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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니스푼 Jan 21. 2022

발레를 시작했다

이번에는 아이가 아니고 나

싱가포르 생활이 올 여름이면 3년을 채운다. 정해진 임기가 있는 건 아니었지만 처음 올 때부터 회사 상황도 그렇고 아이들 상급학교 진학도 감안하여 한 3년, 길어도 4년을 넘기지 않고 미국으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물론 싱가포르가 너무 좋으면 아예 눌러앉을 가능성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여기 온 지 6개월만에 코로나가 닥쳐서 여러 가지 것들이 처음 예상과는 완전히 다르게 흘러가기는 했지만.


올해 학년을 마치면 미국으로 돌아가자! 고 잠정 결정했다. 여기 학교와 이웃 친구들에 완전히 적응한 아이들은 돌아가기 싫다고 아우성이다. 오미크론 변이로 미국이 쑥대밭이 되었다는 소식을 연초부터 전해 듣는 마음도 편치 않다. 그러면 잘 조정해서 일 년만 여기에 더 있어봐? 그런데 일 년이 지나면 그때는 뭐 뾰족하게 달라지나? 해야 하지만 두려운 일을 막연히 미루기만 하는 게 아닐까?


미국에 돌아가야 하나 싱가포르에 남아 있을까 고민을 거듭하던 중에 이런 생각이 들었다. 싱가포르에 오래 살다가 나 우울증에 걸릴지도 몰라. 어쩌면 이미 가벼운 우울증을 겪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직장을 안 다니니 회사일도 없고, 메이드가 있으니 집안일도 안 하고, 아이들이 많이 커서 손도 덜 간다. 배부른 소리 같아 쉽게 하기 어렵지만 무료하고 무기력하다. 싱가포르와 코로나의 조합이 특히 그렇다. 싱가포르가 무기력이 자라는 토양이라면 코로나는 무기력을 키우는 날씨 같달까.


여기를 떠나 미국에 돌아가면 당장 괜찮아질 것 같으냐 하면 그것도 아니니까, 싱가포르 탓만은 아니겠다. 취업해서 일하러 다니고 싶으냐 하면 꼭 그것도 아니고. 사실 머릿속에서는 이미 여러 가지 이유를 분석 끝냈는데, 분석만 있고 답이 없다.


국제학교 특성상 아이들이 일찍 집을 나가 학교에서 늦게 돌아오니까, 일종의 조기 빈둥지증후군 같기도 하다. 나는 MBTI로 치면 I와 E의 중간쯤이라 활발한 인간관계와 혼자만의 시간이 조화를 이루어야 행복한데, 외국생활과 결혼생활이 오래되면서 다양하고 활발한 인간관계를 많이 잃었고 그것도 한몫 하는 듯 하다. 피곤하면서도 무료하다.


작년  해는 이것저것 배움을 시도했다. 플룻, 불어, 개인 PT... 어영부영 읽은 책의 권수도 늘어났고 글도  봤는데  그때뿐이었다.  주변의 전업주부들 중에 활기차고 바쁘게 사는 사람들은 거의  골프에 빠져 있다. 여럿이 어울려서 (최소 4)  시간을 보내며, 밖에서 몸도 움직이고 같이 밥도 먹고, 그러면서 실력 느는 재미를 느낄  있는 종목으로는 골프만한 게 없는  같다. 그런데 내가  골프끌리지 않으니 말이다.


오늘 오전에 딸이 다니는 발레학원에서 성인발레 초보반 수업을 받아보았다. 난 발레는 커녕 춤이란 걸 제대로 춰본 적이 없는 사람이고 하다못해 발레에 대한 아무 로망도 없었는데, 플룻 배우다 보니까 자꾸 팔이 떨어져서, 아 내가 팔힘이 없지, 그런데 딸이 발레할 때는 내내 팔을 위로 들고 있는다고 했던 게 생각나서 충동적으로 발레학원에 연락을 했다.


플룻, 불어, 개인 PT는 전부 이전에 해본 적 있는 종목들이지만 발레는 난생 처음이다. 나랑은 너무나 거리도 먼 활동이고. 아무튼 시작했다. 이렇게 아이디어가 떠오르자마자 새로운 종목을 시작할 수 있다는 건 우울증이 아닌 것도 같다. 아니면 닥치는대로 이런저런 예체능에 손을 대는 게 바로 우울증의 몸부림인가?


작년 봄에 칠순 할아버지가 평생 꿈으로 간직하던 발레에 도전하는 드라마 <나빌레라> 봤는데 이렇게 엉겁결에 내가 발레 플랫을 신고 바를 잡은  거울 앞에 서게 되었다. 아무 기대 없이 시작했지만 혹시 모르는 일이다. 평소와 다른 방식으로 몸을 움직이는 것이 새로웠고, 무기력을 쫓아 없애기 위해서는 몸을 움직이는 , 새로운 것이라면 무엇이라도 해볼 만하다. , 어깨 내리고 허리 펴고 똑바로 앉아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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