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이 엄마의 변명
앞의 세 편의 글은, 열심히 읽은 책의 내용을 정성스럽게 썼으나 결국은 왜 내가 아이들 악기교육을 열심히 시키지 않았는지에 대한 변명이 되어버렸다.
나는 닥터 곽 부부나 추아 교수가 이야기하는 엄격한 악기연습의 순기능에 대해서는 동의하지만 그 과정에 발생할 수 있는 수많은 부작용이 더 두렵고 싫다. 그래서 아이들에게 악기레슨의 기회는 주어 봤지만 확신을 갖고 연습을 밀어붙이지 못했고, 우리 아이들은 실력도 그저 그렇고 딱히 흥미도 붙지 않은 채 3년 정도 피아노를 쳤다.
나는 유치원 때부터 초등학교 고학년이 될 때까지 피아노를 배웠다. 연습을 얼마나 오래 했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지만, 피아노 연습이라고 하면 한 시간을 채워야 하는 줄 알았으니 지금 우리 아이들보다는 훨씬 많이 했다. 잘 못하는 부분은 매일 열 번 스무 번씩 반복해야 했는데, 횟수를 못 채우거나 제대로 안 해왔을 때는 선생님이 소리를 지르며 자로 손등을 때리기도 했다. 요즘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엄마도 선생님도 엄격했고, 그 덕분인지 내 피아노 실력은 당장 비교해도 아이들보다 훨씬 낫다.
그렇지만 피아노를 좋아한 적은 거의 없었고 그만둔 후로 30년이 넘도록 한 번도 아쉬운 적이 없다. 마치 평생 칠 피아노를 그 때 다 친 듯 더 이상 미련이 없다. 피아노에 정이 떨어진 건지, 아예 정이 안 들은 건지는 잘 모르겠다. 피아노를 평생 취미로 삼을 만큼 잘 치려면 5-6년의 레슨으로도 부족한 것 같다.
아이들이 싫어해도 10년을 꾸준히 시키면 평생 가는 피아노 실력을 갖출 수 있을지도 모른다. 닥터 곽네와 추아 교수는 악기교육에 있어 '대학에 입학할 때까지 중도 포기는 없다'는 원칙이었다. 그런데 그때까지 아이들을 어르고 달래고 다그치고 싸워가며 악기연습을 시키고 싶지 않은 나는 슬그머니 피아노 레슨을 그만둘 핑계를 찾는다.
7학년인 첫째는 이제 다양한 본인의 관심사가 생기면서 피아노를 치기에는 흥미도 시간도 없어져 버렸다. 더 이상 내가 나서서 아이의 일상을 일일이 챙기지 않으니 피아노 연습을 강요할 수도 없다. 이 아이는 이렇게 피아노를 접는 게 옳은 것 같다. 작년에 <실패만 거듭한 악기 교육>이라는 글에서 썼듯이, 기회는 여러 번 주었는데 결국 본인이 물지 않은 것에 대해 연습을 엄격하게 시키지 않은 내 탓을 하고 싶지는 않다.
그런데 4학년인 둘째는 아직 잘 모르겠다. 피아노 선생님이 둘째를 작은 콩쿨에 내보내 보자고 하시는데, 아이가 전혀 연습할 마음이 없다. 콩쿨에 나가고 싶어하지도 않는다. 상을 받아오라는 마음은 없고 요즘같은 코로나 시대에 심사위원들 앞에서 연주하는 무대경험 한 번 가져봤으면 하는데, 이것도 내 욕심인 건지 혼란스럽다.
둘째는 작년에 ABRSM 피아노 급수 시험을 봤다. 그 때도 하기 싫어했는데, 조금이라도 꾸역꾸역 거의 매일 연습하다 보니 어느 순간 확 늘어 꽤 높은 점수로 시험을 통과했다. 이 기회에 자신감과 성취감, 연습의 가치 등을 느꼈으면 했는데, 아이는 시험용 동영상 촬영을 끝낸 그날로 다시 피아노에서 손을 떼었다.
이 아이는 뭘 잘 하고 나면 오히려 더 움츠러드는 것 같다. 다음 번엔 이만큼 잘 하지 못할까봐 오히려 다음 시도를 더 안 하려고 든다. 불확실한 도전의 욕심보다 확실한 실패의 두려움이 더 큰 아이다. 나이들면서 변할 수도 있겠지만 안 변하는 천성일지도 모른다. 이런 아이를 억지로라도 연습을 시켜야 하는 건지, 준비 없이 대충 콩쿨에 나가게 둬야 하는 건지, 아예 콩쿨에서 빼야 하는 건지 잘 모르겠다.
13살인 첫째의 악기교육에는 더 이상 내가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것이 별로 없다는 걸 인정하고 나니 큰 갈등 없이 피아노를 그만둘 수 있겠다. 그런데 둘째에 대해서는 아직도 무언가 성과를 거두어야 할 것 같은 부담감이 있다. 그렇지만 확실하고 빠른 성과를 위해 아이를 몰아붙이지는 못하겠고, 아직은 한계를 본 것도 아니니 그만둘 이유도 찾지 못했다. 아마 당분간은 연습 좀 하라는 힘없는 독촉만 하루 한 번씩 하면서, 아이가 급수 시험 때처럼 알아서 잘해 주기를 기대할 것 같다.
나는 확신에 찬 호랑이 엄마는 못되겠고, 생각이 복잡해서 고민만 많은 고양이 엄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