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개월 목표로 운동하기, 외국어 배우기, 악기 연습하기
매주 토요일 저녁에 아이들에게 스크린/게임타임을 주는데, 이번 주말에는 첫째가 저녁 내내 랩탑 컴퓨터를 켜놓고 유튜브 대신 숙제를 했다. 화요일까지 마감인 영어 에세이 숙제가 양이 많아서 미리 한다고 했다. 아이가 스크린타임을 마다하고 두세 시간 동안 숙제를 하는 모습은 처음 보았다.
지난 8월에 6학년(미국 학교에서는 중학교 1학년)이 되면서 첫째의 학교 일정은 바쁘고 복잡해졌을 뿐 아니라 숙제와 시험 등 모든 것이 온라인으로 관리되어 더 이상 엄마가 챙기기 어려워졌다.
아이는 아침 6시 20분에 일어나서 6시 45분에 스쿨버스를 탄다. 3시에 학교가 끝나지만 스쿨버스를 타고 집에 오면 벌써 4시다. 학교에서 운동이나 클럽활동을 하는 날은 5시에 돌아온다. 주말을 포함해서 일주일에 5일 운동한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야 하니 9시 반에 재운다. 먹고 쉬고 오가는 시간을 제외하면 집에서 남는 시간이 많지 않다. 학구적인 아이는 아니라서 책은 별로 읽지 않는데, 운동하고 숙제만 해도 하루가 다 간다. 이 약간의 시간 동안 무엇을 먼저 하고 무엇을 나중에 할지를 본인이 알아서 하게 둔다.
결과물이 뛰어나진 않지만 자기 할 일을 야무지게 챙길 거라는 걸 믿을 수 있는 아이다. 중학교를 시작한 후 어느 한 순간에 이렇게 되었다. 그동안 내 책임이었던 많은 일들을 슬그머니 아이가 내 손에서 가지고 가버렸다. 아이의 성취는 내 자랑이 될 수 없지만 참 뿌듯하다. 이건 성취도 아니고, 습관이랄까 태도 같은 거니까. 조용히 자랑스러워해도 괜찮겠지.
3학년 둘째도 같은 학교에 다니는데 아직은 학교에서 운동이나 특별활동을 하지 않아서 4시에 돌아온다. 평일에는 운동도 하지 않으니 누나보다 집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다. 둘째의 시간은 아직 내가 관리한다. 하루에 수학 30분, 피아노 30분, 독서 30분, 이렇게 30분짜리 블럭 세 개를 클리어시키는 게 목표다. 학교 숙제는 몇 분 걸리지 않아서 따로 시간을 내지 않고도 할 수 있다.
한 아이의 시간은 더 이상 관리하지 않아도 되고 다른 아이의 시간도 이렇게 단순해졌다. 첫째가 3학년 때부터 매 학기마다 아이들의 방과 후 시간 활용계획을 엑셀 도표로 만들어 색색으로 표시해서 냉장고에 붙여놓았는데, 수많은 시행착오 끝에 여기까지 왔다.
이렇게 한 아이 분의 시간관리 의무가 내 손을 떠나가니 여분의 멘탈 에너지는 자연스럽게 공들일 다음 관리대상을 찾게 된다. 바로 나.
그 동안에도 일주일에 한 번씩 PT 선생님과 운동하고, 아이들이 배우는 피아노 악보를 펼쳐 틈틈히 혼자서 피아노 연습도 하고, 집 근처 알리앙스 프랑세즈도 다니면서 불어 공부도 띄엄띄엄 하고 있었지만 이 중 어떤 것도 제대로 하고 있다는 느낌이 안 들었다. 일단 목표가 없고 나를 보고 있는 사람도 없으니 틈날 때 맘 내킬 때만 끄적거렸지 꾸준히 엄격하게 연습이나 훈련을 하지 않았다. 거기 더해 나이가 드니 더 이상 새로운 건 잘 안 배워진다.
열두 살 딸이 일주일에 6시간 운동하는데 40대의 내가 일주일에 1시간 운동해서 눈에 띄게 몸이 좋아질 리 없다. 더 나빠지는 것을 조금 늦출 뿐. 내가 일주일에 1번 불어학원을 간다고 과연 프랑스 사람을 만나 불어로 대화할 일이 있을까? 내 불어를 참고 상대해주는 학원선생 외에는. 20대의 내게 외국어는 새로운 세상으로 가는 티켓이었는데 지금은 더 이상 그렇지 않다. 초등학교 때 배웠던 피아노 실력에 의지해서 연습하는 나의 중급 소나티네를 과연 들어 줄 사람이 있을까?
예전보다 더 예뻐질 리 없는 외모를 가꾸고, 현지인을 만나 써먹을 일이 없는 외국어를 배우고, 아무도 들을 사람 없는 악기를 연습하려면 어떤 마음가짐과 얼마나 많은 에너지가 필요할까? 그러면서도 나는 아무도 읽지 않는 글을 꾸준히 쓰고 있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계속 나의 일상과 생각을 정리하는 내 글쓰기를 들여다본다면, 더 나아질 리 없는 미래를 위해 몸을 움직이고 외국어를 배우고 악기를 연습할 수 있는 원동력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아직은 그 원동력이 뭔지 모르겠지만, 다행히 첫째가 날개를 파닥거리며 날아가주어 내게 한 사람 몫의 관리에너지가 남게 되었고 이건 나를 위해 써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5월 28일 금요일에 아이들의 한 학년이 끝나고 31일 월요일에 한국행 비행기를 탈 예정이다. 그때까지 3개월이 남았다. 일부러 그걸 염두에 뒀던 건 아닌데 마침 비슷하게 타이밍이 맞아 떨어져서 3월부터 5월까지 3개월 동안 매진할 세 가지 목표를 정했다.
1. 운동 - 5월 마지막 주에 PT 패키지가 끝난다. 일주일에 한 번 PT하고 있고 일주일에 두 번 정도 아이들이랑 아파트 수영장에서 수영하고 있으니 그 루틴을 계속하면서, 선생님이 끊임없이 권하는 (그런데 나는 계속 미루는) 단백질쉐이크를 일주일에 한 개씩 마셔야겠다.
2. 불어 - 5월 19-20일에 시행하는 불어능력자격시험(DELF) 보기로 마음먹었다. 선생님은 내게 B2 레벨을 추천했는데, 그만큼은 자신이 없다. B1, B2 두 시험을 한꺼번에 보려고 하는데 진짜 목표는 B2 레벨 합격.
3. 플룻 - 중학교 때 배우던 플룻을 여기 싱가포르까지 갖고 왔다. 악기에 입도 안 대 본 지 벌써 십여 년이 지났으니 다시 초보다. 지금부터 3개월 동안 플룻 배워서 한국 가면 아빠 생신에 맞춰 집에서 축하공연 해드리는 게 목표. 평생취미로 가져가라고 엄마가 당시로선 비싼 플룻을 사주셨는데, 평생취미는 커녕 입에도 안 대면서 평생 이삿짐 속에 넣어 들고만 다녔다.
불어랑 플룻, 그리고 접영을 배우는 거 이렇게 세 가지는 오랫동안 내가 "언젠가 여유가 생긴다면 하고 싶은 일"이었다. 그런데 막상 시간이 생겼는데도 본격적으로 하지 못하고 미루기만 했다. 시간은 있어도 그만큼 열정이 따라오지 않았다. 이제 와서 이걸 배워서 어디에 쓰나 하는 목표 없음 때문이었고, 젊을 때처럼 실력이 쑥쑥 늘지 않고 늘 제자리여서 실망할 것도 두려웠지만, 가장 큰 이유는 눈앞에 목표도 없고 실력도 눈에 보이게 늘지 않는데 매일 계속해서 연습할 자신이 없어서였다. 아이들은 내가 시킬 수 있는데, 나를 챙겨서 매일 연습시킬 사람이 없었다.
아이들의 올해 학년이 3개월밖에 남지 않았는데, 잘 커준 첫째 덕분에 그리고 잘 따라주는 둘째 덕분에 남은 3개월은 내가 내 자신의 액티비티를 관리하는 데 시간과 노력을 기울일 수 있을 것 같다. 내가 지금 이걸 해봤자 어디 쓸모가 있겠나라는 생각을 떨치기 어렵지만, 해 보지 않고서는 알 수 없는 일이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