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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니스푼 May 27. 2021

싱가포르 아메리칸 스쿨 (1)

성적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는 학교

오늘 우리 아이들은 싱가포르 아메리칸 스쿨에서 두 번째 학년을 마쳤다. 이 학교는 싱가포르의 70여 개 국제학교 중에서도 제일 규모가 크고 오래된 축에 든다. 교육열이 높기로 유명한 싱가포르에서도 가장 전통있고 잘 알려진 국제학교다 보니, 처음 올 때는 우리 부부도 기대가 높았다. 느슨하고 엉성한 미국 학교만 다니던 우리 아이들이 드디어 탄탄하게 공부할 수 있겠구나 하고 말이다.


그러나 역시 이 학교도 느슨했다. 일인당 3천만원이 넘는 비싼 학비만큼이나 학교 시설과 고객서비스는 훌륭했으나, 과연 공부는 그만큼 확실하게 가르치는 건지 고개를 갸웃하게 되는 일들이 많았다.


일단 미국 학교가 대부분 그렇듯이, 교과서가 없다. 교과서가 없으면 아이들이 과목별로 무슨 내용을 어떤 차례로 배우는지 집에서 알기 어렵다. 저학년 때는 아이들이 종종 학교에서 가져오는 종이쪼가리(!)를 보고 요즘 뭘 배우고 있는지 살짝 엿볼 수 있었지만, 고학년이 되면 그나마도 학교에서 나눠주는 랩탑 컴퓨터 속으로 모든 내용이 다 들어가 버린다. 한눈에 목차가 눈에 들어오는 교과서 없이, 미국 교육에 익숙하지 않은 부모는 영어와 수학은 물론이고 사회나 과학 같은 과목은 도대체 아이가 뭘 배우고 있는지 알 수 없다.


또 미국 학교가 대부분 그렇듯이, 숙제가 아주 적다. 미국 학교에서는 바람직한 숙제 시간을 '자기 학년 x 10분'으로 잡는다. 1학년은 10분, 2학년은 20분.... 5학년은 50분이다. 6학년인 첫째는 그래도 하루에 한 시간 정도씩 혼자 숙제하는 게 기특한데, 처음에 둘째가 2학년을 시작할 때는 '하루에 20분씩 부모님과 책 읽고 독서목록 작성하기'가 학교숙제의 전부라니 기가 막혔다. 이게 아이 숙제인지 어른 숙제인지.


그리고 미국 학교가 대부분 그렇듯이, 이 학교에도 시험이 없다. 평가가 없는 건 아니다. 한 단원이 끝날 때마다 교실에서 수업시간 중에 선생님이 쪽지시험을 통해 아이들의 이해도를 확인한다. 그래서 우리 아이들에게는 정해진 날짜와 범위에 맞춰 열심히 공부한 후 시험을 치르는 가슴 죄는 경험이 없다. 시험 전날 밤의 초조함도 시험 끝난 날의 후련함도 모른다. 점수와 등수로 적나라하게 드러난 자신의 위치를 보고 실망하거나 야단을 맞아 본 적도 없다. 시험이 없다는 것은, 평가 결과가 숫자로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시험이 없으면 비교가 없다. 지금 학교에서는 과목별 성적이 Below (기대 수준 이하), Approaching (기대 수준 근접), Meet (기대 수준 부합), Exemplar (기대 수준 초과) 이렇게 네 가지로 표시된다. 예전 미국 학교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 때는 숫자 1, 2, 3, 4였는데 3이 제 학년의 기대 수준에 부합하는 정도였고, 4는 기대치를 뛰어넘어 다음 학년 수준이라는 뜻이었다. 아이들끼리 같은 교실에서 생활하며 누가 뭘 잘한다는 걸 대충 서로 모를 리 없지만, 점수와 등수라는 공통의 잣대로 비교당하지 않는다. 어차피 모두들 ‘기대 수준 부합’ 언저리일 테니까 말이다.


여기까지 나열한 것들은 싱가포르 아메리칸 스쿨만이 아니라 여태까지 우리 아이들이 다녔던 미국 공립초등학교 두 군데에 모두 공통적인 특징이었다. 그래서 위의 것들에는 크게 놀라진 않았다. 그런데 이렇게 느슨한 걸로도 부족해서 지금 학교에서 가장 황당했던 것은, 한 학기에 한 번 하는 학부모상담을 선생님과 부모님 둘이서 하는 게 아니라 학생 본인이 함께 참여하는 것이었다.


아이가 눈을 빛내며 내 앞에 앉아 있으니 도대체 선생님과 속시원히 이야기할 수 없었다. 우리 아이가 수학을 못하지 않나요? 우리 아이가 책을 통 안 읽는데 어떻게 해야 하나요? 선생님은 아이가 잘한다고 하셨지만, 이 정도는 제가 보기에 잘 하는 게 전혀 아닌데요? 아이를 앞에 두고 부모가 이런 말을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첫 학부모상담 때는 도무지 내가 하고 싶은 말들을 할 수 없어서, 따로 한 번 더 약속을 잡아 선생님과 둘이서만 만났다. 그런데 반복하다 보니, 이 상담은 선생님과 학부모가 아이의 성적에 대해서 평가하고 의논하는 자리가 아니었다. 아이가 한 학기 동안 자기가 이룬 성취를 부모에게 보이는 개인 발표회였다. 한 학기 동안 제일 잘 쓴 글과 제일 잘 그린 그림을 자랑하는 자리였다. 처음에는 고작 이걸 하자고 날 잡아 학교에 와서, 궁금한 건 하나도 해결 못한 채로 돌아오는 건가 허무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익숙해졌다.


결국  학교에는 아이의 성적에 대해서 선생님하고 이야기하는 자리가 없다. 시험이 없으니 숫자로 드러나는 객관적인 학교성적이 없고, 그렇다고 해서 선생님이 주관적으로 아이의 학업성취도에 대해서 이야기해 주지도 않으니, 아이가 제 학년 수준을 무난하게 따라가고 있는 한 더 이상 알기가 어렵다. 아이가 아예 못 따라가면 학교에서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특수교사를 붙여준다고 한다. 반대로 아이가 앞서가는 경우에도, 뛰어난 아이가 좀더 어려운 과제에 도전할 수 있게 하는 몇 가지 프로그램이 있다고 한다. 어느 경우든 프라이버시이기 때문에 학교가 어떤 프로그램을 어떻게 운영하는지는 당사자가 아니면 잘 모른다.


긴가민가를 반복하다가 첫째가 초등학교를 졸업할 무렵에야 확실히 알게 되었다. 이 학교는 지식전달을 교육의 가장 중요한 부분으로 여기지 않는다는 걸 말이다. 지식(content knowledge)은 비판적 사고(critical thinking), 문화적 감수성(cultural competence), 의사소통 능력(communication), 창의력(creativity), 인성개발(character), 그리고 협동(collaboration)과 함께 이 학교에서 목표하는 교육의 6가지 측면(6C) 중 하나일 뿐이다.


물론 나도 21세기를 살아갈 우리 아이들이 비판적 사고, 창의력, 의사소통 능력 키우는 거 다 좋은데, 눈에 보이지도 않고 명확한 기준도 없는 그런 능력들을 탄탄한 공부기초와 학습습관 없이 어떻게 키운다는 건지 잘 모르겠고, 혹시 말만 번지르르한 게 아닌가 싶어 불안했다. 미래지향적 교육을 위한 실험에 우리 아이들이 실험쥐가 되는 건 아닐까? 싱가포르 아메리칸 스쿨은 "아이들이 행복하고 선생님도 행복한데, 부모들만 고민인 학교"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었다.


왜 미국 학교에 다니는 우리 아이들은 내가 그 나이였을 때에 비하면 아는 게 별로 없는 것인가? 이 비싼 사립학교의 강점은 무엇인가? 성적에 대해 모른 척하는 대신, 이 학교는 우리 아이들을 어떤 부분에서 성장시키는가? 어떻게 미래를 위해 준비시키는가? 30년이라는 시간차와 한국과 미국으로도 모자라 국제학교라는 변수까지 있어서 내 경험과 비교는 커녕, 과연 내가 아이들이 받는 학교 교육을 이해하고 판단할 만한 그릇이 되는지도 잘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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