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 잘하는 아이를 위해 읽는 육아서
트위터에서 <영리한 아이가 위험하다>라는 책에 대한 추천글을 보고 영어 원본을 주문해서 읽고 있다. 원제는 <Smart Parenting for Smart Kids>.
아이들은 모두 고유한 방법으로 영리할 수 있지만, 이 책에서 영리한 아이란 학업성적 A나 B를 쉽게 받을 수 있는 아이를 의미한다. 그런 면에서 내가 영리한 아이였고 우리 둘째가 영리한 아이인데, 어른이 되어 자식을 키우며 돌아보니 어려서부터 쉽게 공부를 잘하는 아이들은 바로 그 영리함 때문에 빠지기 쉬운 함정이 많다. 머리는 좋은데 게으르다, 끈기가 부족하다, 또는 공부는 잘하는데 사회성이 부족하다 등이 대표적인 예다.
나는 영리한 아이들이 걸리는 가장 큰 덫은 "잘해야 한다는 부담"이라고 생각한다. 영리한 아이들에 대한 주변의 기대치는 아기 때부터 높게 설정된다. 초등학교 저학년 무렵에는 이미 똑똑한 아이로 부모님과 선생님의 인정을 받고 있다. 속한 문화권이나 가정 분위기 등에 따라 조금씩 다를 수는 있지만, 영리한 아이들은 기억할 수 있는 인생의 거의 처음부터 본인의 성취 여부를 끊임없이 의식하면서 살아간다. 이들에게는 공부를 잘하는 건 당연한 일이고, 언제나 계속해서 더 잘해야 한다는 부담이 있다.
그 부담감 속에서 영리한 아이들은 남을 실망시킬까 걱정하고 실패할까 두려워하게 된다. 너는 똑똑하니까 잘해야 한다는 남들의 기대치는 어느새 내면의 목소리가 된다. 그로 인해 실제 성취도가 더 낮아지는 경우도 많고, 성취도가 높으면 높은 대로 낮으면 낮은 대로 겪게 되는 괴로움이 있다. 이 책에서는 이렇게 요약했다.
자라면서 여러 가지 어려움을 겪는 것은 모든 아이들이 마찬가지지만, 영리한 아이들은 성취도에 대한 부담 때문에 정상적인 발달과제가 가려지거나 방해받을 수 있다는 게 문제다. 이 책에서는 다음과 같은 일곱 가지 발달영역에서 영리한 아이들이 겪게 되는 근본적인 어려움을 살펴본다.
1. 완벽주의 길들이기
2. 인간관계 맺기
3. 예민함을 다스리기
4. 협동 및 경쟁에 임하기
5. 권위를 상대하기
6. 동기부여하기
7. 즐거움을 찾기
<Smart Parenting for Smart Kids>, Page 5-6
저자들은 초등생 부모를 대상으로 이 책을 썼다. 만 6세는 넘어야 본격적으로 사회적 정서적 기술을 계발할 수 있고, 만 12세가 넘으면 더 이상 부모의 가르침이 쉬이 통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영리한 아이를 둔 부모라면 본인 또한 영리한 아이였을 가능성이 많다. 그렇다면 부모 역시 위에 언급한 영역 중 어느 부분에서 어려움을 겪었을 것이다. 어쩌면 아직도 그 부분을 완전히 해소하지 못했을 수 있다.
그래서 이 책은 내게 필요한 책이었다. 어려서부터 공부를 쉽게 잘하는 둘째를 보면서 느낀 대견함과 두려움이 있다. 내게 있던 모습을 아이에게서 보면 반가우면서도 내가 겪은 어려움을 반복할까봐 걱정스러웠고, 아이가 감정관리나 친구관리에서 미숙한 모습을 보이면 그것 또한 과하게 걱정이 됐다. 머리 좋은 아이라는 선입견 때문에 혹시 자만할까봐 때로는 아이를 더 엄격한 잣대로 바라보기도 한다.
책을 절반 정도 읽었는데 크게 깨달은 것이 있다.
초등학교와 중학교 시절을 회상할 때 내게 가장 먼저 떠오르는 핵심기억들은 주로 성취에 관련되어 있다. 학교에서 잘했을 때와 못했을 때. 잘해야만 나를 증명해 보일 수 있었고 못하면 주변 어른들을 실망시켰다. 초중등 내내 친구관계도 무난했고 반장도 여러 번 했는데도 어쩐지 친구들과의 기억은 희미하다.
한 학기에 두 번씩 시험을 보고 성적은 고스란히 공개되었다. 초등학교, 그리고 중학교 내내 나는 반에서 1등을 놓치면 안 되는 아이였다. 내가 욕심이 많아서가 아니라 부모님과 선생님에게 그런 취급을 받았다. "너는 똑똑하니까, 네가 최선을 다 한다면 너는 1등을 할 거야." 1등을 놓치면 이런 야단을 맞았다. "네가 1등을 못해서 이러는 게 아니다. 네가 최선을 다하지 않았기 때문에 야단치는 거야."
어쩜 그렇게 모든 중요한 기억이 '우리의 즐거웠던 순간'이 아니라 '내가 잘했던 순간'에 집중되어 있는지.
고등학교 때는 외고에 진학했다. 그 때부터는 더 이상 반에서 1등을 노릴 수가 없었다. 빡빡했던 학교생활이었다. 잠을 많이 못 잤고 공부 외의 것에는 신경쓸 수 없었다. 그 시절에 대해 기억나는 것도 많지 않다. 그런데 섬광처럼 번뜩이는 고등학교 시절의 몇몇 핵심기억들은 오히려 친구들과의 것이다. 그곳에서 나는 더 이상 제일 똑똑한 아이가 아니었으니까. 더 이상 1등에 대한 기대와 남들보다 잘해야 한다는 부담이 사라지고 난 빈 자리에 친구들이 들어온 것은 아닐까?
(코치) 근데, 중학교 때도 성공이란 게 있나?
(의사) 당연히 있지. 그땐 진짜 친구가 누군지만 알아도 성공이야. 뭐가 더 있겠냐?
<라켓소년단> 10화 중에서
첫째는 중학생인데 뭘 하더라도 성취에 대한 욕심이랄까 그런 것이 없고 적당히 숙제를 마치고 나면 언제나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찾아 심심하지 않게 놀 궁리만 한다. 어디에서도 친구들을 만들어 재미있는 일을 꾸미는 데 앞장선다. 이 책을 읽으면서 첫째를 보니, 우리 아이가 너무 보통이고 정상적으로 발달과제를 수행하고 있는 것 같아서 다행이다. 아이의 성취에 대해 딱히 우리가 앞서서 기대할 일이 없다 보니, 이 아이에게는 본인이 하는 만큼이 기준이 된다.
둘째는 나이도 그렇고 아이의 성향도, 내가 이 책을 읽는 게 도움이 많이 될 것 같다. 각각의 단원을 읽으니 실제 상황에 이렇게 활용하면 좋겠다 싶은 구체적인 방법도 많고, "이런 부분을 가만히 놔둬도 괜찮은 걸까?" 싶은 행동이나 성향에 대해서 명쾌한 해석과 부모가 취해야 할 올바른 입장을 알려 준다. 무엇보다도, 이 책은 머리가 좋은 아이들을 성격도 원만하게 만들어서 모든 것을 다 잘하는 수퍼키즈(superkids)로 키우고자 하지 않는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나는 아이의 잠재력을 의식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똑똑한 아이일수록 아이의 이른 성취, 또는 성취의 이른 싹은 부모의 머릿속에 잠재력이라는 새를 훨훨 날게 한다. 그 새가 발목에 끈을 달고 앞서 날아가서 나를 조이고 아이를 조이지 않도록, 초등학교 시절 아이의 학업성취도에 대한 관심은 의도적으로 끊기로 했다. 똑똑하고 공부를 잘한다는 죄로 아이에게 더 높은 기대치를 지우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