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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겐 시간이 없고, 무언가를 보려면 시간이 필요하다

조지아 오키프

by 김현비

아무도 꽃만 보지 않는다


“왜 이렇게 꽃을 크게 그리시나요? 사람들이 수군거립니다.”


그녀의 그림 앞에서는 모두가 음란마귀가 되는 마법이 일어난다. 여성의 신체를 표현한 듯한 거대한 꽃 속에 들어있는 색채와 형태는 그녀의 생애 내내 반복적으로 매우 집중해서 구축한 작품 세계였다. 조지아 오키프, 그녀의 작품에 그의 남편이었던 스티글리츠를 포함한 많은 남성 비평가들은 성적 의미를 부여했다.


01.png 조지아 오키프, <빨간 칸나>, 1927년, 캔버스에 오일, 76.5×91.8㎝, 아몬 카터 미국 미술관


그러나 98세의 약 한 세기를 살아오며 자신의 예술에 전념한 그녀는 자신의 그림에 대해 구체적으로나 직접적으로 좀처럼 말하지 않았다. 자신의 그림에 성적인 프로이트적 해설이 붙거나 외설적이라는 평가에도 자신이 찾아낸 꽃 한 송이 속의 본질적, 추상적 형태를 화폭에 옮겼다. 빛의 투과, 잎맥의 흐름, 꽃잎마다 머금은 색채의 미묘한 변화를 보고 또 끈질기게 보았다.


“아무도 꽃을 보지 않아요. 너무 작아서 알아보는 데 시간이 걸리기 때문이죠. 우리에겐 시간이 없고, 무언가를 보려면 시간이 필요해요.”


꽃부터 사막의 뼈까지 작고 미세한 것들을 바라보는 그녀의 시선은 대상의 겉모습에서 일부를 택해 속속들이 파고들어 그것을 더욱 훌륭하고 황홀하게 표현했다. 그녀의 작품 앞에서 아무도 꽃만 보지 않는다. 그녀의 거대한 꽃을 통해 새로운 세계를 본다.


그림1.png


미술 과외를 받는 재능 있는 부농의 딸


조지아 오키프는 1887년 11월 15일 미국의 위스콘신 주에 있는 썬 프레리에서 부농 가정의 7남매 중 둘째로 태어났다. 농사짓는 부모님과 함께 농장의 황금빛 옥수수밭과 평원의 흔들리는 햇살과 노을을 보며 열네 살까지 자랐다.


아버지는 호기심이 많은 사람이었고, 어머니 또한 시골의 농장에서 살지만 아이들 교육만큼은 각별하게 챙겼다. 자녀 모두 고등교육을 받았고 오키프는 그중에서도 미술에 일찍이 재능을 인정받아, 11세 때부터 미술 과외 수업을 받았다. 12살의 오키프는 화가가 되겠다는 결심을 하며 18세가 되던 해 1905년에는 시카고 아트 인스티튜트 대학에 들어가 정식 미술교육을 받게 된다.


대학에는 성공한 명망 높은 교수진들이 많았고 이들로부터 인상주의 화가들이 사용한 빠르게 스케치하고 색칠하는 방법, 흰색의 중요성과 의미 등 색채의 연구 등을 배워나갔다. 어린 시절부터 미술 과외를 할 정도로 재능 있고 가족의 재정적 지원도 넉넉했었지만, 오키프가 대학을 다닐 무렵부터는 가족들의 경제 상황이 좋지 않았다. 화가가 되기보다는 그래픽디자이너나 미술 교사가 되어야겠다고 생각한 오키프는 학업을 그만두고 회사 로고나 광고를 디자인하는 상업 미술가로 활동하다 고향으로 내려와 미술교사로 생계를 이어나갔다.


생계를 유지하며 1912년 여름방학 강좌로 수강한 버지니아 대학교 소묘 수업은 다시 오키프의 삶의 중심을 그림으로 이끌었다. 그녀의 재능을 알아본 비먼트 교수는 미술대학장 다우 교수에게 오키프를 소개해 주었고 다우 교수의 지도를 받으며 다양한 예술관을 정립한다. 기존의 아카데믹의 교육에서 벗어난 두 사람의 지도는 오키프가 자신만의 언어를 이용한 모더니즘 예술을 개척하도록 도왔다.


02.jpeg 조지아 오키프, <화이트 플라워 No.1>, 1932년, 캔버스에 오일, 121.9×101.6㎝, 크리스탈 브리지 미술관


스티글리츠의 뮤즈로, 새로운 예술로


오키프는 훌륭한 두 지도 교수의 영향을 받으며 드로잉한 작품들을 뉴욕에 살고 있는 옛 친구에게 보내고 우연히 그 작품들을 스티글리츠가 보게 된다. 알프레도 스티글리츠는 이미 뉴욕에서 유명한 추상적인 사진을 찍는 사진작가였고 자신이 운영하는 갤러리 ‘화랑 291’을 통해 미국 모더니즘을 지지하는 예술가이자 운영가였다. 피카소, 마티스, 브랑쿠시 등 아방가르드한 예술가들의 발굴하여 미국 관객에게 소개하는 등 모더니즘에 관심이 많던 스티글리츠의 눈에 오키프의 작품만이 들어온 것은 아니었다.


스티글리츠는 오키프를 위해 첫 개인전을 열어주고 전폭적 지지와 재정적 지원을 약속하며 뉴욕으로 이주할 것을 권유했고, 오키프는 그렇게 24살 차이가 나는 스티글리츠와 동거를 시작한다. 스티글리츠는 오키프의 사진을 찍었고 그녀는 자연스럽게 그의 뮤즈가 되었다. 이미 가정이 있던 스티글리츠는 오키프와 동거하기 시작한 지 6년 후 이혼했고, 두 사람은 결혼하여 40년 동안 서로의 인생에 가장 중요한 인물이 된다. 스티글리츠는 매년 오키프의 전시회, 사진전을 열어 적극적으로 그녀를 홍보하고 신비하고 독자전인 이미지를 구축했다.


뉴욕에서 생활하기 시작하며 오키프는 뉴욕 북부에 위치한 스티글리츠의 별장 조지 호수에서 자주 여름을 보내며 새로운 작품을 시작했다. 그림을 유화로 바꾸고 규모를 키웠으며, 호숫가의 정물, 나뭇잎, 꽃 등을 관찰했다. 작은 꽃들을 관찰하기 시작하며 모든 사물은 확대에 의해 새로운 해석과 이미지가 된다는 점을 발견한 오키프는 본격적으로 꽃을 확대하여 그리기 시작했다.


큰 꽃을 그리면 바쁜 뉴요커들이 그것을 보기 위해서 시간을 내어 보러 오고 놀랄 것이라고 생각하며 보잘것없던 작은 꽃은 오키프의 새로운 예술로 인해 삶의 상징으로 다시 태어났다.


03.jpg 조지아 오키프, <여름 날들>, 1936년, 캔버스에 오일, 76.5×91.8㎝, 휘트니 미술관


마침내 적합한 곳을 다시 찾았다


1921년 스티글리츠는 그가 찍은 누드 사진과 오키프의 누드 사진 45장을 전시한다. 프로이트의 성의 미학을 다루는 전시회였기에 오키프의 누드는 그녀의 그림을 평가하는데 두고두고 걸림돌이 되기 시작한다. 스티글리츠는 오키프의 그림이야말로 정신분석학의 프로이트 이론과 함께 가장 미국적인 그림을 그리는 미국인으로 홍보함으로써 그녀의 그림은 성공적으로 판매가 되었다. 그녀의 꽃그림은 여성성의 상징으로만 인식되고 페미니스트들의 상징이 되었다.


“나는 각각의 꽃들이 내게 어떤 존재인가를 그렸고 다른 사람들도 내가 보는 것을 볼 수 있도록 충분히 크게 그렸을 뿐입니다.”


오키프의 말에도 성적인 해석은 이어졌고, 꽃 외의 다른 작품을 창작했음에도 남성성, 여성성의 상징에서 벗어나질 못했다. 1920년 후반으로 갈수록 스티글리츠와의 관계와 뉴욕에서의 생활도 오키프에게 신체적, 정신적으로도 어긋나기 시작한다. 점차 잿빛 색상으로 변하는 색상의 변화가 나타나자, 그녀는 뉴욕과 조지 호수와 스티글리치에서 벗어나 멀리 떠나기 시작한다.


처음으로 여행을 떠나본 뉴멕시코는 자연의 경이로움이 끝없이 펼쳐진 드넓은 자극제였다. 잿빛이었던 그림은 자연스레 뉴멕시코의 사막에서 보는 갈색과 황토색 계열로 바뀌게 된다. 사막에서 마주한 동물의 뼈와 두개골, 협곡과 거대한 산과 바위, 광활한 하늘은 거대한 꽃을 그렸을 때의 기쁨을 되살아나게 했다. 끝없는 사막 한가운데서 발견한 삶과 생명의 지속성과 영속성에 매료되어 스티글리츠가 사망한 1946년까지 뉴욕과 미국의 서부를 오가며 고독 속에서 그림을 그렸다.


“마침내 적합한 곳을 다시 찾았다는 느낌이 듭니다. 온전히 나 자신이 된 이 느낌이 좋습니다.”


04.jpg 조지아 오키프, <폭풍우>, 1922년, 종이에 파스텔, 46.4×61.9㎝,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난 내가 가장 ‘위대한 화가’ 중 한 명이라 생각한다


남편의 사망 후, 오키프는 1949년 뉴멕시코의 집에 영구 정착한다. 60이 넘은 나이에도 해외여행을 다니며 세계 일주를 하기도 하며 살아오면서 느끼지 못했던 새로운 영감을 느끼며 작품에 담아낸다. 추상적인 풍경화, 초현실주의적인 그녀의 새로운 도전은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14명의 미국 거장들’에 유일한 여성화가로 선정된다.


1971년 시력이 급격히 약화되어 사물의 윤곽만 가늠할 수 있게 되었을 때, 해밀턴라는 도예가를 만나게 된다. 팔순의 나이였지만 해밀턴의 충고와 격려를 통해 도자기라는 새로운 도전을 했고, 해밀턴은 오키프가 사망할 때까지 곁에 있어 주었다.


100살까지 살겠다는 목표를 거의 달성한 98세가 되던 1986년 오키프는 눈을 감았다. 그녀의 유언에 따라 장례식은 진행되지 않았고, 유골은 마침내 자신이 발견한 온전히 나 자신이 되는 그곳, 뉴멕시코의 풍경 위로 뿌려졌다.


죽음을 생각하면 아름다운 이 땅을 더 이상 볼 수 없다는 것만이 아쉽다던 그녀의 말처럼 예술은 작은 것에 시간을 들여 위대한 것과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과정이었다. 작은 꽃잎 하나에서 우주의 신비를, 말라버린 뼈에서 생명의 경이로움을, 사막의 돌멩이 하나에서 시간의 흐름을 읽어냈다. 그녀는 세상의 소음 속에서도 자연의 속삭임에 귀 기울일 줄 알았다.


스타 사진작가의 뮤즈, 프로이트적 해석으로 인한 여성성의 상징, 미국 역사상 가장 뛰어난 여류 화가 등. 다양한 수식어가 붙었지만 삶의 작은 것을 바라보며 세상의 진정한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조지아 오키프는 여성 화가이기 전에 바라보는 화가였다.


“남자들은 나를 ‘가장 뛰어난 여류 화가’라고 깎아내렸지만, 난 내가 가장 ‘위대한 화가’ 중 한 명이라 생각한다.”


05.jpg 조지아 오키프, <시리즈1 No.8>, 1918년, 캔버스에 오일, 50.8×40.6㎝, 렌바흐하우스 시립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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