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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니스푼 Feb 19. 2021

<공정하다는 착각>(2020)

개인의 능력과 노력에 대한 부풀려진 믿음

토머스 프리드만의 <렉서스와 올리브나무>(1999), 그리고 데이비드 브룩스의 <보보스>(2000)를 읽었을 때의 눈이 번쩍 뜨이는 느낌을 기억한다. 맥도날드의 골든 아치(노란색 M자)가 들어간 나라들끼리는 더 이상 전쟁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했다. 개방되고 연결된 나라들은 이전보다 풍요로워지고 전쟁이 일어나 그 연결이 깨지면 잃을 것이 더 많기 때문에 각자의 이익을 위해 자연스럽게 전쟁이 억제된다는 논리였다. 보보스는 그 무렵 떠오른 젊은 엘리트 계층이었다. 그들은 물질적인 성공을 거두었으면서도 정신적인 자유와 창조성을 잃지 않는 사람들이었는데, 경제발전과 평화를 같이 약속했던 세계화 시대에 딱 어울리는 종류의 사람들이었다.


<보보스>의 첫 챕터는 "교육받은 계층의 부상" 이다. 저자는 뉴욕타임스 웨딩 섹션에 등장하는 젊은 신랑신부들의 이력을 묘사하며 책을 열었다. 이 책에 따르면 이전의 미국 엘리트가 혈통이나 가족 배경 등을 타고난 사람들이라면 (돈을 물려받은 사람들), 이 신흥 엘리트는 중상류층 가정 출신으로 청소년 시절부터 경력을 갈고 닦아 좋은 학교에 들어가고 좋은 직장에 취업해서 끼리끼리 결혼하는 사람들이었다 (머리를 물려받은 사람들).


그리고 20년이 지났다. 마이클 샌델은 보보스의 자녀들이 성인이 된 지금 유례없이 치열하다 못해 일그러진 미국의 대입경쟁을 묘사하며 책을 연다. <공정하다는 착각>에서 샌델은 미국에서 극우 파퓰리즘이 득세하고 기존 엘리트계층에 대한 반감이 매우 커진 것과, 자신이 재직하는 하버드를 비롯한 아이비리그 대학의 입학 경쟁이 비정상적일 정도로 치열해진 현상의 공통적인 이유를 이렇게 분석한다.


(1) 무분별하게 진행되는 세계화의 혜택은 소수에게 집중되기 때문에 가진 자와 못 가진 자의 차이는 훨씬 커지는데 (2) 소수 엘리트가 득세하는 미국 정치는 이 불평등을 해소하기 위한 방법으로 능력을 통한 경쟁체제 하에서 "기회의 평등"을 확대할 것을 주장한다. (3) 기회의 평등은 물론 좋은 것이지만, 재능과 노력을 바탕으로 좋은 학교에서 진학해서 좋은 직장을 갖고 신분상승을 이루는 것은 결코 불평등을 해소하는 근본적인 방법이 될 수 없다. (4) 수많은 통계가 보여주듯이, 이미 자리를 확고히 한 엘리트계층은 풍부한 자원을 동원한 열성적인 자녀교육을 통해 자녀를 일류대학에 진학시켜 엘리트 신분을 대물림하기 때문이다.


여기까지는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내용인데, 철학자로서 샌델의 깊은 질문은 그 다음으로 이어진다. (5) 만약 모든 사람들에게 배경에 관계없이 평등한 교육을 제공한다면 (물론 현실적으로 불가능하지만), 능력을 통한 경쟁체제는 과연 정의로운 것일까? 다시 말해, 기회가 평등하고 과정이 공정했다면 승자가 많은 것을 누리고 패자는 그렇지 못하는 것이 과연 정당한가?


Meritocracy는 타고난 부나 지위가 아닌 개인의 재능과 노력, 그로 인한 성과에 따라 각기 다른 경제적 보상과 사회적 지위를 부여받게 되는 시스템이다. 우리는 어느새 이런 시스템에 너무 익숙해져서 더 능력있는 자가 더 많은 것을 얻는 걸 당연하게 여기게 되었지만, 샌델의 꼼꼼한 고증에 따르면 미국 사회가 이렇게 변하게 된 것은 지난 40여 년 세계화의 흐름과 발 맞추어서였다. 세계화의 혜택을 독점한 엘리트 계층은 경제적, 정치적으로 점점 더 일반 미국인과 멀어졌고, 거침없는 세계화와 이들이 받는 엄청난 혜택을 정당화할 수 있는 강력한 기제가 바로 meritocracy 였으며, 이것은 불평등을 해소할 수 있는 효과적인 수단이 아니라 불평등을 정당화하는 비민주적이고 비윤리적인 시스템이라는 것이 샌델의 주장이다.


타고난 부나 지위에 따라 자원을 배분하는 aristocracy (신분제)가 불공정하듯이 개인의 재능과 노력, 그로 인한 성과에 따라 자원을 배분하는 meritocracy (능력제)도 불공정하기는 마찬가지라는 이 주장은, 우리의 평소 통념과 너무 달라서 직관적으로는 설득되지 않았다. 나아가서 샌델은 능력제가 신분제보다 더 해로운 면이 있다고 주장한다. 


신분제 사회에서 가진 자는 자기가 받는 혜택이 본인이 운이 좋아 주어진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때로는 창피해하거나 겸손해할 수 있었다. 갖지 못한 사람들도 본인이 타고난 처지가 나빴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능력제 사회에서 가진 자는 자기가 받는 혜택이 본인의 능력과 노력으로 정당하게 따낸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오만해지고, 못 가진 자는 자기의 나쁜 처지에 대해 아무도 탓할 수 없고 오로지 본인의 능력 없고 노력 부족함을 후회하고 수치스러워 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능력제 사회에서는 아무리 불평등이 심화되어도 못 가진 자들이 세상 탓을 하지 못하고 자기 탓을 하면서 수치심과 분노가 안으로 썩어들어가게 된다. 그 결과가 바로 기존의 엘리트 정치인들에 대한 불신과 반감을 여과없이 드러낸 2016년 미국 대통령 선거였다.


눈길을 잡아 끄는 주제에 비하면 읽기 쉬운 책은 아니었다. 우리에게 익숙한 사회적, 정치적인 현상 뿐 아니라 철학적, 윤리적인 논쟁도 길게 소개해서 따라가기 어려운 부분도 있었다. 문제 제기에 비하면 결론이 약한 편이라는 평가도 있지만 어차피 현재 상황은 지난 몇십 년 동안의 세계적인 흐름이었기 때문에 한 권의 책에서 몇 가지 정책 제안을 통해 해답을 찾을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끝까지 읽고 나면, 일류 대학의 입학사정 과정에서 비인간적일 정도로 치열한 입시경쟁을 벌일 것이 아니라, 어느 수준 이상의 학업능력이 증명된 지원자들을 대상으로 추첨을 해서 합격자를 뽑자는 샌델의 일견 허무맹랑한 주장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게 된다.


입시제도는 그렇다치고, 노동시장에 대한 대한 샌델의 주장은 지나치게 이상적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물론 샌델은 세계화를 그만두거나 노동시장에서 결과의 평등을 보장하자고 주장하지는 않는다. 비록 일반 미국인에게는 그 혜택이 별로 돌아가지 않았지만, 세계화와 흐름을 같이 한 meritocracy 덕분에 유색인종, 이민자, 여성 등 소수집단의 인재들이 미국 사회의 신흥엘리트 집단에 편입되고 정치적인 힘을 갖게 되었다. 능력 위주의 경쟁 시스템이 가져온 순기능일 것이다. 이러한 순기능을 멈추지 않으면서 동시에 세계화의 흐름에서 탈락한 일반인들을 포용하고 노동과 생산의 존엄성을 되살릴 수 있는, 이상적인 공공선에 대한 대중의 합의를 이끌어내고 실행해 나가는 정치력을 가진 새로운 세대가 나타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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