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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니스푼 Jul 17. 2021

파파로티, 그리고 라켓소년단

여름날 아이들과 함께 보는 성장드라마

넷플릭스에서 발견한 이제훈, 한석규 주연의 <파파로티>라는 영화를 사흘째 반복해서 보고 있다. 이제훈은 천부적인 목소리를 갖고 있는 깡패 고등학생, 한석규는 실패한 성악가 출신의 음악선생님이다. 둘이 만나고, 선생님이 학생의 재능을 알아보고, 그래서 학생은 성악가로 성공하는 평범한 스토리인데 이상하게 잡아끄는 힘이 있어 매일  시간씩 주요 장면들을 보고  보는 중이다.


일단 이제훈 배우가 반짝반짝 빛이 난다. 그런데 이제훈 배우를 빛나게 만드는 사람이 한석규 배우다. 두 사람이 같이 등장해서 주고받는 연기가 너무 생생해서 눈길을 뗄 수가 없었다.


한석규 배우가 아닌 다른 사람이 음악선생님을 연기했어도 내가 같은 정도로 이 영화에 빠져들었을까?


나는 90년대 시네키드였다. 짧은   동안 한석규 배우는 한국영화  자체였다.   후에 나는 한국을 떠났고  후로는 그가 연기하는 것을 거의 보지 못했다.  시절 빛나던 한석규 배우가 이제는 수그러진 중년이 되어 다른 사람을 빛나게 하는  눈부셔서, 나는 어디까지가 현실이고 어디서부터가 영화인지 모른   속에 빠져들었다.


천부적인 재능의 이야기는 언제나 마음을 잡아끈다. 영화  사랑 이야기만큼이나 비현실적인 것이 영화  재능의 이야기다. 살면서 그런 재능을 발견한 적이 없다. 내가 안목이 없어서 그렇기도 하겠지만, 이렇게 순도 높은 재능은 영화 속에만 있는 것이려니 한다.




<스윙걸즈>라는 일본 영화가 있었다. 공부도 못하고 다른 것도 잘하는 게 없는 여고생들이 우연히 - 사실은 음악경연대회 출전을 앞둔 밴드부 단원들에게 도시락을 가져다 줘야 했는데 한여름에 얼른 도시락을 가져다 주지 않고 중간에 딴 길로 새서 놀다가 도시락이 상했고, 그걸 먹은 밴드부원들은 식중독에 걸려 어쩔 수 없이 - 밴드부에 들어가서 음악의 즐거움을 발견하는 이야기다.


15년 전에 그 영화를 보고 이런 감상문을 썼다.


소녀들은 악기를 연주하면서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는데 잘 노는 사람과 못 노는 사람'이라는 것을 배운다. 공부는 남과 싸우는 일이었지만, 연주는 자신과 싸우는 일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동아일보 영화평)

당장이라도 달려가 악기 하나 배우고 싶어지게 만드는 영화다. 평소 나는 부모는 자식이 싫어하는 것을 억지로 하도록 강요하지 않는 게 좋다고 생각하지만, 악기만은 예외다. 악기 연주의  즐거움을 제대로 알려면 어느 수준 이상의 지겨운 훈련이 반복되어야 하기에, 그리고 그렇게 익힌 기술은 평생 가는 것이므로, 다른 건 몰라도 악기 한 가지 정도는 당근과 채찍을 번갈아가며 어릴 때부터 익혀주어야겠다는 생각이다.
  
그렇게 배운 나도 지금은 잘 못한다. 회사 옆자리 선배는 어렸을 때 엄마가 그랜드 피아노에 방음장치까지 해주셨다고 하는데 그 피아노는 이제 어디에? 결국 제일 중요한 건 재능과 자유의지.


딸에게 악기를 가르치면서  영화가 종종 떠올랐다. 나는  힘으로는 아이에게 악기 연주의 즐거움을 가르치지 못했다. 아이에게는 재능도 자유의지도 보이지 않았고, 그걸 거스를 정도로 내가 정성을 들이지도 않았다. 성과에 관계없이 여럿이 모여 악기를 연습하며 느끼는 즐거움이라도 보여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여러 스트리밍 사이트를 뒤져 봤지만, 해외에서는  영화를 찾을  없었다.

  



올 여름, 넷플릭스에서 <라켓소년단>이라는 드라마를 아이들과 함께 보게 되었다. 이걸 보면서, 아 이젠 더이상 <스윙걸스>를 찾지 않아도 되겠다, 하는 생각이 들었다.


비인기종목 운동, 지원이 부족한 시골 학교, 뛰어나지 않은 선수들, 친구들과의 팀웍, 무엇보다도 챔피언이 되기 위해 운동하지 않는 헐렁한 마음자세까지 내가 <스윙걸스>에서 반했던 모든 것이 여기에 다 있었다.


영화 속에서 나는 언제나 재능보다는 성장에 마음이 끌렸다. 재능에 승부를 거는 모습은 감동적이지만 너무 비현실적이니까. 자식을 키우면서 나는 꽃피는 재능보다 꾸준한 성장을 목격하고 싶었다. 공부를 잘하라는 것도 아니고 음악이나 운동에서 뛰어나라는 것도 아니니, 다만 꾸준히 어제보다 오늘이  나아지는 모습을 보길 바랐다.


그런데 막상 자식을 키우면서 보니, 그렇게 눈에 보이는 성장이 바로 판타지였다. 아이들은  줄로 그은 그래프처럼 성장하지 않았다. 재미있으면 하고, 재미없으면 별로 하고 싶어하지 않았다. 친구랑 같이 하면 재미있어 하고, 혼자 하면 재미없어 했다. 어느  분야에 열정이나 재능을 보이는  같아서 ' 저거 밀어줘야겠다' 하고 부모가 마음먹으면, 다음 순간 흐지부지 부모를 실망시키곤 했다. <라켓소년단> 배드민턴 단원들이 그런 아이들이다. 친구들이랑 같이 하고 싶어서 배드민턴을 치고, 훈련이 너무 힘들다 싶으면 땡땡이를 친다. 막상 배드민턴을  때는 진심이지만, 어떤 거창한 목표를 위해 배드민턴을 하는 것은 아니다.


부모가   있는 일은 그냥 뒤에 있기만 하는 것이다. <라켓소년단> 보면서 깨닫는다. 아이들에게서 성공이 아닌 성장을 보고 싶다는 마음도 내려놓아야 한다는 것을. 순도 높은 재능만큼이나 차곡차곡 일어나는 성장도 영화  이야기라는 것을. 아이들은 이기기 위해 운동하지 않는 것처럼, 성장하기 위해 자라지도 않는다. 그리고 열두  넘은 아이들의 성장은 부모 아닌 다른 사람들을 통해서 일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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