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남준
인생에는 되감기 버튼이 없다
2022년, 오랫동안 꺼져 있던 국립현대미술관의 대표 소장품 백남준의 ‘다다익선’의 스위치가 다시 켜졌다. 노후화로 인한 화재 위험 등으로 중지되었던 1,003대의 모니터의 재가동을 보기 위해 많은 이들이 제막식을 방문했다. 재가동된 지 5분 만에 모니터 한 대가 꺼지고 아예 복구가 불가능한 모니터도 많았지만, 1988년 9월 15일에 선보인 백남준의 ‘다다익선’의 대규모 영상작품을 공개했을 때 당시의 놀라움을 재현해냈다.
다다익선은 수천 개의 비디오 메시지가 수신되어 관람객에게 발신된다. 그중 대부분은 낭비되고 일부만 기억되고 재구성될 것이니 수신되는 비디오가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는 제목은 백남준의 비디오 철학을 엿보게 된다.
88서울올림픽을 앞두고 건립되고 있는 국립현대미술관을 찾은 것은 백남준이 한국을 떠난 지 30여 년만인 1984년이었다. 피난으로 떠났던 고국의 땅을 밟기까지 일본, 독일, 뉴욕 등 다른 나라를 떠돌아다녔다. 완성된 미술관의 텅 빈 램프코어에 대규모 영상설치를 구상하며 훗날 모니터가 고장 났을 때 교체해도 좋으며, 그에 대한 전권을 테크니션에게 일임한다는 각서까지 썼다.
디지털이라 해도 영원한 것은 없다. 테세우스의 배처럼 이것이 누구의 배라고 할 수 있을지 과연 누구의 예술이라고 할 수 있을지 변해가는 모호한 불확실성 속에서 1,003대의 모니터는 일부는 영원히 꺼진 채, 일부는 여전히 재생되는 채로 수많은 비디오를 수신한다.
“인생에는 되감기 버튼이 없다.”라는 백남준의 말처럼 모든 것이 불확실한 인생에서 없으면 없어지는 대로 고장이 나면 고장 나는 대로 나아가라는 철학이 담긴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모니터들은 언젠가 멈춰버릴 미래를 향해 나아간다. 그의 예술 또한 뒤돌아보지 않고 미래로, 새로운 것으로 계속해서 나아갔다.
[그림 1] 백남준, 다다익선, 1988년, 영상 설치; 4채널 영상, 컬러, 사운드; 모니터 1,003대, 철 구조물, 1,850×1,100×1,100㎝, 국립현대미술관 과천
재벌집 막내 아들
백남준은 1932년 7월 20일 서울 종로구 서린동에서 3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아버지 백낙승은 한국 최초의 재벌이라고 불릴 정도의 사업가로, 당시 국내에는 딱 두 대밖에 없다는 캐딜락 자동차 중 한 대가 남준의 집안 소유였다. 아버지의 사업은 계속 번창했고, 재벌집 막내 아들로 태어난 남준은 아무런 거리낌 없이 훗날 홍콩과 일본, 독일로 유학을 갈 수 있었다.
재벌집 도련님은 대지 3,000평에 달하는 대저택의 큰 마당에서 뛰놀고 매년 시월상달에 열린 굿판을 구경하며 자랐다. 태어나기도 전부터 좋은 것만 먹고 보고 자랐지만 남준은 병약했다. 집에 7대의 승용차와 정비사 두 명이 상주해 있어 등교는 승용차로 했으며, 책이 귀한 시절 유명 출판사의 그림책과 누나가 읽던 영화잡지를 즐겨보며 자랐다. 큰누나의 피아노 레슨 시간에는 주위를 맴돌며 어깨너머로 피아노를 배우고 극소수 특수 계층만이 다닐 수 있는 유치원과 국민학교를 졸업했다.
열네 살, 남준의 음악적 재능을 알아본 스승에게서 인생 ‘제1의 혁명’인 쇤베르크를 배웠다. 불협화음을 사용한 난해한 곡을 작곡한 음악가, 음을 해체하고 예술의 최고의 기능이 유희에 있다는 것이 쇤베르크의 음악에서 발견한 남준은 예술적 출발점이 되었다.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남준과 부모님은 일본으로 피란을 가 정착한다. 일본 도쿄대학에 진학하고 쇤베르크에 대한 졸업논문을 작성한다.
어린 시절부터 해왔던 음악적 훈련과 쇤베르크의 극단적 불협화음을 익힌 것은 비디오아트 탄생에 결정적 기여를 했다. 시간에 구애받지 않는 회화나 조각과 달리 비디오아트는 시간의 흐름을 분배하는 것이 중요하다. 당대 최고의 피아니스트들에게 배운 음악교육은 서양으로 떠나기 전 이미 남준의 예술의 바탕이 되어 있었다.
케이지의 세례를 받았다
1956년 대학을 졸업한 남준은 곧바로 독일로 유학을 떠난다. 지도 교수였던 포르트너 교수는 남준의 전위음악에 대한 관심을 알아보고 전위음악 작곡가를 다수 포진하고 있는 서독일 라디오 방송 전자 스튜디오에 추천서를 써준다. 추천서에는 이렇게 쓰여있었다.
“백남준과 같은 아주 특이한 현상은 제가 맡아 가르칠 수 없습니다.”
독일의 다름슈타트라는 지역은 매년 여름 휴가철이며 젊은 현대 작곡가들을 위해 ‘새로운 음악을 위한 국제적인 휴가코스’가 열렸다. 이곳에서 남준은 인생 ‘제2의 혁명’인 존 케이지를 만나게 된다. 음의 한계를 없애고 음악가가 만들지 않은 우연한 소리도 유효한 것으로 생각하며 음의 해방을 강조한 존 케이지의 강의를 들으며 남준은 훗날 “케이지의 세례를 받았다”라고 말했다.
1959년 ‘존 케이지에게 바치는 경의’에서 남준은 피아노에 계란을 던지고 피아노를 칼로 자르고 부수는 등 기괴한 공연을 선보인다. 소음, 침묵까지도 음악으로 될 수 있다던 존 케이지의 사상에 기초해 기존의 전통적인 사상을 벗어나 음악 자체를 제거해버렸다. 이때부터 남준은 ‘문화 테러리스트’라는 수식어를 얻었다.
“황색 재앙, 그것이 바로 나다.”
스스로를 칭기즈칸(유럽에서는 황색 재앙이라고 불렸다)의 별명에 빗대어 문화 테러리스트를 자처하는 과격한 퍼포먼스를 선보이는 행위 음악은 점차 전자 TV로 넘어가고 있었다. 부유했던 집안은 점점 어려워지고 있었고 빨리 성공해야 한다는 부담감이 커지면서 예술적 변용을 고안했다. 그렇지만 존 케이지에게서 얻은 ‘모든 소음도 음악이 될 수 있다’는 불확정성은 남준의 예술관의 기반으로 여전히 남아 있었다.
비디오아트의 시작
1963년 파르나스 갤러리에서 열린 남준의 첫 비디오아트 ‘음악의 전시-전자 텔레비전’ 전시는 그야말로 아연실색이었다. 13대의 텔레비전을 구입하여 변조한 끝에 비디오아트를 최초로 선보인 전시의 입구에는 도살한 황소의 머리가 천장에 걸려있었고 기상관측용 기구를 현관 통로에 설치되어 있었다. 전시장에 들어가려면 황소 사체에서 나는 고약한 냄새를 지나 거대한 기구를 피해 기어들어가야만 했다. 무엇보다 전시된 피아노를 그의 친구 요셉 보이스가 망치로 부숴버려 텔레비전은 아무런 반응도 얻지 못하고 끝이 났다. 소리를 청각이 아닌 시각예술로 변환시키고자 한 첫 번째 시도였다.
1964년 뉴욕으로 이주한 남준은 동료 샬롯 무어먼과 누드 상태의 첼로 연주를 시도하다가 경찰에 체포된다. 예술 현장에서 누드를 처벌할 수 없다는 법 개정이 이루어지고, 두 사람은 계속해서 미디어 테크놀로지와 퍼포먼스를 결합한 많은 활동을 전개했다.
1974년부터 비디오아트의 설치 작업을 다양하게 진행하며 ‘TV 부처’ 등을 선보이다 1982년 휘트니 미술관에서 개최된 ‘백남준 회고전’을 계기로 현대 사회의 새로운 생명력을 추구한다는 평판을 받으며 예술 세계를 널리 알린다.
미국의 네트워크 방송국과 협력하여 자신의 비디오아트를 방송했고, 세계적인 아티스트들의 퍼포먼스를 뉴욕 WNET 방송국과 파리 퐁피두센터를 연결한 실시간 위성 생중계로 방송하여 전 세계적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백남준이라는 등대
위성 생중계 쇼는 전 세계에서 2,500만 명이 시청했다. 이후 세계적인 스타덤에 오른 남준은 ‘굿바이 미스터 오웰’을 시작으로 ‘바이 바이 키플링’, ‘세계와 손잡고’까지 총 세 번에 걸쳐 위성 3부작 시리즈를 선보였다. 예술가란 미래를 사유할 수 있어야 한다고 남준은 생각했다. 소통의 기획자로서 예술의 새로운 가능성을 모색한 그는 공간과 시간의 제약을 뛰어넘어 전 세계인의 소통이 가능하다는 것을 위성아트로 보여주었다.
88올림픽을 맞이해 기획된 ‘세계와 손잡고’에서는 세계의 유명한 뮤지션들과 소련의 음악가까지 협력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냉전 체제가 무너지기도 전에 이념을 초월하는 공연을 펼칠 수 있었던 것은 남준이 원하던 예술의 새로운 가능성을 증명해 보였다.
어린 시절부터 병약했기에, 한국과 미국을 오가던 남준은 한국의 추운 날씨를 견디지 못하고 심하게 앓다 뇌졸중으로 쓰러진다. 기나긴 10년간의 투병 생활의 시작이었다. 신체 한쪽이 마비되고 언어 기능을 상실했지만 재활 훈련을 통해 약간의 거동과 언어 활동을 하며 휠체어에 의지했다. 계속해서 새로운 작품 활동을 이어나갔고 마지막 마이애미에서 아리랑을 피아노로 연주하며 휴식을 취하다 눈을 감았다.
과거와 현재에 안주하는 것이 아니라 미래로 나아가려는 여정은 눈을 감기 전까지 이어졌다. 기괴했던 전위예술부터 음악, 비디오아트, 로봇, 위성아트까지 자신이 창조한 예술을 결코 되감기 하지 않았다. 미래를 사유하는 예술, 그의 미래지향적인 예술은 되감기 없는 인생을 나아갈 수 있는 원동력이 되고 있다.
“우리 한국인 앞에 놓인 문명이라는 바다에는 백남준이라는 등대가 있으므로 능히 항해할 수 있다.” -이어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