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쿠터 타고 친구 집에 가는 즐거움
고3 시절 가장 강렬한 기억 중 하나는 비가 쏟아지던 날, 친구 3명과 우산을 쓰지 않고 고등학교에서 예술의 전당까지 걸어갔다 온 일이다. 완전히 쫄딱 젖은 채로 비와 관련된 노래들을 부르며 길을 걸었다. 꽤나 착한 편이었던 (나쁘게 말하면 개찐따) 우리들은 독서실에서 몰래 빠져나와 비를 맞는 일이 꽤 큰 일탈이었고 지금도 만나면 그때의 일을 추억하곤 한다.
그때는 고등학교에서 예술의 전당까지 가는 길이 참 멀어 보였는데 지금 와서 보니 그냥저냥 걸어 다닐만한 거리다. 하지만 그때의 그 길, 그 경험은 우리의 울타리 밖에 있는 것이었고 우리의 경험의 폭이 그만큼 작았기에 그 길이 신선하게 다가왔다. 그렇게 우리의 세계는 조금 더 확장되었다.
세계의 확장은 성장의 필수요소다. 경험들이 쌓이며 우리의 세상은 확장해 나간다. 멀게만 느껴졌던 신길동 이모집도 가까워지고 거의 지구 반대편으로 느껴졌던 대전의 작은 할머니 집도 (여전히 약간은 그런 느낌이 있지만) 이제는 갈만한 거리가 되었다. 나의 세계는 거침없이 커져 우리 사는 지구가 축구공처럼 작게 느껴질 때도 있다.
스쿠터는 나의 세계를 약간 다른 방식으로 확장해준다. 나고 자란 서울이지만 이동수단이 대중교통일 때 가보지 못했던 구석구석을 경험하게 해 준다. 예전에는 목적지가 (말 그대로) 목적이었고 이동 과정은 부가적인 것이었다면 스쿠터를 타면 이동 과정 또한 훌륭한 경험으로 남는다. 그 과정에서 새로운 길들을 탐색할 수 있다. 새로운 도로를 달리는 일과 구석구석 숨겨진 골목을 탐험하는 일은 커다란 설렘과 즐거움이다. 이는 곧 나의 세계를 조금 더 확장해준다.
이를 가장 손쉽게 개이득적으로다가 경험하려면 친구 집으로 스쿠터를 타고 가면 된다. 스쿠터가 없을 때는 친구 집과 우리 집의 중간 정도 지점에 교통이 좋은 그런 지역 (뻔하디 뻔한 강남, 홍대 등)이 되겠지만 우리에겐 스쿠터가 있으니 인심 쓰듯
'너희 집으로 내가 갈게'
라고 말하면 친구는 보통 엄청 고마워한다. 그때를 놓치지 않고
'대신 밥은 네가 살 거지?'
지 새끼가 사람새끼면 보통 밥은 산다고 한다. 이러면 우리는 세계도 확장하고 인심도 쓰고 밥도 얻어먹을 수 있다. 이건 가히 스쿠터의 기적이다.
그렇게 모르는 길을 달리고 나면 조금 더 디테일한 서울이 남는다. 스쿠터와 함께 새로운 길을 달렸던 오늘의 온도와 날씨와 풍경이 남게 되어 감각을 확장시켜 준다.
살아갈수록 내가 사는 세계는 이완되지만, 반대로 마음은 수축하니 그건 좀 씁쓸한 일이다. 열린 마음은 점점 닫히고 되지도 않는 선입견에 사로잡혀 지레짐작 남을 판단하고 나와 다른 이야기를 듣지 않는 편협함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해진다.
소인배 내 마음도 스쿠터를 태우고 어디 멀리 여행을 보내고 싶다. 이런 저런 경험이 많아질수록 상처받고 작아지는 것이 아니라 바다처럼 깊고 우주처럼 광활하게 팽창하면 얼마나 좋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