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허니스푼 Mar 17. 2021

주짓수를 시작했다

강한 소년이 되고 싶은 둘째의 선택

우리 둘째는 초3이지만 키도 작고 얌전한데다 동그랗고 하얀 얼굴도 아직 아기 같아서 내게는 여전히 귀여운 베이비다. 그런데 얼마 전부터 스쿨버스에서 자기보다 어린 유치원-1학년 아이 둘이 자기를 괴롭힌다고 불평을 해 왔다. 나이에 비해 덩치가 큰 애들인데 버스에서 내릴 때 당기고 밀친다고.


버스 보조선생님도 있는데다 코로나 때문에 지정좌석 정해진 버스라서 아이 말을 심각하게 듣지 않았다. 유치원, 초1 아이들이 기껏 괴롭힌다고 해봤자 별 거 있겠는가. 그런데 아이는 드디어 세 번째로 불평하며 엄마가 좀 어떻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물론 아이 말을 믿지만 어디까지 믿어야 하나, 과연 어느 정도의 괴롭힘인가, 혹시 우리 아이가 예민한건가? 하는 고민에 남편에게 말을 꺼내 봤는데, 남편은 금세 발끈했다. 자기보다 어린 아이들한테 당하는 것도 혼자 해결 못하고 엄마한테 해결해 달라 징징거린다며, 아이에게 당당하게 나서 자기를 변호하는 법을 가르쳐야 한다고.


이게 엄마아빠 차이인가? 아니, 그럼 치고받고 싸울 수도 없는 스쿨버스에서 아이는 이미 "Stop it! I don't like it!" 이라고 이야기했다는데, 그 말을 무시하는 아이들에게 뭘 더 어쩌라는 건지. 내가 보기엔 현실적으로 아이에게 선택지가 별로 없는데 남편은 내가 아이 편만 든다며 비판했다.


결론은 의외의 곳에서 나왔다. 아이를 붙들고 이런 저런 질문을 던지다 보니, 아이가 '내 체격이 작아서 강해 보이지 않으니까 어린 애들이 나를 무서워하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이가 실제로 당한 괴롭힘보다 더 큰 스트레스를 받았던 이유가 단박에 납득이 됐다.


"너 혹시 호신용 무술 배워볼래?"


갑자기 떠오른 아이디어였다. 우리 아이들은 어릴 때부터 공격적인 것도 큰 소리도 싫어해서, 무서운 사범님이 기합 소리를 내는 태권도장 근처에도 가지 않았다. 나 또한 정신수양이니 예절교육이니 해서 나이 많은 남자 선생님이 권위적으로 아이들을 다루는 도장이 싫기도 했다. 그런데 아이는 기다렸다는 듯이 이 제안을 덥석 물었다. "알리시아는 주짓수를 잘하고, 예나는 태권도를 잘한대." 라는 말이 곧장 이어져 나오는 걸 보니, 어쩌면 아이는 신체기술을 익혀 더 강한 몸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막연히 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다음 날, 아이랑 어린이용 주짓수와 태권도에 대한 유튜브 비디오를 찾아보았다. 무심히 비디오를 보던 아이가 한 장면에서 "바로 저거야!" 하고 외쳤다."Most kids cannot assert themselves verbally, unless they know they can defend themselves physically." 어린이들은 상대방을 힘으로 이길 수 있다는 자신이 없으면, 자기를 괴롭히는 아이에게 말로 맞설 수도 없다는 대목이었다.


자기를 무시하고 괴롭히는 아이들에게 당당하게 나서 자기 자신을 변호하라는 어른들의 요구는 얼마나 물정 모르는 것이었던가. 아이들은 자기 세계에 대해서 어른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진지하고 현실적이다.




둘째는 그렇게 해서 브라질리언 주짓수를 배우게 되었다. 그런데 막상 시작하니 어쩌면 이게 여태까지 시도해 본 것들 중에 이 아이에게 제일 잘 맞는 운동일지도 모르겠다.


미국에서는 킨더 때부터 동네 커뮤니티 센터에서 기본적인 팀운동을 한다. 주1회 수업에 비용도 저렴한데다 학교 친구들이 다 오기 때문에 처음 시작하는 나이에는 모두들 거기서 배운다. 우리 동네에서는 가을에는 축구, 겨울에는 실내 운동인 농구, 그리고 봄에는 야구를 했다.


막상 해보니까 우리 아들은 여럿이서 공 하나를 우르르 쫓아다니는 운동에는 관심이 없다는 걸 알게 되었다. 축구, 농구는 아웃. 그나마 야구를 좋아했다. 자기 차례가 아닐 때는 가만히 기다리면 된다는 이유였다. 물론 야구는 못했지만, 잘하는 게 목적이 아니라 못하는 걸 계속 연습해서 잘하게 되는 걸 경험시키는 게 목적이었어서, 나는 야구 못하는 아이를 즐겁게 데리고 다녔다.


2학년 때 싱가포르에 와서는 그래도 남자앤데 팀스포츠 하나는 해야지 하는 마음으로 학교 야구팀에 넣었다. 그런데 여기는 너무 더웠다. 그리고 우리 아들은 더운 날씨에 운동하는 것을 유난히 힘들어했다. 학교는 멀고, 더운 날씨에 야외 운동이 싫고, 야구는 못해서, 코로나가 왔을 때 야구는 그만뒀다.


싱가포르에서 가장 무난한 스포츠는 수영과 테니스다. 우리 아이도 둘 다 하고 있기는 한데 기록운동인 수영은 아이에게 잘 맞을 것 같지 않았다. 전략을 쓰는 걸 좋아하고 경쟁심이 강한 아이라서, 나는 테니스를 저 아이의 주종목으로 삼아보자고 마음먹었다. 여럿이서 공 하나를 쫓아다니는 운동에는 흥미를 느끼지 못하더라도, 내 앞의 저 한 사람을 이겨야 하는 운동이라면 충분히 이 아이의 승부욕을 자극할 거라고 생각했다. 근데 아이는 더위를 극복할 정도로 테니스를 잘하지도 좋아하지도 않았다.


시원한 실내운동인 스케이트나 아이스하키를 시켰어야 했나. 하지만 싱가포르에서는 다 시키기 힘든 운동이라서. 아이스하키 또한 여럿이서 공 하나를 쫓아다니는 운동인데다 체격이 작은 아이에게는 어울리지 않았다. 남편은 쟤는 공부시킬 아이라며 웃었지만, 어떻게 요즘 세상에 아이가 책상에 앉아서 공부 아니면 게임만 하는 걸 두고 본단 말인가. 최소한 중학교까지 끌고 갈 운동을 찾아 줘야 했다.


그런데 주짓수를 시켜보니, 아 저거다! 하는 느낌이 들었다. 일단 에어컨이 틀어져 있는 실내운동이었다. 그리고 내 앞의 상대와 엎치락뒤치락 온 몸으로 밀고 부딪혀가며 싸워야 했다. 본능적인 경쟁심도 자극할 뿐 아니라 원초적인 방법으로 신체에너지를 발산한다. 도장에 있는 내내 맨발로 매트 위를 뛰어다니는 아이 얼굴이 환했다.


그리고 평일에 주 2회 새로운 운동을 더하니 매일 할당량이 정해진 수학반 숙제랑 학교 독서숙제를 할 시간이 부족해졌는데, 아이가 그걸 메꾸려고 주말에 수학이랑 독서를 미리 해두기 시작했다. 물론 일정표를 새로 짠 건 나였지만 그걸 기꺼이 수행하는 건 본인이니까. 이제 3주짼데 빠르게 새 루틴에 익숙해지는 게 놀랍고 예감이 좋다.


나는 작은 위기였지만 이걸 기회로 만들어낸  같아서 뿌듯하고, 이전에 없었던 새로운 것을 우리 가정에 도입했다는 유능감을 느낀다.  과정에서 아이가  건강하고 성실하게 자라 준다면 주짓수는 우리 가족과 좋은 인연일 것이다.


작가의 이전글 나의 액티비티 도전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