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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선함과 진실함을 그려야 한다

박수근

by 김현비

남 좋은 일만 시키고 세상 떠난 거 같아 억울하네


강원도 양구에는 박수근을 기념하기 위한 양구군립박수근미술관이 있다. 넓은 부지에 박수근의 그림 색을 닮은 화강암 질감의 건물들, 빨래터로 재현한 시냇가와 울창한 나무들이 뜨거운 햇빛을 가려주는 그늘막까지. 화려하지는 않지만 고즈넉하고 서정적인 미술관은 외부와 내부는 박수근의 성품과 작품을 닮아 있다.


KakaoTalk_20250430_182527896_16.jpg 양구군립박수근미술관에서, 직접 촬영
01.png 양구군립박수근미술관에서, 직접 촬영


넓은 부지와 건물임에도 불구하고 미술관이 소장한 박수근의 작품은 몇 점 밖에 되지 않는다. 대부분 경매로 팔려갔고 그나마 몇 개 안되는 소장품은 이건희 회장과 갤러리현대의 박명자 회장 등의 기증품이다.


살아생전 박수근은 자신의 그림이 이렇게 어마어마한 가격이 될 것이라 생각하지 못했다. 일제강점기와 전쟁을 겪으면서 굴욕적인 환경에서 그림으로 생계를 유지해야만 했고 호강 한 번 하지 못하고 생을 마감했다. 50년대 초 한 일터에서 함께 일했던 박완서 작가는 그런 그의 생애를 바로 옆에서 지켜봤기에 박수근의 그림 값이 40억이 훌쩍 넘어가는 것을 보면서 한때는 조금 억울하다고 했다. 남 좋은 일만 시키고 세상 떠난 것 같아, 사후의 영광보다는 생전에 명성도 좀 누리고 경제적 풍요도 좀 즐기면 얼마나 좋았을까. 물론 파리나 뉴욕 한 번 못 가본 화가가 세계 시장에서 제값을 받는 화가가 되어 얼마나 기쁜지 모른다고 덧붙였다.


박완서 작가 소설의 ‘나목’에는 박수근을 모델로 한 화가가 등장한다. ‘나목’의 본문에는 박수근이 생전 보여준 선함과 성실함, 진실함을 표현하는 문장들이 가득하다.


“보채지 않고 늠름하게, 여러 가지들이 빈틈없이 완전한 조화를 이룬 채 서 있는 나목, (중략) 나목에겐 아직 멀지만 봄에의 믿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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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레와 같이 훌륭한 화가가 되게 해주세요


박수근은 1914년 강원도 양구에서 딸 셋의 막내아들, 장남 그것도 3대 독자로 태어났다. 귀한 첫 아들이자 위로 누나가 셋이나 있으니 얼마나 사랑둥이로 자랐는지 그의 자상한 성품은 가족들에게 받은 사랑에서 시작되었을 것이다. 목숨 수, 뿌리 근 자 건강하고 오래 살라는 뜻으로 수근이라고 지었다.


5살 때 서당에서 한문을 배우고 8살 때 양구공립보통학교(초등학교)로 입학했을 무렵, 제법 부유했던 집안의 사업은 홍수로 인해 기울어지기 시작하며 생활은 날로 곤궁해져 갔다. 가장 좋아했던 과목이 미술이었던 수근은 상급학교로 진학하여 미술학교로 가려 했으나, 상급학교조차 진학하지 못했다.


4학년 때 일본인이었던 담임 선생이 수근의 그림을 보고 감탄을 하며 너는 천재니 그림만 그리라고 했다고 한다. 중학교를 갈 돈이 없다고 하자 선생은 이렇게 말했다.


“학벌 그기 없어도 잘하믄 그 이상이다. 너는 미술 공부할 필요도 없다. 넌 오직 네가 하고 싶은 것만 그려라.”


훗날 성인이 돼서도 이 이야기를 할 때면 박수근은 울었다고 한다. 가난하고 비루했던 시절을 버티게 한 것은 그 시절 선생님의 진심 어린 격려였을 것이다. 미술가가 되겠다고 결심한 것은 선생님의 인정을 마음에 담고 밀레의 ‘만종’을 보았을 때였다. 13살의 아이의 마음에 소명이 생겼다.


“하느님, 나는 이담에 커서 밀레와 같이 훌륭한 화가가 되게 해 주세요.”


KakaoTalk_20250429_110207235_15.jpg 양구군립박수근미술관에서, 직접 촬영


재산이라고는 붓과 팔레트밖에 없지만, 누구보다 행복하게 해드릴 자신은 있습니다


비록 상급학교는 진급하지 못했지만 보통학교를 졸업 후 수근은 산과 들을 다니며 풍경, 사람, 동물 등을 스케치하며 독학으로 그림 공부를 이어나갔다. 1932년 18살의 청년 수근은 11회 조선미술전람회에 ‘봄이오다’를 출품하여 입선하게 된다. 일제강점기 시기 조선총독부가 창설한 조선미술전람회는 거의 유일한 화가로서의 등용문이었다. 18살밖에 되지 않은 소년이 입선했다는 것은 대단한 화제가 아닐 수 없었지만, 이후 어머니의 건강이 악화되는 바람에 수근은 생계를 도맡아야만 하여 제대로 된 그림을 그릴 수 없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가족들은 모두 뿔뿔이 흩어졌다. 수근은 홀로 춘천에서 생계를 위해 일을 하다 1939년 아버지와 동생이 살고 있는 금성으로 가게 된다. 거기서 이웃집 17살 소녀 김복순을 만나게 된다. 유복한 집안에서 자라 고등학교까지 입학한 복순은 주변의 며느릿감으로 청혼을 많이 받았다. 다른 사람과의 혼인 이야기가 오고 가자 수근은 병들어 누웠고 복순의 아버지는 남의 집 장남을 저렇게 죽게 내버려 둘 수 없다며 어쩔 수 없이 복순과의 혼인을 허락했다.


약혼이 성립되고 약혼 예물을 장만하기 위해 수근은 서울로 가면서 아내 복순에게 편지를 썼다.


“나는 그림 그리는 사람입니다. 재산이라곤 붓과 팔레트밖에 없습니다. 당신이 만약 승낙하셔서 나와 결혼해 주신다면 물질적으로는 고생이 되겠으나 정신적으로는 누구보다도 행복하게 해 드릴 자신이 있습니다. 나는 훌륭한 화가가 되고 당신은 훌륭한 화가의 아내가 되어 주시지 않겠습니까?”


이들은 1940년 2월에 금성 감리교회에서 결혼식으로 올렸고 평남 도청에 취직도 되었으며, 그해 조선미술전엔 아내를 그린 ‘맷돌질하는 여인’이 출품 입선되는 겹경사를 맞이한다. 비록 가난한 살림이었지만 행복한 신혼이었다.


03.jpg 박수근, <나무와 두 여인>, 1962년, 캔버스에 유채, 130×89㎝, 리움미술관


옆구리에 화집 낀다고 간판쟁이가 화가가 되냐?


1945년 해방을 맞이하였으나, 1950년 6.25 동란이 터지자 수근의 가족은 피난을 떠나다 헤어지게 된다. 먼저 서울의 큰처남 집으로 피신한 수근은 애타게 복순과 아이들을 수소문한다. 천신만고 끝에 서울에 도착한 가족들과의 극적인 상봉을 하였다.


피난민들에게 마땅한 직장이 있을 리 없었다. 미군 PX에서 미군들의 초상화를 그려 주는 일자리를 겨우 얻은 수근은 당시 PX에서 일을 관리하고 있던 박완서 작가를 만나게 된다. 간판쟁이라고 수근을 깔봤던 박완서는 과묵하고 성실한 진짜 화가임을 알아보게 된다.


“’옆구리 화집 낀다고 간판쟁이가 화가 될 줄 아남’하고 비웃었다. (중략) 그러나 간판쟁이 중에 진짜 화가가 섞여 있었다는 건 사건이요 충격이었다. 나의 수모를 말없이 감내하던 그의 선량함이 비로소 의연함으로 비쳐지기 시작했다.”


박완서뿐 아니라 외국인들에게도 수근의 작품은 그저 간판쟁이 아마추어의 실력이 아니라고 느껴졌다. 인기리에 작품들이 팔렸고 덕분에 수근은 집을 장만하며 전업 화가로 활동하게 된다. 미국의 후원자도 생겨났다.

박수근의 작품은 저렴했고 해외에서는 독특한 유화 질감의 표현방식(마띠에르 기법)과 모노톤에 가까운 색채, 평범하고 소박한 주제에 관심을 가졌다.


04.jpg 박수근, <세 여인>, 1960년대 전반, 나무판에 유채, 21×46.4㎝, 국립현대미술관 이건희컬렉션


나는 인간의 선함과 진실함을 그려야 한다는, 예술에 대한 대단히 평범한 견해를 가지고 있다


해외와 외국인들에게는 관심이 점차 많아졌으나 국내에서는 반대로 그의 예술은 평가받지 못했다. 1957년 국전에 출품한 대작이 낙선되자 충격을 받은 수근의 음주벽이 심해지기 시작했다. 결국 과음으로 인해 왼쪽 눈에 백내장이 발병했지만 어려운 형편 탓에 수술 시기가 늦어져 실명에 이른다. 오른쪽 눈으로만 그림을 계속 그려가며 국내에서의 입지를 다져갔지만, 그 한쪽 눈마저 기력을 다해가고 있었다.


“천당이 가까운 줄 알았는데 멀어, 멀어……”


고통을 잊기 위해 또다시 마신 술은 극도의 간경화로 몰고 가 1965년 5월, 52세의 나이에 이 말을 마지막으로 남기고 생애를 마감한다.


과묵하고 다정한 사람이었다. 장년 박인숙은 아버지가 얼마나 자식들을 꽉 껴안고 잤는지 아버지 숨 좀 쉬게 해달라고 했고, 부인 김복순도 가정적이고 성실한 남편이라고 회고한다. 비 오는 날 노점상 과일 아주머니를 보고 한 사람에게만 사면 딴 아주머니들이 섭섭할까 봐 세 분 모두에게 조금씩 과일을 샀다. 정도 눈물도 많은 사람이었다.


밀레처럼 되고 싶다던 화가는 가난하지만 정직하게 평범하게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사람들을 그렸고 가지와 가지가 더불어 공생하는 나목들을 그렸다. 박수근에게 아름다움이란 평범한 인간의 군상, 인간의 선함과 진실, 함께 살아가는 것이었다. 평범하지만 찬란한 살아있는 나날들, 삶의 가치를 잃지 않고 살아가는 인생을 하나하나 붓으로 물감으로 층위를 쌓아 올린 거친 마티에르 질감은 보는 이들의 삶에 깊이 새겨진다.


“나는 인간의 선함과 진실함을 그려야 한다는, 예술에 대한 대단히 평범한 견해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내가 그리는 인간상은 단순할 뿐 다채롭지 않다. 나는 그들의 가정에 있는 평범한 할아버지와 할머니, 그리고 물론 어린아이들의 이미지를 가장 즐겨 그린다.”


05.jpg 박수근, <할아버지와 손자>, 1960년, 캔버스에 유화 물감, 146×98㎝, 국립현대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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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akaoTalk_20250430_182527896_15.jpg 양구군립박수근미술관에서, 직접 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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