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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복순이 Sep 24. 2020

천천히 되감아 주세요

Be Kind Rewind / 미셸 공드리

 그 친구는  '젊고 예쁜 엄마를 둔 아이'로 인식이 되어 있었다. 친구의 엄마는 늘 고운 화장에, 화사한 옷차림이었다. 시골에서는 좀처럼 볼 수 없는 세련미가 있었다. 친구 역시 마찬가지였다. 매일 다른 옷을 입고, 다른 스타일로 머리를 묶고 왔다. 김희선의 구슬 머리끈이나 X자 실핀, 술이 잔뜩 달린 7부 팬츠나 머리에 뿌리는 컬러 스프레이. TV가 아닌 실제로 본 건 모두 그 아이를 통해서였다. 머리끝부터 발 끝까지 꾸미고 오는 그 아이에게서는 좋은 향이 났다.


 하지만 내가 그 친구를 부러워했던 이유는 따로 있었다. 고운 화장과 화사한 옷차림의 친구 엄마는 매일 버스를 타고 나와 비디오 가게를 갔다. 친구는 매일매일 비디오를 봤다.

 당시 우리 면에 하나밖에 없던 비디오 가게는 늘 가고 싶은 곳이었다. 인터넷도 모르던 시절, TV에서 소개해 준 비디오의 제목을 써놨다가 빌려오거나 뒷 면에 적힌 줄거리만 확인 후 빌려오곤 했다. 15세 이용가는 모른 척 빌려주셨지만, 18세 관람가는 짤 없었다. 그런데 그 친구가 반납하는 비디오에는 그 짤 없는 '18세 관람가'가 포함되어 있었다. 부러움은 배가 됐다.

 당시 할머니 할아버지와 살고 있던 나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게 비록 '공포 특급'이나 '탄생화로 알아보는 내 운명'같은 허접 데기더라도, 책은 OK 영상물은 NO였다. 본다면 만화나 '부왕 부왕 한' 영화가 아니라 '동물의 왕국'이나 역사를 다룬 다큐멘터리여야 했다. 조르고, 떼쓰고, 그래도 안 되면 몰래 봤다.

 그에 반해 그 친구는 매일매일, 굳이 요구하지 않아도 엄마와 새로운 영화들을 보고 있었다. 나도 더, 많이 보고 싶은데. 내가 모르는 세계에 먼저 들어가 더 넓은 세계를 경험하는 친구가, 젊은 엄마와 세련된 경험을 하는 친구가 부러웠다.  


 소문은 어디서부터 시작해, 어디로 오는 걸까. 어른들의 세계가 어쩌다 우리한테까지 흘러왔을까.

 그 친구의 아빠는 나이가 많다고 했다. 술을 많이 마시고, 성격이 거칠고, 농사를 많이 짓는다고. 친구의 엄마는 일을 많이 한다고 했다. 매일 논에서, 밭에서, 화장기 없는 얼굴로 인상을 쓰고 있다고. 그 친구와 한 동네에 사는 다른 친구가, 비밀이라는 듯 속삭였다. 별 것 아닌 이야기인데... 남의 일기장을 몰래 훔쳐본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중학교에 들어가서도 비디오를 열심히 봤다.  얼마 지나지 않아 DVD가, 그리고 수많은 불법 다운로드의 시기가 왔다. 비디오 플레이어는 자취를 감췄고, 나는 엄마와 살기 시작했다. 18세 이용가는 물론, 국내에 아직 개봉하지 않은 영화들도 마음껏 볼 수 있었다. 내가 잠들 때 즈음에 퇴근했던 엄마는 내가 어떤 영화를 보든 개의치 않았다. 생각만큼 더 넓은 세계가 펼쳐지진 않았다.


 어느 날, 할머니 댁에 가는 버스에 올랐다가 친구의 엄마를 만났다. 인사를 하자 화들짝 놀란 그녀는 내 기억 속의 모습과 달랐다. 그을린 얼굴엔 땀방울이 송송 맺혀 있었다. 어색하게 웃으며 잘 지내냐 묻는 얼굴엔 피로가 가득했다. 저는 잘 지내요. OO이도 잘 지내죠? 똑같지, 뭐. 공부를 너무 안 해. 하하하. 잠시 후, 버스에서 허둥지둥 내리는 그녀의 뒷모습에, 이유 없이 슬픔을 느꼈다.


 비디오테이프의 필름을 망가뜨리지 않기 위해 조심조심했던 일들이... 어쩌다 필름이 기기에 걸리기라도 하면 혼비백산했던 일들이 떠오른다. 그리고 왜인지... 가끔 그 친구의 엄마가 떠오른다. 친구의 얼굴은커녕, 이름조차도 기억이 나질 않는데 참 이상한 일이다. 너무 젊었던, 면에 하나밖에 없는 비디오 가게에 비디오를 빌리기 위해 매일 버스를 타고 오갔던 엄마.  지금도 영화를 자주 보실까. 이젠 넷플릭스나 왓챠로 영화를 보고 계시려나...

비디오를 되감을 때의 잠시간의 적막함. 덜컹덜컹하며 비디오가 들어가고 나오던 소리가 그리운 건 왜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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