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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니스푼 Jan 18. 2021

"해미"를 데려온 날

딸이 애완동물을 키우기 시작했다.

일요일 저녁에는 친구들과 저녁 약속이 있었다. 이른 저녁을 마치고 커피를 마시던 중 전화기를 확인했더니, 지난 한 시간 동안 딸에게서 십여 개의 문자와 부재중 전화가 걸려와 있었다.


엄마, 해미가 물을 안 마시는 거 같아요 [7:10 pm]

엄마 무서워요!!!

해미가 죽으면 어떡해? ㅠㅠ

HELP!!!

엄마, 언제 와?

물 안 마시는 거 같아

엄마, 답 좀 해

우린 이제 내일 학교 갈 준비 할게요

엄마 빨리 와!!!!

나 기분이 이상해 ㅠㅠ

뭐랄까.... 외로운 기분?

아픈 건 아닌데 기분이 안좋아

그냥 이상해요

엄마???

엄마 문자 좀 확인해 봐 ㅠㅠ

엄마아ㅏㅏㅏㅏㅏㅏㅏㅏ


부재중 전화 [8:08 pm]

부재중 전화 [8:10 pm]


지금 시각은 8시 14분이었다. 애절한 문자에 깜짝 놀라 딸에게 전화를 걸었다. 엄마 목소리를 듣자마자 아이가 울먹울먹하고, 옆에서는 영문을 몰라 당황한 남편이 딸을 나무래는 소리가 들렸다. 너 우는 거야? 갑자기 왜 그래? 엄마 오랫만에 외출중인데 방해하지 마라. 뭐 그런 말.


친구들에게 곧장 인사하고 일어나 택시를 타고 집으로 향했다.




크리스마스에 산타 할아버지로부터 "햄스터 한 마리" 티켓을 받은 딸은 1월의 둘째 주말에 햄스터를 장만했다. 먼저 햄스터 키우는 것에 대한 유튜브 비디오를 십여 개 보고, 필요한 물건들의 목록을 작성해서 엄마에게 내밀고, 주의해야 할 내용을 가족들에게 가르쳤다. 토요일에 펫샵에 가서 햄스터를 제외한 모든 물건들 - 우리, 사료, 종이침구, 목욕모래, 이갈이장난감 등을 사왔다. 주말 내내 햄스터 서식지를 꾸민 후 일요일 오후에 다시 나가 햄스터 한 마리를 샀다. 혹시나 햄스터가 작은 이동상자 안에서 죽을까봐, 아니면 이동상자를 이로 쏠아서 택시 안에서 탈출할까봐 걱정하며 최대한 빨리 집에 왔다.


그렇게 햄스터 "해미"를 집안에 들여놓고 나는 외출했다.


그리고 내가 외출한 사이에 초보 햄스터 주인은 내가 손바닥보다도 작은 이 생물을 잘 돌볼 수 있을까, 혹시 잘못돼서 얘를 죽이는 게 아닐까, 물그릇의 물이 거의 줄지 않고 있는데 괜찮은 걸까 걱정이 돼서 어쩔 줄을 모르고 있었다. 집에 아빠랑 동생이 있긴 했는데 마음 편히 의지할 수가 없었나보다. 그래서 엄마한테 문자를 하며 기다리는데, 첫 문자로부터 한 시간이 지나도록 엄마는 문자를 확인하지 않고 전화도 받지 않고.


해미가 우리집에 온 첫날 저녁이었다. 내가 이 햄스터를 잘 키울 수 있을까 걱정이 돼서 눈물짓는 딸을 보면서 나는 이 딸이 세상에 온 첫날을 떠올렸다.




딸은 밤 11시 15분에 태어났다. 전날 밤에 입원해서 새벽부터 유도분만을 하다가 중간 어느 때에 무통주사를 맞았는데, 어느 순간부터 더 이상 출산이 진행되지 않았다. 한참 기다리다가 밤 10시가 넘어 응급 제왕절개를 했다. 의료진이 아기를 씻어서 내게 안겨주고 나를 회복실로 옮겼을 때는 이미 다음날이었다.


나는 1인용 병실에 있었고 간호사들은 아기를 데려갔다. 보호자 1인이 옆에서 잘 수 있는 작은 침상이 있었는데 한국에서 오신 엄마가 내 옆자리를 자처했다. 아기는 간호사들이, 산모는 엄마가 챙기게 되었으니 역할이 없었던 남편은 집으로 돌아갔다. 새벽 1시였는지 2시였는지.


그런데 잠은 안오고 초조했다. 그 때 나는 아기를 잘 키울 수 있을까 걱정이 된 게 아니었다. 남편 말고는 아무도 없는 미국에서, 우린 그 동안 잘 지냈는데. 나 참 결혼 잘했어 생각할 만큼 우리는 호흡이 잘 맞는 부부였다. 그런데 아이가 태어나면서 관계의 균형, 삶의 균형이 깨지고 알 수 없는 미래로 내던져진 느낌에 불안했다. 엄마가 옆자리에서 주무시고 계셨지만 이 불안함과 초조함은 엄마가 나눠 질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이미 부모 품을 떠나 외국으로 떠나 온 이상, 난 보란 듯이 여기서 잘 살아야 했으니까.


남편에게 문자를 했다. "You may think you are not needed here, but I need you now." 스마트폰이 없어서 한글 문자를 보낼 수 없던 시절이었다. 당신은 여기서 본인이 할 일이 없다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난 지금 당신이 필요해.


그리고 곧 남편이 나타났다. 엄마를 깨울까봐 병실에 불은 켜지 않았다. 조카가 태어났다는 소식에 시동생이 맨하탄에서 당시 유명했던 매그놀리아 컵케익을 한 판 사다가 자정이 넘은 시간에 뉴저지 병원에 와서 내 몫으로 두고 갔다는 걸 알았다. 몇 시였을까? 나는 남편을 붙들고 소리죽여 울며 어둠 속에서 달디단 컵케익을 먹었다. 그 눈물은 하루 온종일 내 몸에 흘러 들어왔던 각종 약물이 빠져나가는 눈물이었을 것이다. 호르몬과 마취제가 쫙 빠져나간 자리를 달콤한 설탕이 채웠다. 그렇게 마음이 평안해졌다.


건강하게 태어난 아기는 간호사들이 돌보고 있고, 어느 시간이라도 당신이 필요하다는 말에 남편이 달려오고, 이렇게 때맞춰 내 앞에 컵케익이 있다.


이제 생각해보니 혹시 엄마가 그 때 잠을 깼는데 모르는 척 하고 계셨던 건 아니었겠지?

 



그 날 태어난 아기는 열흘 후에 만 12살이 된다.


이 아이가 독립을 하고 결혼을 하고 언젠가 자기의 아이를 낳게 된다면 그건 아직도 먼 훗날의 일이겠지. 그 첫 단계로 아이는 생명을 맡아서 돌보는 책임을 지겠다고 결심했다. 그리고 작은 동물의 연약함이 낯설고 불안해서 눈물을 흘렸다. 생명을 책임지는 것의 무거움을 느낄 수 있는 아이로 자라 주었다.


오늘 아침 베로나는 햄스터를 방에 두고 학교에 갔다. 해미가 놀랄지도 모르니 앞으로 3일 동안은 아무도 자기 방에 들어오지 말라는 신신당부를 남긴 채. 그리고 스쿨버스 안에서 문자를 보냈다.


엄마 컵케익 먹고 싶어요!! 어제 엄마가 나 태어날 때 얘기해 준 다음부터.

기분이 안좋아서 컵케익 먹고 싶은 게 아니고 그냥 먹고 싶어요!

엄마 근데 원래 울고 나면 기분이 좋아진대요. 눈물을 흘리면 엔돌핀이라는 호르몬이 나와서 그렇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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