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년 만에 처음으로 혼자서
나는 스물 아홉 번째 생일 다음날 결혼을 하고 한국을 떠났다.
일 년 후 처음으로 한국에 돌아갔을 때는 하고 싶은 게 정말 많았다. 친구도 만나고, 영화도 보고, 광화문 신촌 강남역 코엑스몰에 가고, 서점에 가고, 스타벅스에서 커피 마시면서 책도 읽고. 만날 사람도 너무 많아 점심 약속, 저녁 약속, 사이사이 커피 약속... 이 모든 일정을 몇 주 사이에 구겨넣으려고 빡빡한 계획을 세웠다.
그런데 막상 한국에 가니 모두가 나를 방해했다. 시가에서는 내가 남편과 함께 시가에 방문해서 최대한 오래 머물고 각종 가족 모임에 참석하며 가족의 일원이 되기를 원했다. 그럼 친정에 있는 동안에는 하고 싶은 것들을 맘껏 할 수 있느냐면 그렇지도 않았다. 엄마는 딱히 나를 붙들고 이런저런 일정을 잡지는 않았는데, 막상 내가 몇 시간 이상 외출하거나 특히 밤에 돌아오면 막 화를 냈다.
10여 년이 지난 후에 이렇게 회상하니까 별 게 아닌 것 같은데, 그때는 미칠 것 같았다. 친정엄마는 “결혼해서 철든 딸”에 대한 기대로 내가 친구 만나 밥 먹고 커피마시고 술마시고 영화보러 나다니는 것에 서운해했고, 시부모님은 며느리가 친정에만 있으려 한다고 노여워했다. 그러면 남편과의 싸움이 이어졌다. 보통 한 번 방문이 3주 동안이었는데 남편이랑 싸우고 엄마랑 싸우고 시부모랑 기싸움하면서 질리고 지쳐서, 다음엔 한국 안 올 거야 하고 씩씩거리며 미국으로 돌아가곤 했다.
그 때 내게 한국은 결혼 전의 인생이 있던 곳이었다. 한국에 방문하는 것은 단순히 공간의 이동이 아니라 시간을 건너 결혼 전의 나 자신으로 돌아가는 것에 최대한 가까웠다. 예쁘게 하고 나가 몇 시간이고 떠들 수 있는 내 사람들이 있는 곳. 남편의 퇴근도 저녁식사도 신경쓸 필요 없이 시간의 흐름을 잊고 돌아다닐 수 있는 곳. 그런데 막상 도착한 한국에선 결혼한 딸의 친정방문을 원했고, 시가에서는 평소에 다하지 못하는 며느리 도리를 원했으며, 미국생활이 이미 오래였던 남편은 한국에 온 목적은 부모님을 뵈는 게 아니냐며, 모두들 이기적인 나를 탓했다.
갈등이 수그러든 건 내가 첫째를 데리고 한국에 오면서였다. 15개월짜리 아기를 안고 한국에 온 나는 이미 변해 있었다. 아무리 엄마가 봐주신다 해도 아기를 두고 편히 외출할 수 없었다. 우리 엄마의 성격상 아기를 적당히 보지 못하고 무리하다가 지칠 게 뻔했고, 비록 외할머니라도 아기에게는 낯선 사람이었기 때문에 오랜 시간 자리를 비우고 싶지 않았다. 집에서 엄마랑 같이 아기를 보는 게 내 몸도 마음도 편했다.
시가 쪽도 마찬가지였다. "아기엄마"가 된 후로 갑자기 권력이 내게로 넘어왔다. 시부모님은 아기에게 힘들거나 내가 아기를 돌보기 불편할 상황은 최대한 피하려고 했고, 나는 마음편히 친정에 머무르며 시가 쪽 사람들을 만날 때는 시간과 장소를 내 위주, 아기 위주로 맞출 수 있었다. 가끔은 의견이 충돌했지만 남편이 언제나 아기와 아기엄마 위주로 할 것을 강력히 주장했기 때문에 마음고생을 안 했다.
물론 아기가 영원히 아기로 남아 있는 건 아니다. 하지만 아이들이 자랄수록 한국행은 더욱더 아이들 위주가 되어 갔다. 아이들이 안전하고 건강하게 시간을 보내고, 한국에서 할 수 있는 다양한 경험을 하고, 맛있는 음식을 먹고 즐거운 추억을 쌓을 수 있도록 모든 계획과 실행을 내가 진두지휘했으니까.
그렇게 십여 년이 지나면서 더 이상 서울에서는 개인 용무로 외출할 일이 많지 않게 되었다. 일단 만날 사람이 많이 남지 않았다. 비슷한 나이의 아이들을 키우는 여자친구들 몇 명만 내 곁에 남았다. 그리고 더 이상 갈 곳도 없어졌다. 빠르게 변화하는 서울의 트렌드를 더 이상 따라잡지 못하고 말 통하는 외국인이 되어버렸기 때문에, 친구들이 잡아주는 낯선 약속장소에 택시를 타고 도착하는 정도다.
그 대신 이젠 훌쩍 커버린 아이들을 데리고 우리 가족 넷이서, 또는 부모님도 함께 한국의 자연과 문화를 느낄 수 있는 이런저런 프로그램을 짜는 데 집중한다.
나라는 개인은 많이 사라졌지만, 대신 아무도 나더러 이기적이고 자기 하고 싶은 것만 하려 한다며 타박하지 않는다. 이젠 태평양이 아니라 은하수를 건넌대도 예전의 나를 다시 만날 수는 없다. 결혼을 하고 나니 모두들 내게 기대하는 역할이 있었고 나는 시공간을 건너와서까지 그 역할을 수행하고 싶은 마음이 없었으나, 엄마라는 역할은 예외였다. 한국 방문이라는 한정된 짧은 시간 중에 딸, 아내, 며느리 역할과 나 자신은 서로 불화했지만, 엄마 역할은 다른 모든 역할을 평정했다. 그 역할은 등껍질처럼 달라붙어 내게서 떨어지지 않았고, 내 부모와 남편과 시부모는 모두 그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는 나를 응원하고 보조했다.
내일 한국에 간다.
근 2년 동안 엄마아빠를 만나지 못했다. 온 가족이 겨울에 한국방문을 계획하고 있긴 하지만 혹시 그때가 되면 싱가포르가 다시 어떻게 국경을 통제할지 몰라서, 아이들 가을방학 동안에 혼자 얼른 다녀오려고 한다. 한국에서는 격리가 면제되어 일주일 동안 있을 예정이고, 싱가포르에 돌아와서는 호텔에서 일주일 동안 격리하게 된다.
한국을 혼자 가는 것도, 엄마아빠와 시간을 보내겠다는 것을 유일한 목표로 한국을 가는 것도 처음이다. 아이들을 두고 집을 2주씩이나 비우는 것도 그렇다. 아직도 한국행이 잘 실감이 나지 않는다.
아이들을 동반하지 않는 여행인데도 단 한 명의 친구와도 약속을 잡지 않았다. 물론 코로나 때문이기도 하지만 짧은 시간 엄마아빠에게 집중하기 위해서 그렇다. 이젠 한국에 가도 그리운 과거의 나는 없다. 오랫동안 내 등에서 떨어질 줄 몰랐던 엄마 역할도 어느새 잠시 떼어놓을 수 있게 되었다. 대신에 이번에는 딸 역할이라는 모자를 쓰고 간다.
다시 한 번 역할이 바뀌면서 이번 한국행은 과연 어떤 기억으로 남게 될까? 언제나 한국행은 아이들과 함께였기에, 준비하는 분주함과 여행의 흥분, 그리고 아이들을 데리고 비행기를 탄다는 긴장감이 있었다. 그 모든 에너지가 사라진 자리는 휑하게 비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