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르나르 뷔페
우리가 생각하는 예술가가 아니야
미술사의 이름을 남긴 화가 중 고흐는 죽는 날까지 가난했고, 모네와 르누아르 또한 말년이 되어서야 경제적 여유를 적립했다. 이중섭은 물감을 살 수 있는 돈이 없어 은박지에 그림을 그렸고 모딜리아니 또한 경제적인 궁핍으로 인해 병이 걸려 사망했다. 이처럼 가난과 예술은 서로를 끈끈하게 연결하여 보는 이들의 안쓰러움을 자아낸다. 예술가는 모름지기 가난해야지 좋은 예술가가 될 수 있을 것만 같다.
가난한 예술가들의 예술, 헝그리 정신, 이 신념은 유독 한국에서만 도드라진 것이 아니었다. 서른 살이 되기도 전 20억 원이 넘는 롤스로이스를 타고 다니고 호수가 있는 성에서 살며 심지어 잘 생기기까지 했던(아내 또한 유명 여배우였다) 청년 예술가에게 당시 사람들은 이율배반적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우리가 생각하는 예술가는 부잣집 도련님이 아니야.
피카소가 질투하고 앤디 워홀이 극찬한 프랑스 최고의 젊은 화가로 칭송받던 베르나르 뷔페, 돈 좀 있다는 부잣집에는 뷔페의 그림을 하나 이상씩을 소유하고 있었지만 갑자기 여론이 바뀌었다. 부유한 예술가란 있을 수 없다는 집단의 뒤틀린 증오와 비평, 말도 안 되는 구상 회화에 대한 비판까지 뷔페의 예술은 그저 공산품이나 사치품으로 전락했다.
어찌나 미움을 받았던지 갤러리나 미술관 등에서는 뷔페의 그림을 치워버렸다. 함부로 그의 이름을 언급해서도 안됐다. 조국의 미움을 받던 중 다른 나라인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에르미타주 박물관에 자신의 그림을 전시하자 뷔페는 감사의 마음을 담아 ‘겨울 궁전’을 그려 기증했다.
한 천재의 살아남기 위해 그린 그림
처음부터 부자는 아니었다. 금수저를 물고 태어난 도련님이 아니었다. 오히려 가난한 유년 시절을 보냈다. 1928년 뷔페가 태어난 해는 1차 세계대전이 끝난 직후였다. 거울 공장을 운영하는 가정에 무심한 아버지와 독실한 가톨릭 신자인 어머니 아래에서 자라나며 전쟁의 상흔을 직접 보았다.
1940년 12살 무렵이 되었을 때는 2차 세계대전이 시작되었다. 프랑스는 나치에 의해 침공당하며 거리에는 굶어 죽는 사람과 얼어 죽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났다. 추위를 피해 루브르 박물관의 난방 통풍구에서 몸을 녹이며 창문 너머 바라본 명화들을 따라 그리는 것만이 몸이 약하고 소심한 성격의 뷔페의 유일한 취미였다.
미술에 관심을 보이자 어머니는 뷔페에게 미술 교육을 시켰고 15살의 나이에 에콜 데 보자르, 파리에서 가장 유명한 미술학교에 입학하게 된다. 나이 제한이 있기에 입학을 거절했던 에콜 데 보자르는 뷔페가 제출한 작품을 보고 조기 입학을 허락한다. 14살에 바르셀로나 미술 학교에 조기 입학했던 피카소처럼 천재의 혜성 같은 등장에 모두가 놀라워했지만, 역시나 여느 천재들처럼 뷔페는 학교생활에는 적응하지 못했다.
학교를 자퇴한 후 유일하게 자신에게 다정했던 사람, 어머니가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난다. 아버지 또한 가정을 떠나고 홀로 남겨진 뷔페에게 살아남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그림을 그리는 것 외에는 선택지가 없었다. 침대 시트나 식탁보를 찢어 캔버스 삼았고, 완성된 그림의 물감을 긁어내 재사용하는 등 가난에 시달리면서도 그저 살기 위해 그림을 그리고 또 그렸다.
“나는 어머니가 돌아가신 이후로 오직 살기 위해 그렸다.”
프랑스 최고의 화가, 그는 하나의 ‘현상’이었다
18살이 되던 해 뷔페는 생존을 위해 그렸던 그림들을 가지고 세상에 나왔다. 전쟁은 끝났지만 여전히 시대는 암울하고 전쟁의 상흔을 고스란히 삼키고 있었던 시대였다. 비참하고 황폐한 삶 속에서 인간의 실존에 대해 모두가 상처받던 그 시대, 뷔페의 건조하고 초점도 색채도 없는 공허한 그림은 사람들의 마음을 단숨에 사로잡았다.
피폐한 시대의 자화상, 어디에서도 볼 수 없었던 직선으로 이루어진 신경질적인 스타일은 ‘20세기의 증인’이라는 별명이 붙는다. ‘30세 미만의 살롱’전에서 작품을 선보이고 스무 살에 되던 해는 비평가 상을 받는다. 프랑스 최고의 젊은 화가의 신화는 프랑스 전역을 뒤흔들며 당시 예술계를 주도하던 앤디 워홀, 이브 생 로랑, 프랑수아즈 사강 등의 인정과 지지를 받으며 더욱 유명해진다. 뷔페의 전시가 열리면 그림을 보기 위해 몰려든 사람들이 폭동을 일으켰고 결국 경찰까지 출동했다. 사람들은 이렇게 말했다.
“1950년대의 뷔페는 하나의 ‘현상’이었다.”
인기는 대중 매체를 타고 빠르게 전파되었다. 뉴욕 타임스는 ‘피카소는 이제 구식이고 프랑스 예술계는 뷔페다’라고 기사를 냈고, 프랑스 최고의 미술 잡지에서는 전후 예술가 10인 중 1위를 차지하는 등 뷔페에게 명성과 부를 모두 거머쥐게 하였다.
뷔페는 파리를 떠나 프로방스에 머물며 다양한 색을 사용하며 새로운 표현 기법을 연구하기 시작한다. 프랑스 최고의 화가로 불리는 젊은이에게 물감을 자유롭게 살 수 있던 돈이 드디어 생긴 것이다.
광대, 이것은 두려움이다
28살에 이미 백만장자가 된 뷔페는 자신만의 작업을 할 수 있는 성을 구입하고, 롤스로이스를 끌며 다양한 색의 물감을 그림에 사용한다. 영앤리치의 표본이 된 그의 사진이 한 잡지에 실리자 무서운 속도로 여론이 뒤집힌다. 아니, 아니야. 우리가 사랑한 뷔페는 가난하고 피폐한 사람이어야 해. 지금의 당신은 위선자야.
게다가 시대는 구상 회화보다는 추상 회화를 더욱 가치 있는 것으로 여기고 있었다. 피카소, 몬드리안, 칸딘스키 등의 추상 회화가 등장하며 구상 회화는 시대에 뒤처진 것으로 변색되어 가고 있었다. 이제 모든 것은 뷔페에게 비난의 화살이 되어 돌아왔다.
비난 속에서 뷔페는 광대를 그리기 시작했다. 무미건조한 공허한 눈동자와 신경질적인 직선의 깡마른 인간의 모습은 여전했지만 이전보다 화려한 색감이 그림에 반영되었다. 화려한 의상과 과장된 분장의 광대의 색상은 오히려 더욱 비극적으로 보여, 자신의 모습을 투영한 것처럼 보인다. 여전히 그는 살기 위해 그림을 선택했다.
“광대, 이것은 두려움이다. 그는 그의 얼굴에 그림을 그린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추악함이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다, 아, 슬프구나!”
대중의 외면, 추상화가 아니라는 이유로 비평가, 기자, 미술계 관계자들은 뷔페에게 관심을 주지 않았다. 지적 검열도 지속해서 받아야만 했다. 다른 나라에서 전시를 할 수 있었지만, 프랑스 국립 미술관에서는 전시를 하면 안 되는 등 제약이 따랐다. 그렇지만 그림을 포기할 수는 없었다. 그림은 뷔페에게 유일한 언어이며 던져진 세상의 증오에서 숨 쉴 수 있는 통로였다.
그림을 그릴 수 없다면 차라리 죽음을
노골적인 비난과 공격에도 여전히 뷔페의 그림을 사랑하는 이들은 존재했다. 추상회화로 변화하지 않고 자신만의 회화를 계속해서 그려가며 더 완벽한 그림을 추구하던 뷔페의 인생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 대중의 증오 속에서도 하루 8시간 이상을 매일 그려가나는 그림, 한평생 사랑하던 아내 아나벨과 함께 하는 일상의 반복. 그러나 기어이 한 번 더 불행은 그런 그의 발목을 잡았다.
1997년 70세 찾아온 파킨슨병은 곧 더 이상 그림을 그릴 수 없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림을 그릴 수 없는 것은 숨쉬기 위해 붓질을 하던 뷔페에게 죽음을 의미했다. 마지막 생애의 6개월은 죽음을 준비하는 기간이었다. 매일 죽음을 주제로 한 25점의 해골들의 그림을 강박적으로 그렸다. 마지막 작품을 완성하기 전, 아들을 불러 캠코더로 자신을 찍어달라고 요청했고 떨리는 손으로 마지막 작품에 힘겹게 서명을 했다. 이로써 죽음에 대한 의식이 완성되었다.
1999년 10월 4일, 여느 때와 다름없는 평온한 아침이었다. 아내 아나벨과의 산책을 마치고 식사를 하고 아내에게 입 맞춘 뒤 작업실로 들어와 자신의 서명을 한 검은 비닐봉지를 뒤집어쓰고 스스로 죽음을 맞이한다. 정원의 성모 마리아 상 앞에는 아내를 위한 붉은 장미 한 송이를 올려둔 채.
노년에 아내 아나벨은 뷔페에게 물었다. 왜 사람들에게 해명하지 않느냐고, 추상회화를 그리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비난받는 억울함과 가난을 팔아서 부자가 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뷔페는 웃으면서 “나를 둘러싼 증오는 사람들이 나에게 준 가장 훌륭한 선물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거대한 전쟁 속에서 바라본 인간 존재에 대한 피폐함과 그 안에 도사리는 비극, 어머니를 잃고 세상에 그저 던져진 듯한 절망과 고독, 인간의 이중성 앞에서 받아들여야만 하는 집단의 증오까지 뷔페에게 살아야 할 이유를 주는 예술로 더욱 깊이 들어가게 하는 통로였다.
생을 마감한 그의 모습을 아내가 발견했을 때, 뷔페는 편안한 미소 짓는 모습이었다고 한다. 불안과 고독, 증오 가운데에서 살았지만 자신의 할 일을 비로소 모두 마무리한 자의 미소였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