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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니스푼 Mar 29. 2022

싱가포르의 간략한 역사

국립박물관: 짧지만 잘 짜인 스토리텔링

싱가포르 생활이 재미없었던 또 하나의 이유는 이 나라가 까고 또 까도 다양한 매력이 나오는 양파같은 나라가 아니라 조금 파면 금세 매력의 바닥이 드러난다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매력의 밑천이 얕은 이유는 이 나라가 (1) 계절이 없고 (2) 영토가 작고 (3) 역사가 짧아서라고 생각한다.


싱가포르는 적도 근처의 나라라서 계절의 변화가 없다. 이 나라가 일 년 내내 여름이라는 건 잘 알려져 있지만 계절의 변화가 없다는 건 여름 그 이상이다. 태양의 각도가 변하지 않아서 일 년 내내 날씨가 똑같다. 매일 평균 기온이 같고, 해 뜨고 해 지는 시간이 일정하며, 눈에 보이는 자연의 변화가 없다. 과거에 있었던 일을 떠올릴 때 그 때가 과연 언제였는지 배경이 가물가물하다.


영토의 크기는 서울만하다. 차를 타고 25분이면 이 나라의 동쪽 끝 창이공항, 남쪽 끝 센토사 해변, 북쪽 끝 말레이시아 국경 어느 곳에라도 갈 수 있다. (서쪽은 동물원 넘어서는 안 가봤다.) 처음에는 그것도 매력이었다. 멀고 거창한 갈 곳이 없다 보니 어딜 가도 동네 유원지에 주말 나들이 가는 느낌이었고, 그 소박함이 좋았다. 문제는 코로나 때문에 3년 내내 이 밖을 벗어날 수 없었다는 것이다.


다른 나라의 짧은 역사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건 조금 조심스럽다. 반만 년의 긴 역사가 반드시 한국을 우월하게 만들지는 않는 것처럼 50여 년의 짧은 역사가 싱가포르를 열등하게 만드는 건 아니다. 짧은 역사에 이만큼의 경제발전과 개성있는 국가 캐릭터를 이루어 낸 것도 대단하고, 적은 역사적 자원을 최대한 활용하고 의미를 부여해서 보기 좋게 전시하는 것도 인상적이다.


싱가포르 국립박물관에서는 이 나라의 역사를 한 눈에 둘러볼 수 있는데, 내용이 복잡하지 않고 양도 부담스럽지 않아서 두 시간 정도면 꼼꼼히 관람할 수 있다. 누구라도 와! 할 만한 엄청난 유물은 없지만, 대신 매우 친절하게 구성되어 이 나라의 시작부터 발전까지의 과정을 잘 이해할 수 있도록 안내해 주는 게 장점이다.


싱가포르의 역사를 들여다보면 이 나라에는 세 번의 시작이 있다. 그리고 매번 그 시작을 만들어 낸 한 명의 영웅이 있다. 그 세 번의 시작을 처음부터가 아니라 가장 최근에서부터 거꾸로 짚어보겠다.


1. 싱가포르라는 나라는 1965년 8월 말레이시아로부터 분리 독립하면서 시작했다. 그래서 외국인들 중에는 말레이 반도의 맨 끝에 한 점으로 위치한 싱가포르가 원래부터 말레이시아의 일부였던 것으로 잘못 알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싱가포르가 말레이시아에 합병된 것은 1963년이다. 식민통치하던 영국이 떠나간 후 싱가포르는 너무 작고 약했기 때문에 스스로의 힘으로 나라를 구성하기 힘들어서 말레이시아의 일부로 연합 독립을 했다. 그런데 그 연합이 잘 되지 않아서 2년 만에 쫓겨나 ‘싱가포르’라는 이름의 주권국가로 다시 시작하게 된 것이다.


인구도 자원도 영토도 제대로 없이 말레이시아에서 쫓겨났지만 그 후 50여 년 싱가포르는 눈부신 발전을 거듭해서 오늘날의 위상을 갖게 되었다. 이를 가능하게 했던 인물은 바로 리콴유 전 총리. 그는 싱가포르 건국의 아버지이자 경제발전의 설계자였다. 말레이시아로부터 축출되던 날, 눈물을 흘리며 신생 조국을 지킬 것을 다짐하는 젊은 정치인 리콴유의 영상은 싱가포르 국립박물관에서 볼 수 있다.


2. 싱가포르라는 도시는 1819년 1월 영국에게 발견되면서 시작했다. 이미 포르투갈, 프랑스, 네덜란드가 차례로 진출한 동남아시아 지역에 뒤늦게 끼어든 영국은 상황을 타개할 전략적 요충지를 찾던 중이었다. 그 때 아직 빈 땅이었던 싱가포르를 눈여겨 본 사람이 바로 영국 동인도회사 직원이었던 스탬포드 래플스 경(Sir Stamford Raffles). 그는 싱가포르에 발을 디딘 지 사흘만에 지역 유지들과 협상하여 싱가포르 지배권을 따낸 후, 철저한 도시계획을 통해 이 작은 어촌 마을을 동남아시아 대표 중계무역항으로 키워 냈다.


래플스 경은 싱가포르의 잠재력을 알아보고 세계 무대에 데뷔시켰다. 비록 그가 여기에 체류했던 실제 시간은 다 합쳐 1년도 채 되지 않지만, 그가 고안해서 주도한 도시발전계획은 싱가포르 개발의 기본형으로 남아 아직도 여러 곳에서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200여 년이 지난 지금 싱가포르의 주요 거리, 지하철역, 학교, 병원, 호텔, 쇼핑몰 등에는 래플스라는 이름이 붙어 있어, 역사 속 그의 역할을 모르는 사람들도 싱가포르를 한 번 방문하면 그의 이름에는 익숙해질 것이다.


3. 싱가포르라는 이름은 13세기에 이 섬을 찾아온 전설 속의 왕자가 지었다. 인도네시아 팔렘방 지역의 왕자였던 상 닐라 우타마(Sang Nila Utama)가 이 지역을 항해하다가 당시에는 테마섹(Temasek)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던 지금의 싱가포르 섬을 발견했다고 한다. 그는 이 섬의 이름을 '싱가푸라(Singapura)'라고 짓고 왕국을 세워 정착했다. 몇 대를 넘기지 못하고 왕가는 말라카 지역으로 쫓겨났고 싱가포르 섬은 그 후로 영국인 래플스가 찾아올 때까지 몇백 년 동안 지배자 없는 땅으로 남아 있었다.


안타까운 점은 싱가푸라 왕조의 창시자로 알려진 상 닐라 우타마의 이야기가 어디까지 진실이고 어디서부터 신화인지 정확하게 알 수 없다는 것이다. 1819년 영국인들이 찾아오기 이전 싱가포르 초기 역사에 대한 기록은 미미하다. 싱가포르 국립박물관에 놓인 이 나라의 가장 오래된 유물은 '싱가포르의 돌(Singapore Stone)'인데, 10세기에서 14세기 사이의 언젠가 만들어진 큰 돌비석이 부서지고 남은 조각이다. 만들어진 연대도 정확히 알 수 없고, 여기 새겨진 글씨도 아무도 해독하지 못했다.


국립박물관에서 찾아볼 수 있는 이 나라의 두 번째 오래된 유물은 '말레이 연대기(Sejarah Melayu)'라고 불리는 말레이어 문헌이다. 15-16세기 사이에 최초로 작성된 이 문헌은 고대 동남아 해상국가들의 역사를 담고 있는데, 위에 소개한 상 닐라 우타마와 싱가푸라의 이야기가 처음으로 기록에 등장한 것이 바로 이 말레이 연대기다. 이 기록은 싱가포르만의 고유한 유물은 아니고, 지역의 역사 속에서 싱가포르의 존재가 공식적으로 처음 언급됐다는 데 그 의미가 있다.


싱가포르의 돌과 말레이 연대기를 제외하면 어떤 사람들이 이 땅에 정착해서 어떻게 살아갔는지에 대한 기록은 거의 없다. (그나마도 싱가포르의 돌에 기록된 내용은 해독 불가능하다.) 이렇게 싱가포르는 고대 및 중세 역사가 텅 빈 채로 시간을 뛰어넘어 19세기 초 근대 유럽의 식민지 개발 역사 속에 등장한다. 역사가 짧고 내용이 빈약하니 1819년 개항과 1965년 건국 이후의 이야기를 최대한 극적으로 가다듬고 의미를 부여하여 보란듯이 전시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싱가포르 국립박물관에서는 오늘날의 번영에서 시작해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 보잘것 없었던 작은 바닷가 마을이 비전을 가진 지도자를 통해 어떻게 고비고비 넘기며 지금의 모습으로 발전할 수 있었는지를 짧은 시간에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그래서 한 번 둘러보고 나면 이 나라 역사를 한 줄로 꿰어 이해한 듯 시원함을 느끼면서도, 두 번 세 번 방문하다 보면 어쩐지 자국의 개발 역사를 찬양하는 싱가포르 정부의 강력한 스토리텔링에 세뇌되는 듯한 찜찜함을 느끼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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