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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꿀갱 Nov 06. 2019

현대 한국 소설의 기쁨

 기억은 잘 안 나지만, 무라카미 하루키 본인인가, 그의 소설에 나온 어떤 인물인가의 독서 철학이 첫째는 '죽은 작가'의 책만 읽는 것이고 둘째는 국내 소설은 읽지 않는다는 말이 꽤 인상 깊었다. 엄청 멋있게 느껴졌다. 책을 간지 나려고 읽는 사람인 나 또한 이 철학에 의거 소설책을 고를 때는 죽은 작가인지, 국내 작가가 아닌지를 가장 먼저 따지는 ㅂㅅ이 되어버렸다.


 그래서 내 책장에는 도스토예프스키, 알베르 까뮈, 밀란 쿤데라 등의 외국 소설만 가득하게 되었다. 이국에서의 삶을 항상 동경하는 나에게 그들의 이야기들이 흥미롭게 느껴질 때도 있었고 작가의 이름이 어렵고 네임드일수록 나의 지적 허영이 충족되는 기분이었다. 특히, 지인들이 집에 놀러 올 때 '좋은 책이 많네요', '생긴 거랑 다르게 책을 많이 읽나 보군요' 할 때 기분이 좋았다.


 '무식한 것들, 그거 그냥 인테리어인데.'


 그러다 같이 사는 사람이 생겼는데 이 분은 '살아있는'' '한국 작가'의 소설을 열심히 읽었다. 정확히 나와 반대되는 취향이었다. 한강, 김애란의 책들부터 시작해서 요즘 핫한 박상영의 소설로 책장이 점점 채워지고 있었다. 


'훗, 이런 풋내기 같으니, 한글로 된 세 글자 이름을 가진 소설가의 책을 읽어?'


 라고 처음엔 살짝 무시하다가 우연한 기회에 한강의 소설을 계기로 한국소설을 읽게 되었는데 진짜 충격적이었다. 우리 시대의 이야기가, 우리의 언어로, 우리의 표현대로 쓰인 소설은 팔딱팔딱 뛰는 생선처럼 역동적으로 느껴졌다. 나의 이야기 거나 나의 주변에 있을 법한 이야기들을 읽으면 등이 섬뜩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왜 이제야 알았을까 싶다. 한반도에 태어나 동시대를 사는 작가들의 소설에서는 외국 소설에서는 느낄 수 없는 흡입력이 있었다. 어떤 책들에서는 한 장, 한 장 읽기가 아까운 느낌을 가지기도 했는데 초, 중, 고 시절 이후 처음 느끼는 귀한 감정이었다.


 최근에 서점에 들러 한국 소설 베스트셀러 코너에서 기웃거리는데 너무 깜짝 놀랐다. 그냥 우리 집 책장이 그대로 있는 거 같았기 때문이다. 같이 사시는 분은 한국 소설 베스트셀러 코너를 그대로 가지고 오는 거였구나. 헤르만 헤세의 싯다르타를 사려다 그러기를 그만두었다. 집에 잔뜩 쌓여있는 한국 소설이나 다 읽어야겠다 생각이 들었다. 취향이 다른 사람과 같이 사니 나도 새로운 취향이 생긴 거 같아 좋다. 책을 잘 사는 사람과 같이 사니 책값을 아낄 수 있어서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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