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
시스티나 천장을 보라
바티칸에 위치한 미켈란젤로의 피에타와 시스티나 성당은 유럽의 인기 관광지 중 하나다. 그 웅장한 시스티나 성당의 천장화와 아름다운 성모 마리아의 조각을 보기 위해 전 세계에서 많은 이들이 몰려들지만, 안타깝게도 시스티나 성당은 촬영 금지이며 피에타 조각상은 방탄유리에 들어가 있어 먼발치에서나 볼 수 있다.
20대 초반의 미켈란젤로가 처음 세상에 내놓았을 때부터 피에타에 대한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당시 성모 마리아가 너무 젊어 보인다는 비난과 센세이션을 불러일으켰을 뿐 아니라, 1972년에 자신이 부활 예수라고 외치는 남자가 망치로 때려 부수는 사건까지 다사다난한 일들을 겪으면서 현재는 방탄유리 전시관 안에 들어가 있다.
의외의 곳에서 피에타와 비슷한 미켈란젤로의 조각을 방탄유리 없이 만나볼 수 있는데, 벨기에 브뤼헤 성모 성당 내부에 조용하게 배치되어 있는 성모자상이다. 유일하게 미켈란젤로 살아생전 해외로 수출한 작품으로 아기 예수가 어머니의 다리에 몸의 균형을 온전히 지탱하고 있다. 마리아의 손짓과 아이를 지탱하는 다리의 자세와 근육까지 인체 구조의 해부학적 지식을 바탕으로 하고 있어 매우 자연스럽고 우아하다. 언제든지 살아 움직일 것만 같다.
실제로 미켈란젤로의 삶은 자신과의 끊임없는 투쟁이었다. 사람들은 타고난 천재라고 불렀으나 그는 타고난 재능을 부단히 연마했다. 89세까지 망치를 놓지 않았고, 자신은 아직도 배우고 있는 중이라고 했던 그의 삶에서 천재란 그저 주어진 재능을 손쉽게 쓰는 사람이 아니라 고뇌와 노력으로 만들어지는 사람이었다. 괴테는 이렇게 말했다.
“한 인간이 무엇을 이룰 수 있는지 알고 싶으면, 시스티나 성당을 보라.”
대리석 가루를 먹고 자라난 아이
미켈란젤로는 1473년 3월 6일, 몰락한 귀족의 아버지 로도비토와 어머니 프란체스카 사이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태어나자마자 어머니가 돌아가셨고 유모의 손에 자라게 되는데, 유모의 아버지와 남편 모두 석공이었다. 대리석이 많이 나기로 유명한 토스카나 지방, 마을 석공들 사이에서 대리석 가루와 젖을 먹으며 어릴 때부터 흰 대리석과 조각을 만지며 자랐다.
내성적이고 예민한 아이였던 미켈란젤로는 몰락한 가문을 일으켜 세워주리라는 아버지의 기대를 받으며 귀족 학교에 들어갔지만, 그림 그리는 것 외에는 학업에 큰 흥미를 보이지 않았다. 아버지는 가문의 이름을 더럽힌다고 종종 손찌검을 했지만, 결국 미켈란젤로의 뜻을 굽히지 못해 백기를 들었다.
13살 되자 도메니코 기를란다요의 제자가 되어 견습생으로 1년간 일을 배운다. 고작 1년이었지만, 미켈란젤로는 드로잉, 프레스코 기법 등을 배운다. 이는 추후 시스티나 성당의 천장화를 그리는 밑거름이 된다.
14살, 메디치가 소유인 피렌체의 성 마르코 수도원으로 옮겨 유명한 조각가였던 조반니 디 베르톨도가 지도하는 예술 학교에 입학하여 조각에 몰두한다. 걸음마를 떼기도 전에 대리석 가루부터 먹으며 자랐던 미켈란젤로였다. 타고난 재능으로 연구한 작품은 이미 뛰어났다. 피렌초의 군주였던 로렌초의 눈에 우연히 띄게 된 미켈란젤로는 메디치 궁전에 지내며 직접적인 후원을 받았다. 로렌초가 사망하기 전까지 안정적인 지원을 받으며 빠르게 재능을 성장시켰다.
피렌체의 미켈란젤로, 내가 만들었다
당시에도 옛것, 유물을 수집하는 사람들이 더 많았기에 2천 년이 넘는 평범한 조각상이 당대에 제작된 신상보다 더욱 값어치가 나갔다. 미켈란젤로는 그 점을 이용해 로마 양식으로 ‘잠자는 큐피드’ 상을 만들었고 위조 미술품 브로커를 통해 어느 추기경에게 고가로 팔았다. 감쪽같이 속았던 추기경은 나중에 가짜라는 것을 알고 나서 돈을 돌려 달라며 펄펄 뛰었다. 그 솜씨를 보고 감명받은 리아리오 추기경은 미켈란젤로를 로마로 초대하여 4년 동안 머무르게 했다.
이 무렵, ‘피에타’ 작품 주문이 들어왔고, 아름다운 형태가 신에게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고 믿은 미켈란젤로의 믿음에 따라 젊고 우아한 기교가 돋보이는 ‘피에타’를 1년 만에 완성시킨다. 생전에 만든 가장 거대한 조각 작품이자, 직접 자신의 이름을 새긴 유일한 작품이다.
"MICHAELA[N]GELUS BONAROTUS FLORENTIN[US] FACIEBA[T], 피렌체 출신의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가 만들었다.”
1501년 피렌체로 다시 돌아와 아버지와 조카들을 돌보며, 피렌체 공화국으로부터 ‘다윗’ 대형 입상을 주문받는다. 다른 조각가에게 대형 대리석 덩어리로 같은 주제 ‘다윗’을 의뢰했지만 무슨 이유인지 계약은 곧 취소되고, 또 다른 조각가에게 넘어갔지만 그 또한 초벌 작업만 했을 뿐 완성시키지 못했다. 창고에 방치된 대리석은 쓸모없이 자리만 차지하다 미켈란젤로의 손에 들어왔다. 마침내 거대한 돌덩어리는 미켈란젤로의 손에서 위대한 작품으로 숨결을 얻었다. 사인은 없지만 다윗상에서 느껴지는 야망과 자신감, 품위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나 피렌체의 미켈란젤로, 내가 만들었다.
신이여, 저를 도우소서
다윗이 완성되자 미켈란젤로의 명성은 이루 말할 수 없이 높았다. 고작 그의 나이 26세 이룬 업적이었다. 대리석 가루를 마시고 만지고 자라난 천재는 대리석으로 찬란한 명예를 얻었다. 회화는 “게으름뱅이들에게나 어울린다”라고 했을 정도로 조각을 사랑한 미켈란젤로에게 뜻밖의 시련이 닥친다.
교황 율리우스 2세에게서 시스티나 예배당 천장에 프레스코를 그리라는 명령을 청천벽력같은 주문을 받고 1512년까지 1천 제곱미터나 되는 공간에 3백 명이 넘는 인물을 그려야 했다.
“이건 정말 내 일이 아니다. 시간만 낭비할 뿐 모든 것이 무의미하다. 신께서 날 도우시길.”
이미 율리우스 2세와는 여러 차례 다툼이 있었다. 건축 계획을 세우다가 취소해버린 율리우스 2세에게 분노하여 피렌체를 떠났던 적도 있었고, 까탈스럽고 화가 많은 미켈란젤로와 화해하기 위해 여러 번 서신과 사람을 보내는 등 여러 번의 갈등을 겪었다. 이를 이용하여 미켈란젤로를 시기하던 다른 경쟁자들은 교묘하게 율리우스 2세를 이용해서 천장화를 그리게 했다. 미켈란젤로가 거절하면 다시 갈등이 생기고, 승낙하면 당시 최고 인기 스타였던 라파엘로를 이기지 못할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울며 겨자 먹기로 시작한 천장화 작업은 쉽지 않았다. 천장화를 그리기 위해 불편한 자세로 그림을 그려 몸은 뒤틀렸고, 자주 물감을 뒤집어썼다. 조각상에 물감을 칠한 것 같은 기법을 찾아내기까지 시행착오로 약 일년의 시간이 걸렸다. 작업이 느리게 진행되자 교황은 언제 작업이 끝나냐고 재촉했다.
“제가 끝낼 수 있을 때 끝납니다.”
모든 것을 내팽개치고 도망가고 싶은 그가 참아낸 고통과 인내한 시간, 그리고 노력은 혁신적인 성공을 거두었다. 고뇌하던 시련의 시간은 찬란한 영광으로 되돌아왔다.
나의 유일한 재료는 불꽃과 재이다
미켈란젤로는 다시 조각으로 돌아와 작업하다 중단된 율리우스 2세의 무덤 작업에 착수했다. 그러나 교황은 사망하고 또 다른 교황이 선출되며 다른 설계가 나왔고 계속해서 변화되는 상황에 미완성 작품만을 남겨두게 되었다. 이어서 메디치가의 가족무덤, 라우렌치아나 도서관 건립 작업도 이어갔으나 끝내 완성하지 못하자, 피렌체를 떠나 로마로 향한다.
‘최후의 심판’을 완성하고 교황 바오로 3세의 의뢰에 따라 여러 건축 작업을 하며 노년의 나이가 된 미켈란젤로는 다시 피에타에 집중한다. 신의 사랑과 은총을 받는 일에 집중하며 20대 시절에 완성했던 우아하고 아름다운 성모가 아닌, 고통과 절망으로 쓰러지고 있는 그리스도에 집중했다.
1564년 뇌졸중으로 쓰러진 노장의 나이는 89세, 침대에 눕기를 거부하며 죽음을 맞이하는 날까지도 작품에 열중했다. 관 속에 누워있는 미켈란젤로의 몸은 마치 잠을 자는 듯 흐트러짐 하나 없이 당장이라도 일을 하러 갈 듯한 모습이었다.
미완성으로 남겨진 작품 또한 끊임없이 생성되는 창조의 과정이었음을 보여준다. 창조는 길고 긴 반복의 결과이며 끊임없이 노력하는 이가, 때론 신의 도움을 빌어가며 고뇌하는 과정을 이겨내는 것이야말로 ‘천재’라는 것을 보여준 미켈란젤로는 가장 위대한 예술가라는 칭호를 받기에 적합하다.
“나의 유일한 재료는 불꽃과 재이며, 나는 다른 이들에게 죽음을 가져오는 것 속에서 생명을 찾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