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보훈 작가의 다음 작품을 벌써 기다린다.
아이들이랑 하루 한 편씩 드라마 <라켓소년단>을 보고 있다. 라켓을 사다가 아이들과 함께 배드민턴도 치기 시작했다. 우리 가족이 배드민턴을 시작했다고 하니까, 아래층에 사는 애들 친구 엄마가 자기 아들 배드민턴 코치를 소개해 주겠다고 한다. 리우올림픽에 출전했던 싱가포르 국가대표 출신이란다. 아니, 괜찮아요. 우리 배드민턴은 대충 하는 게 목적이거든요.
어쩐지 마음에 위안이 되고 힘이 나는 드라마다 싶었는데, <슬기로운 감빵생활>을 집필했던 작가가 <라켓소년단>도 썼다고 한다. 처음 듣는 이름이었다. 정보훈 작가라고.
2년 전 이맘 때, 싱가포르에 처음 왔을 때 한 달 동안 서비스 아파트에 묵었다. 남편은 매일 출근했고, 나랑 아이들은 할 일이 없었다. 온갖 대형 쇼핑몰에 걸어서 갈 수 있는 위치였으니 여행객이 묵기에는 최적이었다. 그런데 여행이 아니라 살러 온 건데 아침이면 출근할 직장도, 애들이 다닐 학교도, 돌보아야 할 집도 없는 상황이 얼마나 막막하던지. 지금이야 코로나 때문에 무기력도 정당화되지만, 그 때는 모두 바쁜데 나만 시간을 죽이고 있다는 무료함과 조바심을 견디기 힘들었다.
조바심을 달래는 데는 집중할 거리가 특효약. 나는 그 때 <슬기로운 감빵생활>을 보면서 모든 불안을 잊었다. 훌륭한 실력과 훌륭한 인품을 가진 사람이 비록 감옥 안에서도 좋은 사람들을 만나 꼬인 인생을 자기 손으로 풀어가는 이야기. 울고 웃으며 매일 2-3회씩 봤다. 작년 여름 코로나 때문에 첫 락다운을 겪을 때 다시 한 번 돌려봤다. 이런 걸 인생드라마라고 하는지 모르겠지만, 잊을 수 없는 드라마인 건 확실하다.
딸과 함께 <슬기로운 의사생활>을 먼저 보고 있었는데, <라켓소년단>에 집중하느라 <슬기로운 의사생활>이 밀려났다. 의사생활을 매우 좋아하고 높이 평가하는 사람들도 많다는 걸 알고, 내가 좋아하는 것을 정당화하느라 다른 것을 깎아내리고 싶지도 않다. 그렇지만 라켓소년단의 어떤 점이 내게 더 와닿아서 의사생활을 밀어냈는지를 보면 내 취향이 드러난다.
1. 병원보다 운동
나는 병원드라마를 잘 보지 않는다. 좋아하거나 좋아하지 않는 것에 이유는 없겠지만, 그래도 따져보면 사람이 죽고 사는 문제를 짧은 에피소드로 바꾼 것에 재미를 못 느낀다. 신도 아닌 병원의 의사들이 환자의 운명을 관장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실력과 인성을 갖춘 의사들이 헌신적으로 병을 고치는 판타지는 착각을 넘어 유해하다고까지 생각한다. 물론 드라마에 나오는 운동선수들의 성실한 연습과 끈끈한 팀웍도 판타지일 수 있는데, 의사 판타지에는 마음이 안 움직이고 운동 판타지에 끌리는 건 어쩔 수 없다.
2. 향수보다 성장
<슬기로운 의사생활>은 종합선물세트처럼 다양한 매력포인트를 담고 있어서 사람마다 반응하는 지점이 다르겠지만, 그 중 하나는 99학번 친구들이 모여 밴드 연습을 하며 부르는 그 시절 노래들이다. 같은 PD가 연출했던 응답하라 시리즈는 더 노골적으로 그 시절의 분위기와 히트곡을 재현해서 향수를 자극했는데, 나는 그 부분에 무감동하다. 과거에 대한 향수보다는 미래를 향한 성장 테마에 마음이 끌린다. 교훈을 얻자고 드라마를 보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성장하는 캐릭터들을 볼 때 기분이 좋아지고 의욕이 난다.
3. 수많은 등장인물들의 사연
이렇게 정리하며 생각해 보니 <슬기로운 감빵생활>과 <라켓소년단>은 내게는 참 좋은 드라마다. 의사생활은 주인공도 너무 여럿이고 수많은 환자들의 스쳐가는 사연들이 다 너무 뻔하고 단순해서, 회차가 거듭될수록 정신없는 만화경을 보는 느낌이다. 감빵생활과 라켓소년단도 주인공에 조연들까지 등장인물도 많고 사연도 많지만, 그래도 그 사연이 한명한명 더 와닿게 느껴지는 건 아마도 정보훈 작가의 힘이겠다.
4. 환상의 공간
그리고 판타지. 율제병원이 미화된 것 만큼이나 감옥이나 농촌생활도 드라마 속에서 미화된 것은 마찬가지다. 그렇지만 많은 사람들이 살면서 한두 번씩은 엮이게 되는 대형 종합병원에 대한 미화는 기만의 느낌이 드는데 비해, 감옥이나 농촌은 어차피 상상 속의 공간이다 보니 미화되었다는 걸 알면서도 너그럽게 판타지로 남겨둘 수 있는 것 같다.
5. 누가 주인공인가
마지막으로 권위의 문제. 결국 병원은 의사들의 공간이고, 의사 주인공들 밑에 전공의와 간호사, 그리고 그 밑에 자리한 수많은 환자들이 주인공들을 멋있게 해 주는 도구로 쓰이는 것이 마음에 안 든다. 그에 비해 <라켓소년단>은 결국 아이들의 이야기다. 아이들과 함께 어른들 또한 성장하지만, 어른들은 아이들 위에 있는 존재가 아니다. 어른들은 아이들 옆에 서서 그들이 자랄 수 있는 안전한 공간을 만들어 주는 역할을 다할 뿐. 어쩌면 이런 성장스토리야말로 진정한 판타지일 것이다. 그래도 이건 내게 의욕을 주고 나를 돌아보게 만들어 주는 판타지라서, 그래서 좋아한다.
정보훈 작가가 회사라면 주식을 사야 할 것 같다. 그의 다음 작품을 벌써 기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