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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니스푼 May 30. 2021

싱가포르 아메리칸 스쿨 (2)

적게 배우더라도 자기주도학습

이전 글에서는 미국 학교 전반, 그리고 싱가포르 아메리칸 스쿨에 대해서 마음에 안 드는 점을 썼다. 한 마디로 공부를 너무 안 시킨다. 가르치는 지식의 양이 적고 아이들을 밀어붙이지도 않으니, 극소수를 제외하고는 아이들이 공부를 많이 할 리가 없다.


지난 일 년 동안 우리 아이들은 따뜻한 물 속에 사는 개구리처럼 안전하고 즐겁게 학교를 다녔다. 전세계에 코로나가 한창인데 어쨌든 매일 학교에 가서 선생님과 친구들과 대면수업을 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해서 올해는 더 바라지 않았다. 그렇게 9개월을 보내고 중학교에서는 1년에 한 번 있는 학부모상담날이 되었다.


중학교 상담은 선생님과 부모님을 앉혀놓고 아이가 발표하는 형식으로 이루어진다. 아이는 프레젠테이션 슬라이드를 만들어 본인이 가장 크게 성장한 세 가지 영역과 앞으로 더 나아지고 싶은 세 가지 영역에 대해 40분 동안 발표하고 선생님과 엄마의 질문을 받았다. 그 날이 여태까지 아이를 미국 학교에 보내면서 우리 아이가 받는 교육에 대해 가장 큰 깨달음을 얻은 날이었다. 그 동안 학교에서 아이들이 배우는 내용과 과정을 보며 마음에 들었던 것과 마뜩치 않았던 것들이 전부 한 줄로 이어져 납득되는 느낌이었다고나 할까?


1. 성적이 아니라 성장을 이야기한다.


아이가 가장 성장한 세 가지 영역이라고 했을 때 나는 점수가 많이 늘은 세 과목을 이야기할 줄 알았다. 그런데 아이가 자랑스럽게 발표한 세 가지는 (1) 발표 실력이 늘었다 (2) 무용 실력이 늘었다 (3) 랩탑을 사용하면서 스케줄 및 과제 관리능력이 늘었다는 것이었다. 나는 별로 관심있게 들여다보지 않은 부분이었는데 아이가 첨부한 본인의 비포 & 애프터 영상을 보니 확실히 눈에 띄게 발전했다. 프레젠테이션의 내용과 형식 모두를 통해서, 아이는 본인이 일 년 동안 이만큼 책임감 있고 독립적인 인간으로 성장했다는 것을 선생님과 부모에게 납득시켰다. 아이의 성장도 뿌듯했지만, 질의응답까지 합쳐 한 시간이 넘는 상담시간 동안 영어나 수학 이야기는 선생님도 학생도 꺼내지 않는다는 점은 여전히 놀라웠다.


2. 평가는 하지만 비교는 하지 않는다.


그래도 영어나 수학 성적이 어느 정도는 점수로 나와서 본인의 위치를 알 수 있어야 하는데, 그 역할은 일 년에 한 번 미국 전역의 많은 학교들이 참가해서 치르는 MAP이라는 학력평가고사가 담당한다. 점수는 100점 만점이 아니라서 한눈에 알아보기 어렵지만, 백분위로 영어와 수학에서 전국 기준 본인의 위치가 표시된다. 이렇게 점수로 아이의 위치를 가늠할 수 있는 방법이 없는 건 아닌데, 이 테스트 결과는 느슨한 지표일 뿐이라서 선생님이나 학부모에게는 참고자료가 되지만 막상 학생들은 이 점수에 크게 신경쓰지 않는다. 학교성적이 등수로 나오지 않고 학력평가도 전국 기준 대략적 위치를 표시할 뿐이니, 아이들은 같은 학년 같은 반 친구들과 경쟁하지 않게 된다.


경쟁하지 않는다... 이게 참 설명하기 어렵다. 경쟁의 순기능도 분명히 있으니 경쟁하지 않는 학교 분위기를 찬양만 하고 싶지는 않다. 그런데 친구들과 비교당하지 않고 경쟁도 없이 자라온 아이들의 멘탈리티는 한국에서 자란 나와는 너무나 다르다. 본인 성격이 경쟁심이 적은 편이라면 더욱 그렇다. 초등학교와 중학교는 교실에서 경쟁이 자리잡을 여지를 최대한 없게 하고, 공부 뿐 아니라 다른 면에서도 아이들을 비교하지 않는다. 누가 뭘 잘했다며 상을 주는 일도 없다. 선생님들 입장에서 정말로 비교할 거리가 눈에 안 보이는 건지, 아니면 속마음은 비교되지만 꾹꾹 참고 말을 안하는 건지는 나도 모르겠다. 다만 내가 자란 토양과는 너무 달라서 가끔씩 당황하곤 한다.


3. 지식의 양보다는 그것을 사용하고 표현하는 방법


아침 8시부터 오후 3시까지. 수업시간은 짧지 않은데 아이들이 배운 지식의 양이 적은 이유는, 선생님의 교실 강의를 받아 적고 이해와 암기를 반복하는 "효율적"인 방식으로 지식을 습득하지 않기 때문이다. 싱가포르 아메리칸 스쿨에서는 초등학교 저학년 때부터 수업의 많은 부분을 강의가 아닌 활동으로 운영한다. 질문거리를 찾고, 자료를 조사하고, 그 내용을 친구들과 공동으로 정리한 후, 최종 결과물을 발표하는 방식이다. 2학년이 이런 방식으로 배우는 모습은 허술하기 그지없어 보였는데 6학년쯤 되니까 꽤 그럴 듯해졌다.


첫째는 이번 학기에 환경보호 단원을 공부할 때 친구랑 둘이서 짝을 지어 주제를 찾고, 자료를 인용하고, 참고자료 문헌을 형식에 맞게 표기하며 1차, 2차, 파이널 데드라인에 맞춰 산림파괴에 대한 소논문을 작성해서 발표했다. 다음으로 그리스신화 단원을 공부할 때는 아테나 여신으로 분장해서 그의 모놀로그를 만들어 영상을 찍어 올렸다. 처음에는 아이가 복잡한 그리스 신들의 계보를 제대로 알고나 있는지 혀를 찼는데, 막상 최종 결과물을 보니 몇 분 안되는 모놀로그 속에 아테나의 탄생, 성격, 그리고 유머가 다 들어 있어서 깜짝 놀랐다. 물론 아이가 알고 있는 지식 및 상식은 여전히 많지 않지만, 학교에서 아이들에게 전달하는 것은 지식의 양이 아니라 그것을 사용하고 표현하는 방법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왜 미국 학교에 다니는 우리 아이들은 내가 그 나이였을 때에 비하면 아는 게 별로 없는 것인가? 이 아이들이 속해 있는 교육과정이 공부를 많이 시키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공부(study)를 적게 한다고 해서 배움(learning)이 적은 것은 아니다. 이 비싼 사립학교의 강점은 무엇인가? 선생님들은 아이들을 비교하지 않고 각 개인의 성장을 독려하며 기다려 준다. 선생님 당 학생 수가 적으니 가능한 일일 것이다.


성적에 대해 모른 척하는 대신, 이 학교는 우리 아이들을 어떤 부분에서 성장시키는가? 어떻게 미래를 위해 준비시키는가? 이 학교에서는 지식의 양보다는 배움의 전 과정을 자기 힘으로 꾸려나가는 것에 더 관심을 기울인다. 이게 바로 싱가포르 아메리칸 스쿨의 "자기주도학습"이다. 이렇게 느슨한 분위기에서 자란 아이들이 빡빡한 세상에서 경쟁력 없는 약골이 되는 것은 아닐까 하는 걱정과, 그래도 아이들이 살아갈 실제 세상에서 더 필요한 것은 이런 능력이 아니겠는가 하는 위안이 왔다갔다 한다.


미국 학교가 공부를 적게 시킨다는 것이, 미국에서는 공부를 못해도 상관없다는 뜻은 아니다. 어느 나라에서나 공부는 잘하는 게 좋고, 대학은 좋은 곳을 가는 게 좋고, 공부를 잘하지 않고서 좋은 대학을 가기는 힘든 법이다. 그러나 미국에서는 공부는 잘할 사람만 잘하는 분위기가 있어서 사회나 학교, 또는 주변 또래집단 사이에서 공부를 열심히 잘해야 한다는 압박이 적다. 싱가포르 아메리칸 스쿨도 마찬가지다.


아이들이 학교를 좋아하고 많이 성장하면서 다니는 것에는 매우 감사하다. 학교에서 키워주는 여러 가지 능력과 자질이 집에서 개인 단위로 따라 할 수 없는 것들이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그러나 세상에는 완벽한 학교가 없어서, 아이들이 이렇게 공부를 조금만 해도 괜찮은가 하는 고민, 그리고 이걸로는 아무래도 부족하다 싶을 때 틈틈히 붙들어 앉혀서 억지로 공부시키는 부담은 부모의 몫이다. 물론 걱정이 안 되고 부모 손으로 뭘 더 시키고 싶지 않으면 그것 또한 본인의 자유로운 선택.


다만 나는 여름방학 동안 매일 조금씩이라도 아이들을 붙들어 앉혀서 공부시키는 엄마라서 말이다. 에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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