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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니스푼 Feb 08. 2021

40대 전업주부의 소회

전업주부 3년째, 무료함에 시달리고 있다.

결혼생활 14년 동안 전업과 취업을 반복했다.


한국에서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남편과 결혼해서 미국에 갔을 때 첫 6개월 동안 전업이었다. 물론 그 때는 내가 계속 전업주부를 할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뉴욕에 있는 비영리단체에서 2년간 일하다가 첫째를 낳았다. 그곳은 갓난아기를 하루종일 다른 곳에 맡겨가면서 일할 만큼의 급여를 주는 곳도 앞으로의 성장이 예상되는 곳도 아니었다. 아기를 낳고 1년 반 동안 전업으로 아기를 키웠다.


첫째가 18개월 될 때 로스쿨에 진학했다. 3년 과정이었는데 중간에 둘째를 낳고 한 학기 휴학하느라 3년 반을 다녔다. 로스쿨을 졸업할 때 아이들이 만 5살, 2살이었는데 첫째는 이제 킨더가든에 입학해서 공교육을 시작할 나이였고, 둘째는 한창 귀여운 나이라서 엉겁결에 집에 있게 되었다. 아이들에게는 매우 중요한 시기였다. 그런데 뒤돌아보면 아이들에게는 중요하지 않은 시기가 없다. 내가 학교다니는 동안 아기를 봐주시던 아주머니가 마침 그만두시기까지 해서, 나는 다시 전업주부가 되었다.


그렇게 1년쯤 전업으로 두 아이를 키우다가, 그래도 이건 아니다 싶어서 작은 로펌에 취직을 했다. 거기서 3년을 다녔다. 그러는 동안 두 아이 모두 초등학생이 되었다.


이렇게 전업과 취업을 반복하는 동안 세 가지가 분명해졌다.


1. 남편의 커리어는 쑥쑥 진행되어 돈을 잘 벌어왔다. 남편 혼자서 버는 걸로도 가계소득이 최고 세율에 속했기 때문에, 아무리 작은 액수라도 내가 버는 돈은 절반 가까이 세금으로 나가곤 했다. 나와 남편의 세후 소득을 비교해보면 내가 버는 건 보잘 것 없었다.


2. 취업 중일 때도 집안일은 사람을 썼을망정 아이들에게는 부족하지 않게 시간과 공을 들였다. 학교를 다닐 때도 직장을 다닐 때도, 아이들 깨워 준비시켜 학교며 어린이집에 데려다 주고 데리고 오는 건 내가 했고 저녁을 먹이고 하루를 마무리해서 재우는 것도 전부 내가 했다. 주 4일만 일했고 오후 4-5시에는 퇴근했다. 밤에 늦게 들어온 날은 일년에 너댓 번도 안 될 것이었다. 아이들 학교에서는 매년 반 대표 엄마(Room parent)를 맡아서 봉사했다.


3. 그리고 이렇게 타협을 거듭하며 학교를 다니고 직장을 다니는 동안, 지금도 그렇지만 앞으로도 내가 돈을 많이 벌 가능성은 더 이상 없었다. 바깥에 나가 일을 하는 건 내 자유지만, 내 벌이가 가계소득에 기여하는 몫은 너무 작았고 내 부재가 가정생활의 질에 미치는 영향은 매우 컸다.


물론 아무리 적은 돈이라도 없는 것보다는 나으니까, 하던 대로 오전 10시까지 출근해서 오후 4시에 퇴근하는 주 4일 직장생활을 계속하는 것도 좋았을 것이다. 그런데 출퇴근 시간이 편도로 두 시간, 왕복으로 네 시간이었다. 아이들을 8시까지 학교에 데려다주고 곧장 회사로 가면 10시에 사무실에 도착했다. 4시 정각에 사무실에서 뛰쳐나와 학교까지 곧장 가면 애프터케어가 문 닫는 6시에 간신히 맞춰서 아이들을 픽업할 수 있었다.


그러는 동안 나는 언제나 바빴고, 이리 뛰고 저리 뛰면서도 아무것도 제대로 못하고 있다는 불안감에 시달렸다. 제대로 펴 보지 못한 커리어는 이미 막다른 골목이었는데, 아이들은 오후 시간의 대부분을 애프터케어에서 배를 곯으며 엄마를 기다렸다. 친구들과 노는 것도 아니고, 공부를 하거나 운동이나 악기를 배우는 것도 아니고, 그냥 시간을 죽이면서 말이다. 아이들을 픽업한 후 휘몰아치듯 저녁을 먹고, 숙제를 확인하고, 책 읽히고 조금 놀다가, 밤에 애들을 재우고 집안을 치우고 나면 딱히 한 건 없는데 나도 아이들도 바쁘기만 했다.


남편이 회사에서 싱가포르 행을 제안받았을 때는 그런 상황이었다. 나는 집 밖에서도 집 안에서도 쉴새없이 뛰지만 아무것도 제대로 돌아가는 것 같지 않은 상황에 지쳐 있었다. 우리는 남편 회사의 제안을 수락해서 일 년 후에 싱가포르에 가기로 했고, 나는 회사를 그만두고 일 년 동안 미국에서 우리 가족이 누릴 수 있는 것들을 최대한 경험하기로 했다. 싱가포르에는 없지만 미국에는 있는 것들 - 넓은 자연, 동네 친구들, 가까운 학교, 사계절의 변화, 운전해서 5분이면 다닐 수 있는 운동레슨, 비교적 가까운 유럽여행 등등. 우리 엄마는 내가 직장을 그만둔다는 말에 이런 말씀을 하셨다. "잘 결정했다, 크고 예쁜 너희 집에 하루 종일 그 안에 사는 사람이 없어서 집이 아까웠다."


후회없는 일 년을 보내고 2019년 여름에 싱가포르에 왔다. 6개월 정도 새로운 생활에 적응하고 나니 코로나가 찾아왔다. 다시 6개월은 코로나로 인한 아이들의 긴긴 방학과 남편의 재택근무에 적응하며 보냈고, 여름 이후로 아이들과 남편은 각각 학교와 직장으로 돌아갔다. 나는 다시 코로나 이전처럼, 낮에는 운동을 하고 책을 읽고 글을 쓰고 쇼핑을 하는 생활로 돌아갔다. 아이들이 학교에서 돌아온 후에는 간식을 챙겨주고 같이 빈둥거리고 피아노 연습을 시키고 책을 읽어주고 숙제를 봐주며 시간을 보낼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무료하다.


지루하고 무료하다.


여기가 싱가포르라서 더 그럴 것이다. 집안일은 메이드가 하는데 딱히 좋아하지도 않는 그녀랑 둘이서 하루종일 빈 집에 같이 있자니. 아이들 학교는 너무 멀어서 아침 6:45에 집을 나가 스쿨버스를 타고, 오후 4시가 되어야 집에 돌아온다. 그리고 여기는 계절의 변화가 없다. 무더운 날 또는 비오는 날 뿐이다. 계절의 변화가 일으키는 심경의 변화가 없고, 새로운 마음으로 뭔가를 다짐하기가 어렵다.


그리고 코로나 때문에 더한 것 같다. 싱가포르는 그런대로 코로나가 통제되어 인원제한만 지킨다면 사람을 만나서 먹고 마시는 것에 어려움이 없는데, 그런 겉모습 때문에 나는 내가 코로나 때문에 외로움을 겪는다는 생각을 못했다. 그런데 최근에 여기로 이주한 나 같은 사람은, 불특정 다수를 자유롭게 마주칠 수 있는 기회가 없어지니 딱히 약속을 잡고 만날 만큼 친한 사람이 별로 없는 것이다. 몇 명 있긴 하지만, 한 달에 한 번씩만 몇 번 반복해서 만나면 더 이상 서로 나눌 이야기가 없다. 가족들과 함께 여행을 할 수도 없으니, 생활 속에 새로운 게 없다.


새로움이 없는 날들......


남편과 아이들은 언제나 바쁜데, 내게 바쁜 것은 이제 선택사항이 되었다. 운동도 하고, 외국어도 배우고, 책도 읽는데 다 해도 그만 안해도 그만이다. 해서 달라지는 것도 못 느끼겠다.


다른 문제도 아닌 무료함이라니. 배부른 투정을 하는 것 같아서 어디 이야기하기도 창피한데, 무료하면 자주 무기력해진다.


과거를 계속해서 복기하며 혹시 내가 예전에 뭘 잘못했는지도 샅샅이 따져보았다. 싸이월드-페이스북-트위터를 거치면서 끊임없이 그때그때의 이야기를 쏟아냈기 때문에, 그 시절의 일상과 생각과 결정을 되새겨보기는 쉬웠다. 그런데 아무리 복기해 봐도 예전에 뭘 그렇게 잘못한 것이 없다. 매번 그 당시로서는 주어진 상황에서 최선의 결정을 했던 것 같은데, 어느새 난 이렇게 별로 할 일이 없는 사람이 되어버렸다.


다시 취업을 하고 싶으냐 하면 그것도 잘 모르겠다. 비록 집에 메이드가 있긴 하지만 살림을 맡길 만큼 알아서 집안을 챙기는 게 아니라 시킨 일만 기계적으로 하는 사람이라 집안이나 아이들을 마음편히 뒤로 하고 나갈 수 없다. 그렇다고 이제 와서 다시 이리 뛰고 저리 뛰는 생활을 하자니 더 이상 몸도 피곤하고 의욕도 없어 뭘 그렇게까지 하고 싶은 일도 없다. 어떤 일을 하더라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할 텐데 더 이상 젊은 사람들을 쫓아갈 자신도 없고 말이다.


나도 내가 이럴 줄 몰랐는데, 정말 한순간에 이렇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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