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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니스푼 Jan 20. 2021

<일로일로 Ilo Ilo>(2013)

싱가포르 가정에 들어온 필리핀 가사노동자

싱가포르에서 살다 보니 남에게 말 못할 고민이 생겼다. 집안일을 전담하는 메이드가 있으니 한편으로는 나도 무기력해지고 다른 가족들은 집안일의 존재도 인식하지 못한다는 것. 그나마 집에 있는 주부이자 메이드에게 일 시키는 것을 담당하는 나는 머리로라도 끊임없이 집안일을 '생각'하지만, 남편과 아이들은 아무 신경을 쓰지 않아도 청소 빨래 요리가 모두 착착 굴러간다는 게 내겐 영 못마땅하다.


미국에서 우린 방 다섯 개 화장실 다섯 개 있는 커다란 이층집을 직접 관리하던 독립적인 맞벌이 부부였는데, 도대체 방 세 개 짜리 아파트에서 입주도우미를 두고 우리 가족 완전히 버릇 망친 거 아닐까?


그래도 다행인 건 아이들은 처음부터 메이드 손에 자란 게 아니어서 메이드에게 의존하지 않는다는 거다. 신체적 감정적으로 이 아이들의 세상에는 메이드가 차지할 자리가 없다. 이미 손이 많이 가는 어린 시절을 벗어난 후에 싱가포르에 온 데다가 아이들 관련이라면 전부 엄마아빠가 직접 챙기는 것에 이미 익숙해서, 우리 아이들은 메이드를 편안해하지도 않고 그녀랑 별로 친해지지도 않는다. 그렇다고 메이드에게 못되게 구는 것도 아니고 그냥 데면데면한 사이.


지인과 이런 대화를 나누다가 싱가포르 영화를 하나 추천받았다.

<일로일로 Ilo Ilo> (2013)


배경은 90년대. 맞벌이 부부와 초등학생 아들이 있다. 엄마가 임신중이라 몸도 힘든데 아들은 학교에서 말썽만 일으키는 문제아. 몸과 마음이 너무 피곤해진 엄마는 필리핀 출신 메이드를 고용한다. 집안일에서라도 좀 벗어나려고. 그런데 졸지에 메이드와 한 방을 나눠 쓰고 낮에는 엄마와 아빠가 둘 다 없는 집에서 원치 않던 메이드의 시중과 간섭을 받게 된 소년은 그게 싫고 불편해서 이리저리 메이드를 따돌리고 심술을 부린다. 고향집에 돌쟁이 아기를 두고 돈을 벌러 싱가포르에 온 메이드는 소년과 기싸움을 벌인다. 그렇게 부대끼면서 가까워지는 두 사람. 그러는 동안 동아시아 금융위기가 닥쳐와 아빠는 주식으로 큰 돈을 잃고, 엄마아빠는 둘 다 각자의 회사에서 해고되거나 해고될 위기를 겪느라 정신이 없다. 이미 피곤했던 가족관계는 더욱 위태로워지고 그 속에서 메이드와 소년은 서로를 소중히 여기게 된다.


어린 시절 8년 동안 필리핀 메이드의 손에서 자란 안소니 첸 감독의 자전적인 경험이 담긴 영화라고 한다. 열두 살 때 메이드가 필리핀으로 돌아갈 때 굉장히 슬펐다고. 일로일로(Ilo Ilo)는 필리핀의 지역 이름이다.


이 영화를 보는 나는 어쩔 수 없이 영화 속 엄마(주인아줌마)의 입장을 헤아리게 된다. 엄마는 메이드에게 차갑다. 오해든 사실이든 수상한 일이 생겼을 때 메이드를 의심하고 다그치는 것은 엄마 몫. 아들을 야단치고 싫은 소리 하는 것도 엄마 몫. 물론 아들이 사고를 쳐서 학교에서 연락이 올 때마다 가장 많이 스트레스를 받는 것도 엄마다. 거기다 이 엄마는 늦둥이 둘째를 임신중이라 배가 남산만하다. 몸과 마음에 과부하가 걸린 것은 물론이요, 가족과 메이드 사이에서 가장 비판받기 쉽고 양쪽에서 원망듣기도 쉬운 입장이다.


아빠(주인아저씨)는 좋은 사람이지만 가족의 모든 드라마에서 한 발짝 떨어져 있다. 메이드에게도 아들에게도 직접 간섭하지 않는다. 그러니 중간중간 메이드에게 친절한 말을 건네는 착한 역할은 아빠 몫. 우리 집이랑 똑같잖아. 가끔 친절하게 말을 붙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딱히 메이드에게 이익을 주거나 친한 건 아니다.


우리 집이랑 제일 다른 건 아이들과 메이드의 관계. 주인공 소년이 우리 둘째와 또래가 비슷하거나 한두 살 많을 것 같은데, 우리 아이들에겐 이미 서로가 있는 데다가 다정하고 꼼꼼한 엄마가 전업으로 집에 있다 보니 메이드가 가족의 일원은 커녕, 옆에서 왔다갔다하면 불편한 남일 뿐이다.


어제는 우리 집 메이드랑 내가 또 한 판 싸웠다. 그날의 이유는 따로 있었지만, 우리 집 메이드의 큰 불만은 자기가 이 집 안에서 중요한 사람으로 여겨지지 않는다는 것. 메이드에게 못되게 구는 사람은 딱히 없지만 나는 차갑고, 남편은 한 발짝 물러서 있고, 아이들은 무관심하다. 그런데 같은 이유로 우리 집 메이드는 다른 집에 비하면 일이 적고 한가한 편이다. 끊임없이 쫓아다니며 돌봐야 할 어린아이나 노인이 없으니 낮에 몇 시간 집안일을 하고 나면 남는 시간도 많고, 저녁 설거지가 끝나면 곧장 문 닫고 자기 방으로 들어간다. 나는 이 정도면 공정한 거래라고 생각하는데 메이드에겐 마음에 안 들었나보다.


더 근본적인 갈등은 집안에 엄마 역할을 할 사람이 두 사람이 있다는 것이다. 집안을 관리하고 아이들을 돌보는 일, 그리하여 가족들에게 없어선 안 될 중요한 사람이 되는 일이 엄마만의 역할은 아니지만 대부분의 가정에서는 그게 엄마가 하는 일이니까. 많은 싱가포르 가정에서는 엄마아빠가 맞벌이를 하고 아이들이 어릴 때부터 메이드가 가사와 육아를 전담한다. 그러다보니 아이들을 어릴 때부터 키운 메이드의 가정 내 위상은 매우 높다. 어떤 면에서는 엄마보다도 아이를 잘 알고 속속들이 가까운 사람이 메이드라서. 영화 속에서도 아이의 마음 속 자리를 놓고 엄마랑 메이드가 아슬아슬 갈등을 겪는 장면이 있다. 반대로 우리집에서는, 남편 말에 따르면 어떤 메이드가 들어오더라도 내가 지금처럼 가정을 꽉 잡고 있는 한 아무도 내 마음에 안 들거고 이 집에서 중요한 사람으로 자리잡을 수 없을 거라고 한다.


이 작은 집안도 인간 세상이라 인정욕구와 권력투쟁이 존재하는가.


영화는 훌륭했다. 싱가포르 이야기였지만 90년대에 동아시아에서 자란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극의 배경을 쉽게 이해하고 공감했을 것이다. 묵직한 주제를 무겁지 않게, 다양한 사회문제를 복잡하지 않게 그려냈다. 이미지는 강렬했지만, 이미지가 이야기를 압도하지 않도록 적당히 강약을 조절한 솜씨도 깔끔했다. 2013년 칸영화제 황금카메라상(신인감독상)과 중국 금마장영화제 작품상 수상, 그리고 부산국제영화제에 초청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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