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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니스푼 Jul 09. 2021

싱가포르에서의 지난 2년

2년 전 이맘 때 우리 가족은 싱가포르에 왔다. 2019년 7월이었다.


싱가포르에 사는 외국인 주재원들은 여기서의 생활이 "버블" 속의 것이라고 이야기했다. 오차드의 고급 아파트와 아이들 국제학교 비용은 회사에서 전액 부담해준다. 미우니고우니 해도 입주메이드가 있어 내 손에 물을 묻힐 일이 거의 없다. 이렇게 여유로운 상황이면 참으로 행복하고 그동안 하지 못했던 모든 자기계발과 사회생활과 취미활동을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왜 그렇게 되지 않을까?


코로나 때문에 더하겠지만, 버블 속의 생활은 단조롭고 무료하다. 계절이 변하지 않는 작은 섬에 갇혀 있는데, 이 안에서도 꼭 필요하지 않은 사회적 만남은 제한돼 있으니, 매일 반복되는 하루하루는 똑같기만 하다.


사실 코로나가 아니었어도 이 생활이 마음에 들지 않았을 것 같다. 내 손을 타지 않고도 메이드를 통해 많은 노동이 해결되니, 내가 자유로워지는 게 아니라 언제나 깔끔하게 집안을 유지하고 매일 저녁 다른 음식을 해먹으며 아이들을 케어하는 기준이 말할 수 없이 높아졌다. 아이들은 당연히 게을러지고 남편은 더 하다. 아니 그렇게 말하면 게을러진 건 나도 마찬가지니 표현을 바꿔야겠다. 아이들은 집 안에서 자기 손으로 해야 할 일이 없고 남편은 더 할 일이 없다.


코로나가 아니었으면 이 단점을 상쇄할 다른 경험과 역할이 있었을 것이다. 가까운 동남아며 호주, 뉴질랜드, 무엇보다도 한국에 자주 다녔을 것이다. 집 안만 쳐다보지 않고 집 밖의 일들로 몸과 마음이 바빴을 것이다.


그러나 코로나 탓을 하며 불평할 수는 없다. 다니지 않은 여행에 대한 아쉬움은 없다. 그 대신 작년에 두 달, 올해 벌써 6주가 넘어가는 재택 및 격리의 날들 동안 가사노동을 도맡아 할 사람이 있었다는 것, 그래서 집안에서 가족들이 겪는 부담과 스트레스가 적었다는 것, 그리고 두 아이가 거의 매일 정상 등교했다는 것이 다행스러울 뿐이다. 우리 가족은 그렇게 안전한 섬 싱가포르에 숨어서, 아니 갇혀서 코로나 기간을 버티고 있다.


싱가포르에서의 지난 2년을 생각해 보려고 했는데 기승전 코로나다. 코로나가 본격적으로 싱가포르에 상륙하기 전까지 첫 8개월 동안 이곳의 분위기와 내 마음이 어땠는지는 어느 새 전생처럼 아스라하다.




처음 싱가포르에 왔을 때는 3~6개월 정도 메이드를 훈련시켜 집안일을 맡기고 아이들을 새 학교에 적응시키고 나면 나는 다시 취직을 할까 생각했었다. 싱가포르가 워킹맘의 천국이라는데, 그런 분위기에서 일하면 나도 야심을 되찾을 수 있었을까?


그런데 여유있는 시간을 보내다 보니 불확실한 구직활동을 하게 되지가 않았다. 나를 기다리고 있는 자리가 있는 것도 아니고, 돈이 필요한 것도 아니었으며, 자아실현이 절박하지도 않았다. 집안일은 남의 손을 빌고 아이들은 꽤 자랐으니 이제야 책을 읽고 미술관에 다니며 관심있는 걸 배울 수 있는데 말이다. 물론 직장을 다니면서도 이런 일들을 할 수 있겠지만, 시간을 쪼개고 쪼개가면서 살고 싶지 않았다.


취직은 조금 더 나중으로 미루고 운동을 시작했다. 10년 이상 미뤄두었던 불어학원도 다시 다니기 시작했다. 박물관 도슨트 프로그램을 이수하며 싱가포르의 역사와 문화를 배웠다. 낮 시간은 이렇게 꽉 채워 보내고, 오후 늦게부터 아이들 숙제 챙기고 같이 책 읽고 저녁 먹이고 놀다 재우면 하루가 다 갔다. 살림도 안 하고 직장도 안 다니고 아이들은 긴 시간 학교에 있는데도 이렇게 적당히 바쁘고 안 무료할 줄은 몰랐다. 그때가 내 싱가포르 생활의 짧은 절정이었다.


그러던 중 판데믹이 닥쳤다. 코로나가 싱가포르에 본격적으로 상륙한 것은 2020년 3월이다.


코로나와 함께 싱가포르 내에 반외국인 정서가 강화됐고, 자국민 일자리 챙기기가 최우선이 된 싱가포르 정부가 외국인의 취직을 훨씬 어렵게 만들어서 경력단절 외국인 여성이 다시 일을 시작하는 건 거의 불가능한 일이 되었다. 어차피 절실하게 취직을 하고 싶은 것도 아니었는데 차라리 좋은 핑계가 되었다.


작년 여름에 퍼스널 트레이닝(운동)을 시작했고 가을에는 치아교정(인비저라인)을 시작했다. 이 두 가지는 코로나 시기에 잘 시작한 것 같다. 집에서 홈트레이닝을 하는 사람들도 많지만 나는 누군가 억지로 시키는 게 아니면 시간을 내어 운동에 집중하기가 매우 어렵다. 나는 왜 이렇게 의지가 약해서 돈을 내며 운동해야 하는가 마음 한구석이 찔리기도 하지만, 돈을 내는 이유는 운동 자체보다도 그래야 잠시라도 집 밖에 나가 가족에 대해서는 완전히 신경을 끄고 다른 일에 집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인비저라인은 코로나 덕분에 수월하게 하고 있다. 인비저라인의 성패는 하루 20시간, 못해도 18시간 이상 투명한 교정장치를 끼고 있는 의지력인데, 나는 나가서 운동하는 의지력은 별로 없지만 불편한 교정장치를 끼고 버티는 의지력은 꽤 있다. 음식을 먹을 때는 교정장치를 빼야 하는데, 코로나 때문에 사람을 만나 대화하며 식사하는 일이 대폭 줄어드니 교정기를 오래 끼고 있기가 쉽다. 아무 일도 하지 않은 것 같은 날들 속에서, 한 주 한 주 새 교정기를 바꿔 낄 때는 그래도 내가 어떤 것을 꾸준히 하고 있구나 하는 느낌이 들어서 위안이 된다.


운동이랑 교정만큼 꾸준히 한 건 아니지만, 싱가포르에 온 이후로 불어공부도 하다 말다를 반복했다. 외국어는 적극적으로 정신집중을 해야 하는 활동이라서 아이들이 학교에 다니는 기간에만 공부했다. 그러나 다른 것도 아니고 언어인데 하다 말다 해서는 남는 게 없는 것 같아서, 프랑스어 자격시험을 신청해 두고 3개월 동안 그걸 목표로 공부했다. 다행히 B1 레벨은 만점에 가까운 성적으로, 그보다 하나 위인 B2 레벨은 합격선을 조금 넘는 성적으로 둘 다 합격했다. B2 레벨을 합격했으니, 아이들이 개학하면 그 다음 레벨인 C1 과정으로 반을 올려서 불어학원에 돌아갈 생각이다.


시작했지만 제대로 유지를 못한 것도 있다. 싱가포르의 역사와 문화를 공부하고 비슷한 관심사를 공유한 사람들을 만나려고 시작했던 박물관 도슨트 프로그램은 빡빡했던 4개월 과정을 수료하고 자격증까지 땄지만, 우리 기가 수료한 직후에 코로나가 덮치는 바람에 그 이후로 지금까지 전혀 실전 가이드 경험을 쌓지 못하고 있다. 실전 경험이 없어도 계속해서 온라인 강의를 들으며 포인트를 쌓고 자격증을 유지할 수 있지만, 벌써 일 년 넘게 시간이 흐르니 이젠 더 이상 흥미가 없어져 버렸다.


마지막으로 건드려 본 건 플룻이다. 어렸을 때 배우다 만 악기라서 시작하기 조금 쉽지 않을까 하고 플룻을 시작했는데, 여전히 쉽지 않다. 3-4개월 열심히 연습해서 올 여름 한국에 가서 아빠 생신에 좋아하시는 노래를 연주해 드릴 계획이었는데, 갑자기 코로나 상황이 나빠져 싱가포르 정부가 국경을 닫는 바람에 한국에 가지 못하게 됐고 플룻을 연습할 의욕도 사라졌다. 방학 동안 내 에너지는 아이들 피아노연습 시키는 데 다 썼다. 이건 내년 여름을 기약해야겠다. 아이들이 개학하면 다시 레슨을 시작해야지.


이렇게 돌아보니 나도 판데믹 시대에 집에 오래 있게 된 사람들이 한 번씩 해보는 것들을 다 해보는구나. 외국어, 운동, 글쓰기(브런치를 시작했다). 하나하나는 개인적으로 공들인 선택이었는데, 멀리서 보니 누구나 한 번씩 거쳐가는 메뉴들이다.


두 번의 여름방학 동안 아무 데도 가지 않고 집에 있는 아이들을 전담하면서, 내가 곧 가정이 되어버렸다. 내 몸과 정신에서 아이들 또는 가정을 분리할 수가 없다. 아이들과 떨어져 있었거나 나 혼자 집을 비운 시간도 몇 시간 되지 않는다. 여기 올 때 내가 기대헀던 싱가포르 생활은 이런 것은 아니었는데, 그렇게 되었다. 책임감을 다해 가정을 관리하고, 내 몸을 유지보수하는 데 돈을 쓰고, 정신을 단련하기 위해 이런저런 배움을 시도하며 2년을 보냈다.


남은 1년은 어떻게 지내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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