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네 마그리트
당신은 저보다 운이 좋군요!
엑소시스트, 하울의 움직이는 성, 아바타, 매트릭스, 트루먼 쇼 등 이름만 들어도 알 수 있는 전 세계적으로 대중들의 관심과 인기를 불러일으킨 수많은 영화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은 한 화가의 작품에 대한 오마주이다.
사탄에 빙의된 소녀 리건을 퇴마하기 위해 신부 메린이 리건의 집에 도착했을 때의 장면은 영화 엑소시스트의 포스터 장면이기도 하다. 르네 마그리트의 ‘빛의 제국’ 작품은 이 유명한 장면으로 거의 유사하게 오마주 되었다. 2층 방 창문에서 새어 나오는 불빛과 가로등만이 리건 신부를 비추고 있어 어둠과 빛의 공존, 선과 악의 공존을 상징한다. 르네 마그리트의 작품 또한 낮과 밤, 어둠과 빛이 공존하는 형용 모순을 즐겨 그렸다.
르네 마그리트의 그림은 뭐 하나 쉽게 이해하기 어렵다. 분명 친숙하고 일상적인 평범한 사물과 사람인데 크기가 너무 크거나, 예상치 못한 곳에 배치되어 있어 기이하고 맥락이 없다. 많은 이들이 마그리트 작품 속 이미지들을 이해하거나 해석하려고 애썼다. 기쁜 마음으로 자신만의 해석을 안고 온 사람들에게 마그리트는 웃으면서 이렇게 말했다.
“축하합니다! 당신은 저보다 운이 좋으십니다!”
어떤 것 하나 낯설지 않은 것들이지만 마그리트 그림에서는 모든 것이 평온하게 낯설고 이질적이다. 있어서는 안 될 곳에 어떤 물건, 인물이 있는 모습을 의미하는 데페이즈망 기법은 초현실주의의 대표적 방식으로 고정관념에 대한 도전이기도 하다. 마그리트에게 예술이란 아름다움을 사유하는 것이 아니라 고정관념과 세상의 상식에 대한 도전이었다.
익사한 어머니의 시신을 보다
르네 마그리트는 1898년 벨기에 브뤼셀 근교 지방에서 삼 형제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의 직업이 일정치 않아 태어난 지 2년 후에 이사를 갔고 이후로도 자주 이사를 다녔다. 6살 때 여름휴가를 보내던 마그리트는 한 소녀와 지하 납골당에서 놀다가 도시 출신의 한 화가를 보게 된다. 훗날 마그리트는 그림을 그리는 화가를 보고 그림 그리기가 마술 행위처럼 느껴져 무의식적으로 그림을 그리는 것에 끌렸다고 한다.
유난히 감수성이 발달했던 마그리트는 어린 시절부터 공동묘지, 어두컴컴하고 어두운 분위기, 오르간, 신부 옷 입기 놀이 등을 즐겼다. 14살 가장 감수성이 예민하던 시기엔 어머니를 잃었다. 가족이 살던 집에서 그리 멀지 않던 강에서 익사한 채 발견된 어머니의 모습은 잠옷으로 얼굴이 가리어져 있었다. 어머니가 강물에 몸을 스스로 던지기 전 자신의 얼굴을 옷으로 감쌌는지, 소용돌이치는 조류 때문에 얼굴에 천이 덮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어머니의 시신은 마그리트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어머니가 왜 스스로 죽음을 택했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그 사건 이후로 죽음은 마그리트의 새로운 정체성이 되었다. 이후 가려진 죽음의 이미지에 대한 주제를 일관적으로 반복하게 되었다. 우울증으로 추정되는 어머니의 마음의 병은 마그리트 또한 평생을 고독함 속에서 살게 했다.
어머니의 죽음 이후에 아버지는 아들들을 데리고 샤를르와로 이사했다. 마그리트는 고전 공부를 시작했지만 금방 싫증을 느껴 중퇴했고 18세가 되던 해에 브뤼셀에 있는 아카데미 데 보자르에서 공부를 시작했다. 여전히 학교 수업에는 큰 관심이 없었고 당시 유행하던 괴기소설과 영화를 즐겨 보았다.
초현실주의자에서 자신만의 초현실로
흥미를 가지지 못한 학교 수업에서 얻은 것은 새로운 친구들과의 교유였다. 시인 피에르 부루주아, 피에르 플루케와 함께 ‘오 볼랑!’이라는 얼마 못 가 폐간되는 평론지를 발행하고 ‘세 여인’이라는 작품도 지루 화랑에서 전시했다.
1920년에는 벨기에 시인이자 음악가인 므장스를 만나면서 초현실주의 시와 산문을 썼고, 벨기에 초현실주의자들과 교류하게 된다. 같은 해 아내가 될 조르제트를 다시 만나게 되는데, 열다섯 살 때 이미 마을 축제에서 한 번 만난 적이 있던 아가씨였다. 브뤼셀의 식물원을 산책하다 만난 그녀에게 짓궂은 장난을 쳐 그녀를 당황하게 만들었고 2년 뒤에는 그녀와 결혼하였다.
결혼 후 벽지 공장에서 장미를 그리고 포스터 디자인과 광고 일을 하면서 자유 시간에 그림을 그렸다. 입체주의와 미래주의 등 새로운 경향의 미술에 관심을 두다 기존의 모든 전통적인 형식을 버리고 초현실주의 회화로 전환하게 된다.
파리로 이주한 마그리트는 벨기에 초현실주의 그룹을 결성해 활동했다. 이데올로기적 부르주아 가치에 혐오감을 강하게 표출하는 파리의 초현실주의자들은 공공연하게 혁명적 활동의 캠페인을 벌였지만, 마그리트는 혁명을 원하지는 않았다.
소극적인 마그리트의 태도에 결국 한 모임에서 불화가 일어났고 1930년 브뤼셀로 귀국하며 초현실주의 양식을 벗어나게 된다. 새로운 미학과 철학이 그의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었다.
데페이즈망, 이전에는 관련이 없던 오브제들이 함께 결합됨으로써 새로운 충격을 야기하는 기법. 꿈과 무의식을 강조하는 기존의 초현실주의자들에게서 벗어나 의식적이고 명료한 이미지의 혁명, 현실 세계를 시험하는 회화적 경험의 자신만의 초현실을 마그리트는 인생철학으로 정립했다.
그림은 스스로 말해야 합니다
브뤼셀로 귀국한 마그리트는 주변의 초현실주의자의 미술가, 조각가, 시인들과 교류하며 40년간 자신의 독특한 양식 추구에 전념한다. 중년기의 1930, 40년대의 유럽은 제1차 세계대전과 경제공황, 뒤이어 발발한 제2차 세계대전까지 모든 것이 불안정한 시대였다.
마그리트는 세 차례에 걸쳐 공산당에 친구들과 함께 가입했으나 곧 탈당한다. 1943년부터 1948년까지 전쟁으로 인한 불안한 상황을 풍자하기 위해 잠시 기존 작품과는 단절을 보이는 시절을 보냈지만, 다시 자신만의 양식으로 되돌아온다.
마그리트는 정치 현실에 큰 참여 의사도 없었고 투철한 역사의식을 지닌 행동가도 아니었다. 중산모를 쓴 기성복 차림으로 다니는 평범한 지식인이었다. 헤겔과 하이데거 철학서를 즐겨 읽고 명상을 좋아하는 조용한 몽상가였다. 40년간 성공의 주류에서도 어느 정도 벗어나 있다가 1965년 12월 뉴욕의 근대 현대 미술관에서 열린 대 회고전으로 큰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결코 익숙해질 수 없는 익사한 어머니의 사체를 목격했던 십 대부터 69세의 나이로 사망할 때까지 그가 집중한 것은 현실 안에서의 낯섦이었다.
“나는 내 그림을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림은 스스로 말해야 합니다.”
내게 있어 세상은 상식에 대한 도전이다
사과를 물고 있는 중산모 신사, 낮과 밤이 공존하는 하늘, 하늘에서 비처럼 내리는 사람들, 중력의 법칙을 거스르는 바위 등 마그리트의 이미지들은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는 세상의 질서를 뒤흔든다. 그의 작품 앞에서 우리는 눈으로 보는 것과 인식하는 것 사이의 간극을 경험한다.
마그리트의 작품은 우리에게 멈춰 서서, 정말로 '보는' 법을 배우라고 요구한다. 그의 그림은 우리의 시각적 관습과 기대를 뒤집으며,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는 것들에 의문을 제기한다.
"내게 있어 세상은 상식에 대한 도전이다."
평범함을 초월하여 이미 알고 있는 것들에 대한 재배열, 상식과 현실에 대한 도전, 그의 작품이 지금까지도 영화, 광고, 패션 등 다양한 분야에 영감을 주는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다. 마그리트의 이미지들은 설명되기를 거부하며, 오로지 경험되기를 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