 교회에 나갔으며 말년에는 종교에 많이 의지하였다. 시작은 미약하나 끝은 창대하리라는 성경의 이야기처럼, 빈민가의 노숙자로 시작된 미약한 인생은 최고의 걸작인 집과 가족의 품에서 창대하게 마무리되었음을 그는 믿었을까. 칼이 사망한 후 9년 뒤 아내 카린도 평온히 잠자리에 든 후 조용히 눈을 감았다. 두 사람의 묘는 선드본 교회에 나란히 자리 잡고 있다.


칼 라르손에게는 부와 명예보다는 소소하고 평범한 일상, 가족 안에서 묻어나는 사랑 속에 따뜻함은 행복의 가치이자 자신의 가치였다. 그 가치와 생동감은 수많은 디자이너들에게 영감의 원천이 되었고, 스칸디나비아 디자인의 기초가 되는 동시에 미술공예 예술의 기본 철학이 되었다.


전쟁 중에도 품을 수 있었던 아름다움의 가치는 때론 한 인생을 구원하고, 나아가 누군가에게는 희망을 전달한다. 100년의 시간을 넘어서도 꾸준히 지속되는 칼 라르손이 표현한 행복에 마음이 열리는 것은, 화려한 색채나 기교를 넘어 평온하고 소소한 일상의 아름다움으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때로는 아름다운 것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편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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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akaoTalk_20250507_171029808_02.jpg 2024년 마이아트뮤지엄에서, 직접 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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