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귀스트 르누아르
그림을 그리지 않고 보낸 날은 단 하루도 없다
광고 회사 카피라이터 출신, 드라마 ‘대행사’의 주인공의 실제 모델인 최인아는 한 인터뷰에서 인정받는 사람들의 특징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했다.
“재능을 꽃피우는 것은 태도입니다.”
성실하고 일관된 태도로 자신의 일을 하는 사람은 누구든 알아보고 인정받는다는 이야기는 어쩌면 너무나도 당연한 말이지만, 이를 꾸준히 이행하는 사람은 흔치 않다.
인상주의가 등장하던 파리의 그 시절, 많은 이들이 갖은 비난 속에서도 자신만의 화풍을 만들어냈지만 일관된 성실함의 태도가 돋보이는 한 사람이 있다. 오귀스트 르누아르. 가난한 환경에서 그림을 그리고자 열심히 일했으며, 번번이 실패하는 모든 전시에서도 계속해서 그림을 그렸고 그의 성실한 태도에 많은 친구들과 후원자들이 도움을 주었다.
류머티즘 관절염으로 손가락이 휘어지고 안면 마비가 와 극심한 우울증을 겪었을 때도 그의 태도는 변하지 않았다.
“나는 물 위에 내던져진 코르크 조각처럼 물살에 떠밀려 다녔다. 그곳은 어디든 나는 내 그림이 이끄는 대로 따랐다. 내가 그림을 그리지 않고 보낸 날은 단 하루도 없었던 것 같다.”
성실한 생계유지형 화가
피에르 오귀스트 르누아르는 1841년 2월 25일 프랑스의 리모주에서 7남매 중 여섯째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재단사, 어머니는 재봉사로 가난한 중산계급의 가족은 도시에서 더 잘 살아 보려는 희망으로 파리로 루브르 박물관 옆으로 이사했다.
비록 집안 사정은 넉넉지 않았지만 소년 르누아르와 형제들은 그림 그리기와 노래 부르기를 좋아했다. 아버지는 아들을 독려하며 그림으로 밥벌이를 할 수 있도록 재주를 키워 주기로 한다. 아버지는 르누아르가 13살이 되자 한 도자기 화공에게 견습공으로 맡겼다. 르누아르는 다양한 회화와 드로잉을 도제 일을 하며 익혔고, 점심시간을 아껴 루브르 박물관에서 고대 조각들을 모사했다.
그러나 그 생활도 잠시였다. 산업혁명의 여파로 기계가 모든 그림을 찍어내는 기술이 도입되자 르누아르를 포함한 많은 도자기 화공들은 일자리를 잃었다. 르누아르는 숙녀들의 부채에 그림을 그려주고 인테리어 장식, 해외 선교사들이 사용하는 깃발에 그림을 그리는 등 그림으로 생계를 꾸준히 유지하며 화가가 되고자 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밟았던 정통 코스에 입문한다.
루브르에서 그림 모사를 할 수 있는 허가증을 받고, 1862년에는 국립 미술학교에 입학한다. 군 복무로 두 차례에 걸쳐 학업을 잠시 중단한 것을 제외하고는 정규적으로 학교를 성실히 다니며 루브르에서 만난 루벤스, 부셰, 프라고나르 등을 모사했다. 남들보다 더 성실히 더 열심히 돈을 모아 생계유지를 이어나가며 시간을 쪼개어 그림을 그렸다.
성실함, 그것은 자식들을 잘 키우기 위해 부모님이 삶으로 보여주었던 유산이었으며, 르누아르가 일생을 바쳐 쌓아 올린 과업을 제시해 주는 지표였다.
매일 밥을 먹지는 못하지만 나는 여전히 즐거워
르누아르는 1862년 에콜 데 보자르에 입학해 샤를 글레르 교사의 화실에서 그림을 그리며 새로운 친구들을 만나게 된다. 시슬레, 모네, 바지유 등 인상주의라는 미술 운동을 탄생시킨 화가들 속에 르누아르도 함께 있었다.
1865년 르누아르의 작품 두 점이 살롱전에 입선되었지만, 마네의 작품이 너무 큰 스캔들로 떠들썩해서 별다른 주목을 끌지 못했다. 결국 입선은 했지만 아무런 주목도 끌지 못한 채 낙선되었다.
살롱전에 당선되어야 화가로서의 입지를 다질 수 있었기에 번번이 낙선된 르누아르의 형편은 점점 궁핍해졌다. 그렇지만 한결같이 성실하고 착실한 청년에게 좋은 친구들이 존재했다. 비교적 부유한 집안 출신의 바지유와 쥘르 쾨르는 자신들의 화실에서 그림을 그리게 해주며 가끔씩 음식도 가져다주었다. 마네는 경제적으로 어려운 친구들의 그림을 꾸준히 사주었다.
모네와는 함께 부지발의 센 강에 있는 유원지 라 그르누예르에서 같은 주제를 반복해서 그림을 그렸고, 가난은 오히려 이 둘을 더욱 끈끈하고 강렬하게 묶어주는 역할을 했다. 전통적 예술관을 강조하는 아카데미 교수들을 비난했고 새로운 표현방식을 모색했다. 매 끼니를 챙기는 것조차 사치였던 시절이었지만 르누아르는 우울과 슬픔 등 힘든 감정은 그림으로 남기지 않았다. 그림 그리는 것만큼은 결코 힘들고 괴롭고 외로운 일이 아니었다. 가장 힘든 일은 물감을 살 돈이 없는 순간이었다.
“(모네와 나) 우리는 매일 먹지 못하지만 나는 여전히 즐겁다네. 모네는 좋은 그림 동료거든. 나는 결코 투사적 기질이 없어서 내 좋은 친구 모네가 없었다면 수없이 포기했을 것 같네.”
부패한 시체, 썩은 살덩이 같은 그림
또 고배를 마셨다. 살롱전이 그토록 전통적인 기법을 중시한다면, 새롭게 파리 공식 화단과의 결속을 다져보겠다 결심하여 기준에 맞는 대작을 출시했으나 이번에도 낙선되었다. 고의로 자신을 밀어내고 있다고 믿은 르누아르는 다시는 살롱전에 그림을 출품하지 않기로 결심한다.
낙선된 화가들은 자신들의 작품을 전시하기 위해 협동조합을 만들어 1874년, 제1회 인상파전을 개최한다. 워낙 강력한 비평들이 많아 르누아르의 작품은 크게 눈에 띄거나 비교적 덜 조롱을 받았으나, 제1회 인상파전은 인상파라는 명칭과 더불어 많은 빚만 얻었다.
제2회 인상파전을 이어가며 또다시 세상은 인상파 화가들을 조롱했다. 이번에도 비교적 덜 욕먹는 편에 속했으나, 르누아르의 작품 또한 야유의 대상이었다. “완전히 부패한 상태의 시체에서 나타나는 녹색과 자주색 반점들로 뒤덮인 썩은 살덩이”라는 비평을 받으며 이번에도 완전히 실패했다.
다시는 살롱전에 그림을 출품하지 않으려 했으나, 현실은 그림처럼 밝지 않았다. 실패와 야유, 조롱을 받고 1878년 다시 르누아르는 살롱전으로 귀환했다. 살롱전에 참가하는 사람은 인상파전에 작품을 출품하지 못했으므로 인상파전에는 참가하지 않았다. 그리고 드디어 행운이 찾아왔다.
가장 꾸준히 대기 중인 화가
1879년 드디어 살롱전에서 성공을 거두게 된 데는 부르주아 가문의 자손인 샤르팡티에 부인의 도움이 있었다. 가장 꾸준하고 성실한 르누아르를 위해 후원을 해주고 여러 사교 모임에 르누아르를 초대해 경제적인 도움을 주었다. 살롱전에 선보인 작품 또한 샤르팡티에 부인과 아이들을 그린 그림으로 르누아르에게 명성을 안겨준다.
르누아르는 점차 인상주의 양식과 시각이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한층 부드럽고 섬세하게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지만 주제의 선택이 제한적이고 이전보다 훨씬 단조로워졌다. 프랑스 인상주의가 미국으로 진출하며 대대적인 성공을 거뒀지만 새로 그린 작품은 뭔가가 빠진 듯했다.
새로운 양식을 모색하던 르누아르는 차분한 색채를 선택하고 물감을 느슨하게 칠함으로써 더욱 반짝이는 아름다운 그림을 그렸다. 다시 인상주의로 돌아갔지만 고전주의의 장점과 인상주의 미술의 장점을 종합하여 다른 인상주의의 화가들과는 차별된 자신만의 그림 양식을 만들었다. 사회에서 인정받고 경제적으로 안정되며 자신만의 화풍을 가졌지만, 세월은 그를 차분히 기다려주지 않았다.
1897년 자전거를 타다가 넘어져 오른팔을 다치게 되어 왼손으로 그림을 그렸고, 다친 오른팔은 류머티즘성 관절염으로 마비가 되었다. 손과 팔이 뒤틀리기 시작했고 건강은 악화되어 왼쪽 눈의 시력이 약해지는 등 안면마비가 이어 찾아왔다. 두 다리도 마비되어 걸을 수 없게 되어 휠체어를 타고 붓을 손에 묶어 그림을 그렸다. 고통 속에 잠은 거의 이루지 못했지만, 그래도 그림을 그렸다.
젊은 시절 가난했을 때도, 사랑하는 아내를 먼저 떠나보냈을 때도, 고통 속에 잠 못 이루는 순간에도 그는 가장 꾸준히 성실하게 이젤 앞에서 대기 중인 화가였다.
내게 그림이란, 소중하고 즐겁고 예쁜 것
1919년 12월 3일 폐병으로 앓아누웠던 르누아르는 숨을 거둔다. 빛이 주는 효과를 중요하게 생각했던 인상주의 화가였지만, 그는 빛이 주는 효과보다는 인생의 기쁨과 행복함을 표현하는 것을 더 중요하게 여겼다. 재잘거리고 봄날의 햇살처럼 빛나고, 행복한 삶의 정서가 가득한 사랑스러운 그림. 손가락이 휘어지는 고통 속에서도 그가 남긴 것은 성실하게 평생을 그려온 아름다움이었다.
“고통은 지나가지만, 아름다움은 남습니다.”
르누아르에게 그림이란 소중하고 즐겁고 예쁜 것이어야 했다. 고통은 지나갈 것이니, 지나간 고통의 자리에 아름다움이 남아 있어야 인생이 계속될 것임을 그림으로 남겨두었다. 오늘날 우리가 르누아르의 작품 앞에 서면, 한 세기 전 화가의 삶에 있었던 가난과 고통, 병마는 사라지고 오직 환한 색채와 따스한 빛, 그리고 삶의 아름다움만이 우리를 맞이한다. 그의 말처럼, 예술가의 고통은 지나갔지만 그가 창조한 아름다움은 영원히 남아 우리에게 삶의 기쁨을 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