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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니스푼 Mar 31. 2022

싱가포르의 정체성 만들기

아시아문명박물관: 문명교류의 생생한 현장

1998년 인도네시아 어부들이 도자기를 잔뜩 실은 배의 잔해를 발견했다. 이 배는 중국 화물을 싣고 항해하던 9세기의 아랍 무역선이었고, 배와 함께 가라앉은 선원들은 아랍, 인도, 중국, 동남아시아 등 다양한 지역 출신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1, 200년 동안 고운 모래에 뒤덮여 잠들어 있던 수만 점의 유물은 동남아시아 고고학상 가장 중요한 발견 중 하나로, 동남아시아와 서아시아를 거쳐 중국과 아라비아 반도를 연결하는 해상무역이 기존에 알려진 것보다 큰 규모로 훨씬 오래되었다는 것을 증명했다.


싱가포르 정부는 거금을 들여 이 난파선과 유물 전체를 사들였다. "당나라 난파선(Tang Shipwreck)" 이라는 이름으로 전시된 중국산 금과 은제품, 6만여 점에 이르는 장사요 도자기, 녹색 월요청자와 형요백자, 그리고 중국과 아랍이 문화교류를 통해 서로 영향을 주고받았음을 보여주는 초기 청화백자 컬렉션 등은 싱가포르 아시아문명박물관(Asian Civilizations Museum)의 자랑거리다.


푸른 도자기 파도 위를 힘차게 항해하는 9세기 아랍 무역선의 모형


그런데 이 흥미로운 전시 앞에서 감탄하다 보면 이런 질문이 떠오른다. 왜 싱가포르 정부는 중국을 떠나 항해하다가 인도네시아 앞바다에서 가라앉은 아랍 배를 자기네가 전시하는가? 천 년 전부터 중계무역과 문화교류의 주요 통로로 동양과 서양, 동아시아와 서아시아를 "연결"하는 것이 이 나라의 정체성이었다는 것을 안팎으로 보이기 위해서이다.


물론 이 귀중한 보물이 예산부족으로 발굴이 지연되고 도굴꾼에게 약탈되기 전에 얼른 다듬어서 연구하고 전시할 의지와 능력을 갖고 있는 유일한 나라가 싱가포르이기도 했을 것이다.


전시안내 문구를 보면 그 주제와 의도가 선명하게 드러난다.


"Our key message is that Asia, like Singapore, has always been cross-cultural. Visitors will find that many objects are hybrid - configurations of "east-west" or "east-east" - just as Singaporeans are essentially mixed. No culture in Asia has ever existed in isolation."


(이 전시의 핵심 주제는 아시아에서는 언제나 문명의 혼합교류가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이 전시실의 많은 유물들은 동서양의 문화 또는 동양 각국의 문화가 섞인 혼종인데, 이는 바로 혼합문명을 자랑하는 싱가포르와 마찬가지입니다. 실제로 아시아의 그 어떤 문화도 완벽하게 고립된 형태로 존재한 적은 없습니다.)


"Our galleries are organized thematically rather than by geographical regions with an emphasis on networks and flows rather than borders and boundaries."


(우리 박물관의 전시들은 국경의 구획을 그어 지역별로 나누는 대신, 문명의 교류와 흐름에 중점을 두고 주제별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싱가포르는 세계사 속에서 '내가 누구입네' 하고 내세울 것이 마땅히 없다. 14세기 무렵에는 이미 이 지역에서 무역이 이루어졌을 거라고 여겨지지만 19세기 이전까지는 마땅한 증거기록이 없다. 인구의 74%가 중국인이지만 그들은 대부분 19-20세기에 남중국에서 대거 이주해 왔다. 그 대신 이 나라는 아시아문명박물관을 통해, 세계사 속에서 '우리가 어떤 역할을 했네'를 생동감 있게 보여준다.


국경을 그어 민족국가, 민족문화를 내세운다면 딱히 내보일 것이 없는 나라는 이런 식으로라도 창의적으로 세계사 속에서 자기 자리를 만들어간다는 것에 나는 깊은 감명을 받았다.


여기는 아니었지만 싱가포르 국립박물관을 구경하고 나서면서 우리 아빠가 이런 말을 하셨다. 이 나라는 왠지 마음에 안 든다고. 퓨전이라서 싫다고. 독립된 국경과 민족국가로서의 단일 언어, 단일 문화를 중요한 가치로 받아들이도록 교육받은 사람에게는, 이런 싱가포르 문화가 이질적이다 못해 거부감이 들 수도 있겠다 싶었다. 그러나 싫든 좋든, 아빠가 싱가포르 문화의 핵심을 빨리 이해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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