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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깊숙하게 얄팍한 사람이다

앤디 워홀

by 김현비

죽어보니, 아무것도 없었다


“난 앤디 워홀을 쏴버렸어요.”


1996년 개봉한 메리 해론 감독의 영화 '아이 샷 앤디 워홀(I Shot Andy Warhol)'은 이 충격적인 고백으로 시작한다. 영화는 경찰서에서 담담하게 자신의 범행을 인정하는 발레리 솔라나스(릴리 테일러 분)의 얼굴을 클로즈업으로 보여준다.


1968년 6월 3일 오후, 맨해튼 유니언 스퀘어의 ‘팩토리’, 솔라나스는 검은 트렌치코트 안에 총을 숨긴 채 엘리베이터로 워홀의 스튜디오에 들어섰다. 그녀는 워홀에게 걸어가 "당신은 내 인생을 통제할 수 없어요"라고 말한 뒤 연속으로 세 발의 총을 발사했다. 한 발은 빗나갔지만, 두 발은 워홀의 가슴과 복부를 관통했다. 5시간 동안의 수술 중 워홀의 심장은 멈췄고, 임상적 죽음을 경험했다가 기적적으로 되살아났다.


"나는 죽었다가 돌아왔어요. 죽어보니 정말 아무것도 없더군요."


총격 사건을 기점으로 워홀의 예술 세계는 확연히 달라졌다. 퇴원 후 그는 평생 코르셋을 착용해야 했고, 총상 흉터가 있는 몸을 타인에게 보이기를 극도로 꺼렸다. 작품은 더욱 상업적이고 정치적으로 덜 도발적이 되었다. 겉으로는 단순해진 작품 속에, 워홀은 죽음과 명성, 소비문화와 정체성에 대한 더욱 복잡한 사유를 담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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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jpg 앤디 워홀, <세 개의 엘비스>, 1963년, 캔버스에 실크스크린, 208.92×300.99cm, 개인소장


아메리칸 드림의 화신


앤디 워홀의 본명은 앤드류 워홀라로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징집을 피해 이민 온 광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출생증명서에 의하면 1930년에 펜실베니아에서 태어났지만, 그는 출생증명서가 잘못되었다고 주장하며 정확한 출생 연도를 자꾸만 번복하고 숨겼다. 여전히 그의 정확한 출생 연도는 알기 어렵다.


앤디는 탄광마을에서 자라면서 가난하고 병약했던 유년기에 신경쇠약으로 몇 달씩 병석에서 보냈다. 그때부터 드로잉을 시작하며 할리우드의 화려한 이름에 매혹되기 시작한다. 부와 명성, 인기를 누리는 영화 속 할리우드 배우들의 삶과 세계를 동경하며 그들을 도피처로 삼았다.


1945년 가을 앤디는 카네기 인스티튜트에 입학했다. 회화와 디자인을 전공하며 상업 예술을 공부했다. 조용하고 말 없는 깡마른 소년은 사람들과의 접촉을 거의 피하며 자신만의 도피처와 세계에만 몰두했다. 어릴 때부터 동일시해왔던 할리우드의 화려함,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고 만지며.


졸업 후 드디어 뉴욕으로 진출했다. 아메리칸 드림은 현실이 되었다. 상업 디자이너로 다양한 방면에서 활동하며 잡지 보그, 컬럼비아 레코드, 보석상 티파니와도 일했다. 상업 예술가로서 명예로운 ‘아트디렉터 클럽’ 상을 수상하는 등 최고의 상업미술가로 성장했다. 가난한 노동계층의 이민자 2세, 광부의 아들 뉴욕에서의 성공 스토리는 아메리칸 드림의 화신이 되었다.


02.jpg 앤디 워홀, <마릴린 먼로>, 1967년, 캔버스에 실크스크린, 91.5×91.5cm, 모마 미술관


상업성을 기초로 한 팝 예술가의 탄생


광고의 화려함 속에서 성공적으로 성장했음에도, 앤디에게는 또 다른 목표가 있었다. 상업미술에서 성공한 만큼 순수미술에서도 성공을 원했다. 자신의 작품이 스스로에게 기념비가 되고 소비재의 상품 가치를 초월하는 ‘순수’예술가로 인정받길 원했다.


앤디는 방수지에 연필로 도안을 하고 잉크로 윤곽선을 따라 그린 후 마르기 전에 종이에 찍어내는 직접 복사 기법을 습득했다. 손으로 직접 찍어냈기에 어떤 부분은 번져있고, 선이 끊겨있거나 진하거나 옅거나 하는 등 원시적인 기법의 독특하고도 어설픈 효과를 내었다. 찍어낸 작품에 핑크색이나 밝은 오렌지색과 같은 색을 칠했고 원본 드로잉을 복수 생산함으로써 ‘원본’이라는 용어의 가치를 떨어뜨렸다.


1962년 로스앤젤레스에서 캠벨수프 깡통 그림을 처음 전시하고, 할리우드의 스타를 주제로 실크스크린을 찍는 등 활발한 활동을 하면서 그가 열망하던 순수미술계에서 독특한 화가로 자리 잡게 되었다. 반복적인 이미지를 통해 1960년대 미국 사회에 나타난 대량 소비를 반영하고, '마릴린 디프토치', '엘비스', '코카콜라 병', '일 달러 지폐' 등의 작품을 발표했다.


특히 마릴린 먼로가 자살한 직후 제작된 시리즈는 명성과 죽음, 아름다움과 파괴, 이미지의 소비에 대한 복잡한 명상이었다. 매스미디어에서 가져온 먼로의 이미지는 실크스크린 기법을 통해 반복, 변형되었고, 이 과정에서 원본 이미지의 '아우라'는 소멸되었다.


“나는 미국을 숭배한다. 내 작품은 미국에 관한 어떠한 언급이다. 내가 그리는 이미지는 오늘날 미국의 기초가 되는 비인간적인 생산품과 요란한 유물론적 사물을 형상화시킨 것들이다. 이것은 매매될 수 있는 모든 것을 반영하고 있고, 또 우리가 양식으로 삼고 있는 일시적이고 실용적인 것의 상징이다.”


미국의 자본주의의 본성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비개성적 이미지를 위해 같은 그림을 반복해서 찍어내는 실크스크린 기법은 기존 미술 질서에 대한 도전이자, 전반적 가치 하락이었다.


03.jpg 앤디 워홀, <캠벨 스프>, 1968년, 종이에 실크스크린, 91.8×61.3cm, 오스트레일리아 국립 미술관


미래에는 모두가 15분 동안 유명해질 것


1963년, 워홀은 뉴욕 맨해튼 이스트 47번가에 자신의 스튜디오 '팩토리(Factory)'를 설립했다. 이름 그대로 이곳은 예술 작품을 생산하는 공장이었다. 스튜디오 내부는 은색 호일과 깨진 거울로 장식되어 반짝이는 미래적인 공간을 연출했다. 팩토리는 단순한 작업실을 넘어 뉴욕 언더그라운드 문화의 중심지가 되었다.


팩토리의 문은 항상 개방되어 있었으며 누구라도 원하기만 하면 그를 만날 수 있었다. 워홀의 작업실 생활은 이렇게 모여든 인원을 이끌고 3개 이상의 파티에 참석하곤 하였다. 어린 시절부터 동일시했던 할리우드의 스타의 인기와 명성을 적극적으로 반영하면서도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수동적인 태도를 유지했다.


은빛 가발, 선글라스, 가죽 재킷을 입은 그의 모습은 하나의 아이콘이 되었고, 그의 "음... 그렇죠"라는 무표정한 대답은 미디어에서 자주 인용되었다. 매 인터뷰마다 다른 대답을 했고, 자신의 배경이 노출되는 것을 원하지 않아 수수께끼 같은 신비한 이미지를 만들어냈다. 대중 앞에 노출되면서도 동시에 진실은 은폐시켜 자신을 신화화하고 스타의 지위로 이끌었다.


“미래엔 누구나 15분 동안은 유명해질 것이다.”


총격 사건 이후, 앤디의 팩토리는 점차 'Andy Warhol Enterprises, Inc.'라는 이름의 회사가 되었다. 초상화, 상업 일러스트레이션, 영화 제작, 출판 등 다양한 분야에서 수익을 올렸다. 특히 1969년에 창간한 잡지 '인터뷰(Interview)'는 큰 성공을 거두었다. 이 잡지는 유명인 인터뷰와 팝 문화 기사를 담아 출판되었으며, 워홀의 '15분의 명성' 개념을 구현한 플랫폼이 되었다.


04.jpg 앤디 워홀, <자화상>, 1978년, 캔버스에 아크릴과 실크스크린, 106×106cm, 타도이스 로팍 갤러리


나는 깊숙하게 얄팍한 사람이다


앤디는 점점 더 '셀러브리티' 문화의 중심인물이 되었다. 그는 뉴욕의 스튜디오 54와 같은 유명 나이트클럽에 자주 출현했고, 영화배우, 록스타, 패션 디자이너, 정치인들과 교류했다. 장 미셸 바스키아, 키스 해링 같은 젊은 예술가들과의 협업을 통해 새로운 작업을 시도하기도 했다.


1986년, 워홀은 그의 마지막 자화상 시리즈를 제작했다. 마치 해골처럼 표현된 검은 배경에 그려진 그의 은빛 머리카락과 창백한 얼굴은 마치 죽음의 예감을 담고 있는 듯했다. 워홀은 항상 죽음에 대한 공포를 가지고 있었고, 이 마지막 자화상은 그 불안을 강렬하게 표현했다. 그리고 1년 후인 1987년 2월 22일, 간단한 담낭 수술을 받은 후 합병증으로 인해 갑작스럽게 사망했다.


"나는 깊숙하게 얄팍한 사람이다."


화려하게 반복되는 상업적인 사물을 그린 팝아트는 이미지를 강조하지만 결국 이미지는 반복에 의해 연소되고 텅 비도록 만든다. 기계적인 반복은 그저 사회 안에서의 소모품이었을 뿐이라는 현대사회의 단면을 보여준다.


표면적으로 얄팍해 보이는 그의 작품과 태도는 실제로는 현대 소비사회의 깊은 구조와 작동 원리를 드러내는 통찰력을 담고 있었다. ‘깊숙하게 얄팍한’ 그의 예술은 우리 모두가 15분의 명성을 좇는 현대 사회의 가장 정직한 초상화인지도 모른다.


05.jpg 앤디 워홀, <2피트 꽃>, 1964년, 캔버스에 합성 폴리머 물감과 실크스크린 잉크, 60.9×60.9cm, 개인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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