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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니스푼 Sep 21. 2021

인생은 힘들어요

9살 아이와 이야기하는 삶의 어두운 부분

아이들은 7시 전에 스쿨버스를 타고 4시가 넘어 집에 돌아온다. 직장인의 출퇴근에 맞먹는 고된 등하교 일정이다. 둘째는 5시에 주짓수 클래스가 시작이라 집에 도착하자마자 얼른 간식을 먹고 4시 반에는 집을 나서야 한다. 일주일에 두 번 가는데, 피곤해서인지 아이는 거의 50%의 확률로 짜증을 낸다.


그 날도 그런 날이었다. 집에서 제대로 쉴 시간도 없다고 짜증내는 아이를 어르고 달래서 택시에 태웠다. 뒷자리에 나란히 앉아서 가는데 아이가 불쑥 이야기한다.


"Life is hard." (여기서부터는 한국말로 옮긴다.)

"네 말이 맞다. 인생은 힘들어."

"그리고 인생은 슬프고."

"그렇지. 인생은 힘들고 슬퍼. 고타마 싯다르타라는 사람이 있어. 그 사람은 인도의 왕자로 태어났는데, 부족한 게 없던 그 왕자에게도 인생은 힘들고...."

"알아요 알아, 그래서 집을 나가서 수련을 하다가 부처가 되었답니다."

".... 아, 아는구나?"


"그렇지만 부자고, 좋은 부모님이 있고, 친구들이 많은 사람은 인생이 힘들지 않을 거야."

"무슨 소리야? 부자고, 좋은 부모님이 있고, 친구들이 많은 사람도 인생은 힘들어. 그리고 너 네 이야기하는 거니? 부자고, 좋은 부모님이 있고, 친구들이 많은 건 너잖아."

"......... 그런가?"

"네가 부자 같지 않다고 생각하겠지만, 우린 굉장히 부유한 거야. 우리가 우리 주변 사람들만 봐서 잘 몰라서 그래. 너는 아직 세상에 우리보다 가난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돈이 부족해서 힘든 사람들이 어떻게 사는지 잘 모르잖아."

"........."


"데이지네 아이들을 생각해 봐. 데이지는 아들이 셋 있는데 막내가 이제 초등학교를 졸업했거든. 그런데 십 년 전부터 데이지는 싱가폴에 와서 헬퍼로 일하고 있어. 걔네들 아빠는 아이들이 더 어렸을 때 어딘가로 가버렸어. 데이지네 나라는 가난해서 일자리가 별로 없고 일을 해도 돈을 거의 못 벌어. 그래서 데이지는 아이들을 두고 우리집에 와서 일하고 있는 거야. 그 집 아이들은 삼 년 동안 엄마를 못 봤어."

"그럼 아이들은 누구랑 살아요?"

"데이지네 엄마가 돌봐준대. 그런데 옆집에는 데이지 동생네 아이들이 셋 있어서 할머니는 그 집에서 산대. 그 집 아이들이 더 어리거든. 제일 어린 아이는 두 살이래. 데이지 동생도 싱가폴에 와서 일하고 있대."


"엄마, 데이지는 (해리 포터에 나오는) 집요정 같아요."

".........?"

"물론 우리 집에서는 잘 대해 주지만, 그래도 집요정 같아요."

"그래, 정말 정확한 비유구나. 네 말이 딱 맞는 것 같다."


최근에 해리 포터 시리즈를 아이와 함께 읽고 있다. 2권에 집요정 도비가 나왔고, 다시 4 앞부분에 윙키라는 집요정이 잠시 나오는데 거기서 묘사된 집요정의 신분이 정말로 싱가폴에서 헬퍼의 지위 다.


집안일을 대신하기 위해  집에 있는 도 그렇고 얼마나 마음이 좋은 고용주 가족을 만나느냐에 따라 생활이 달라지는 것도 그렇지만, 4권에서 윙키의 말에 따르면 집요정 신분에서 해방된 도비는 이전보다  나쁜 상황이 됐다고 한다. 도비는 이제 자유인으로 일해서 돈을 벌고 싶어하는데, 집요정 노릇을 하지 않고서는 아무데서도 일을   없다는 것이다. 아이는  모르고  말이겠지만, 그게 바로 싱가폴의 헬퍼와 가장 비슷했다. 헬퍼 일을 그만두면 그들은 일주일 이내에 싱가폴을 떠나야 한다. 다른 일을 해서 돈을  수는 없다.


"아까 네가 말한 것 말이다, 부유하고 좋은 부모님이 있고 친구들이 많으면... 그런 건 운이 좋다고 한단다. 어떤 사람들은 운이 좋아. 나는 내가 운이 좋다고 생각해. 엄마는 너도 운이 좋다고 생각해. 그런데 운이 좋아도 인생은 힘들단다. 누구에게나 다 그래. 네가 벌써 그걸 알다니, 엄마는 참 신기하다. 너 혹시.... 이 다음에 작가가 되는 건 어때?"

"아아악..... 글 쓰는 건 싫어요!!"

"아, 그래. 지금 작가가 될 필요는 없어. 그런데 엄마가 보기엔 너 작가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피곤해서 운동하러 가기 싫다는 투정이 인생이 힘들다는 불평으로 이어졌다. 아이는 몰랐겠지만, 우리의 대화는 인생의 비밀을 살짝 건드릴 만큼 깊었다. 십여 분 만에 택시는 주짓수 도장에 도착했고, 아이는 친구들과 땀흘리고 뛰어다니면서 힘들고 슬픈 인생을 잊었다. 나는 가만히 앉아서, 집요정(house-elf)이라는 단어가 house-help랑 비슷하게 들리는 건 조앤 롤링이 의도한 것이었을까 궁금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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