못한다고 생각할 때 더 하기 싫어진다.
내 특기 중 한 가지는 어학시험을 잘 보는 것이다. 외국어 실력이 좋았을 수도 있지만 실제 실력보다 시험을 더 잘 본다. 시험을 잘 보려면 집중력도 좋아야 하고 요령도 필요하고, 무엇보다도 시험 앞에서 쫄지 않고 평소 실력보다 더 잘해야 하기 때문에 그건 나름대로 하나의 재주라고 생각한다. 한국에서 초중고 12년 동안 철저히 연마한.
오랫만에 다시 어학시험을 보게 되었다. 5월 19-20일에 치르는 델프(DELF) 시험을 준비중이다. DELF (Diplôme d’études en langue française)는 프랑스어 공인 인증 자격시험인데 내 실력이 B1과 B2의 중간쯤이라 두 레벨을 전부 신청했다. 싱가포르에 온 이후로 쉬엄쉬엄 불어학원을 다니고 있지만 목표도 없고 공부도 느슨해서 나 자신을 다잡아 보고자 했다. 시험이 일 년에 두 번 밖에 없는데 마침 일정이 맞길래 서둘러 등록했다.
내 실력이 B1과 B2 사이니까 둘 다 붙겠다는 욕심은 내지 않았다. 준비할 시간이 3개월 있으니 3월은 B1 문제집을 한 권 끝내고 4-5월은 B2 문제집을 한 권 끝내겠다는 느슨한 액션 플랜이었다. 일단 목표는 B1 합격으로 하고 B2는 감을 잡기 위해 도전하는 데 의의를 두기로 했다.
그렇게 한 달 동안 B1 공부를 하다 보니 오, 이 정도는 쉽게 붙겠네 싶다. 그래서 4월이 되면서 B2 문제집을 시작했는데, 왠걸 B1에서 B2 사이에 갑자기 레벨이 확 뛰는 것이다. B1이 외국인 학생을 대상으로 제작한 쉽고 짧은 시험용 지문을 사용한다면, B2는 청취도 독해도 일반 프랑스인이 듣고 읽는 라디오와 신문잡지 기사를 발췌해서 가져온다. 이런 줄 알았으면 B2는 이번에 신청을 안하는 건데. 아, 이거 똑 떨어지겠네.
사람 마음이 참 이상하다. B2 합격까지는 실력이 부족하고 시험은 떨어질 것 같다는 예감이 드니까 그때부터 공부가 더 안되고 가슴 한켠이 콱 답답해져 온다. 일단 기분이 나쁘다. 처음부터 B2에 붙을 것을 기대하지 않았는데 왜 이제 와서 마음이 달라진 것인가? 나는 합격을 기대하지 않는다고 공언했지만 마음 한구석에서는 어쩌면 붙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던 것일까? 내게 꼭 맞는 스마트한 공부전략을 찾아 2-3개월이면 실력을 한 레벨 끌어올릴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일까? 아니면 실력은 부족해도 시험을 잘 본다고 믿는 구석이 있었던 것일까? 다 조금씩 해당되는 것 같다.
기분이 나쁘고 의욕이 떨어지는 이유는 또 있다. 사실 DELF B1과 B2는 대학생 때 이미 다 땄다. 그 때는 그만큼 실력이 됐다. 그 때는 어떻게 그만큼의 실력이 됐던가. 처음 이 글을 쓸 때는 고등학교 대학교 내내 내가 얼마나 프랑스어를 좋아했고 열심히 했는지, 그리고 그 때 내게 얼마나 좋은 기회들이 주어졌는지를 회상하며 줄줄이 썼다. 그리고 다시 읽어보며 다 지웠다.
시간은 이렇게 흘렀는데 제자리를 지킨 것도 아니라 뒤로 퇴보했다. 예전처럼 반짝이는 외국어 감각도 없는데 그때처럼 뜨거운 관심도 없고, 무엇보다도 외국어를 잘해야 할 이유가 없다. 이제는 프랑스에 여행을 가도 내 불어보다 그들의 영어실력이 더 좋아서 다 영어로 소통한다. 필요한 모든 자료는 스마트폰에서 영어로 검색한다. 하다못해 K-드라마가 이렇게 재미있어지는 동안에 프랑스 영화는 어쩜 그렇게 재미가 없어졌는지.
그리고 프랑스어를 더 잘할 기회도 없다. 젊을 때 배워서인지 지금도 문법이나 어휘는 기억나는 게 많은데 fluency가 사라졌다. 머리로 생각하지 않고도 입에서 말이 튀어나오는, 중간중간 디테일을 놓쳐도 아랑곳않고 끝까지 매달려 전체의 의미를 파악하는, 이런 감각은 실전으로만 익힐 수 있는데 실전 경험의 기회가 없다. 프랑스 신문잡지를 읽거나 라디오를 들어보려 해도 너무 재미가 없다. 전쟁이 나서 지하실에 숨어 있는데 바깥 소식을 들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프랑스 라디오 뿐이라면 몇 달 만에 되찾을 수 있을 거 같다. 그런데 싱가포르 아파트 거실에 앉아서 애들 학교 간 사이에 프랑스 라디오를 들으려니 지겹기만 하다.
DELF B2를 준비하며 의욕이 떨어지는 마음 속 깊은 이유는 그거였다. 내가 잘 못한다는 거. 근데 그냥 못하는 것도 아니고 "예전보다" 못한다는 거. 그리고 시험장에서 버벅거릴 내 모습. 구술 심사위원 앞에서 더듬거릴 내 모습이 떠오르면 더 하기가 싫어진다. 나는 외국어 시험장에서 당황해서 쩔쩔매는 사람 아닌데. 시험장에서 날아오르는 사람이어야 하는데. 그러니까 마음 속에 있는 상보다 실제 내 모습이 작을 때, 그걸 외면해버리고 싶은 마음 때문이었다.
내가 못한다고 생각할 때 더 하기가 싫어진다.
델프 시험 준비며 델프 시험 후기에 대해 밤 늦게까지 인터넷을 뒤졌다. 어딘가에 6주 만에 내 실력을 한 단계 올려줄 비법이 있을 것 같은 마음에 남들의 공부법을 찾아 헤매었다. 프랑스에서 연수하고 왔다는 젊은 사람들이 올린 합격 후기에 기가 죽었고, 여러 불어학원에서 인터넷 강의를 패키지로 판매한다는 걸 알고 순간 혹했다. 시원스쿨 프랑스어, 프렌치마스터... 스카이프로 하루 2-30분씩 원어민 선생님들과 연습하는 웹사이트도 있었다. 이 중 어느 것을 빨리 하나 골라야 한다는 마음에 이것저것 회원가입부터 하고 새벽까지 강의 동영상 샘플을 뒤적였다. 아, 빨리 찾아야 하는데. 내 실력을 한 단계 올려줄 족집게 강의를, 족집게 강사를.
조급한 마음에 공부를 멈추고 비법을 찾아 며칠을 헤맸다.
요즘 드라마 <나빌레라>를 보고 있다. 일흔 살의 할아버지(박인환 분)가 평생을 막연히 꿈꿔왔던 발레를 배우는 이야기다. 할아버지는 백조의 호수 무대에 서는 것이 꿈인데, 배우는 할아버지도 가르치는 젊은 발레리노도 그 꿈이 진짜로 이루어질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지는 않다. 보는 시청자도 그렇다. 일흔 살에 발레를 시작한 할아버지에게 재능은 무슨 의미가 있고 앞으로의 목표는 또 무슨 의미가 있는가. 할 수 있는 기회가 있을 때 해보는 것뿐이다. 서두르지 말고. 마음이 급해 서두른다고 더 잘 되는 것이 아니니까. 드라마의 이번 주 방영분에 이런 대사가 있었다.
“저는 일곱 살 때 발레를 시작해서 삼십 년 간 해왔는데, 어느 날 갑자기 백조의 호수를 하고 돈키호테를 하고, 해적을 할 수 있었던 건 아니에요. 단 한번도 빼먹지 않고 매일같이 기본 연습을 해왔기 때문에 그 작품들이 가능했던 거지요. 지금 어르신이 하고 계신 기본 동작들이요.”
드라마 속 할아버지에게서 나를 본다. 마음을 조급하게 먹지 말고 기본 동작을 매일 연습하는 것에 충실하라는 발레 선생의 진부한 대사가 꼭 나에게 하는 말 같다. 할아버지의 도전이 마음을 울리는 이유는 그가 발레를 잘 해서가 아닌데. 그가 결국 발레를 잘 할 것이라서도 아니고. 화려한 과거의 영광도, 빛나는 미래의 가능성도 없지만 그래도 매일 계속하는 것. 이게 왜 남을 볼 때는 잘 보이면서 나를 볼 때는 안 보이는 건지.
아마도 내가 중년이 되어가는 것 같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내 포지션은 방황하면서도 제자리를 찾아가는 젊은 주인공이었다. 남루한 현실을 뒤로 하고 날아올라야 하는 역할이었다. 가정이 자라고 아이들이 자라면서 점점 날개가 무거워졌다. 가정과 아이들이 아니었어도 날개는 무디어졌을 것이다. 제대로 날아오르지 못하고 주저앉는 것이 내 탓인지 상황 탓인지 고민도 많이 했다. 고민이 무거워서 더 오래 앉아 있었다. 이제는 고민도 의미없고 포지션은 완전히 바뀌었으니 일어나서 걸어가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지만, 몸과 마음이 생각을 따라가는 속도는 더디기만 하다.
며칠 동안 조급함에 요동치던 마음을 가라앉혀 다시 책을 펴고 CD를 틀었다. 구글 번역이 워낙 발달해서 더 이상 어설픈 수준의 제2외국어가 필요하지 않은 세상이 왔다. 그렇지만 그래도 난 언젠가 원어민들과 프랑스어로 대화하고 싶다. 그건 구글이 대신해 줄 수 없는 경험. 그렇게 실전 경험을 쌓을 수 있는 기회가 다시 올 때까지는, 느리더라도 할 수 있을 때 책이랑 음원으로 공부하는 수밖에.
시험 날짜까지 남은 6주 동안의 목표는 시험에 붙는 것이 아니라 장만한 문제집을 끝내는 것으로 재조정했다. 조금이라도 좋으니 하루도 빠지지 않고 공부하는 것은 실천사항. 붙고 떨어지는 것은 내 불어 실력이 아니라 그날의 운과 시험 보는 재주에 맡기겠다. 이렇게라도 마음을 붙들어 매지 않으면, 공부할 시간과 에너지를 고민히느라 다 잡아먹어서 안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