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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복순이 Nov 12. 2022

물건 분실의 5단계

"어떤 걸로 살지 정했어?"

"음... '별이 빛나는 밤'? 아니다. 잠깐만..."

20분째 같은 자리에 망부석처럼 서 있던 나는 다시 뒤를 돌아 옆 섹션으로 갔다. 20분 전까지 20분 동안 망부석처럼 서 있던 곳이다. 

"부티크 호텔이 역시 낫겠지...?"

관심 없는 사람은 전혀 이해 못 할, 어떤 레고를 살지 고민하는 중이었다. 

레고에 빠진 나에게 남자 친구가 회사에서 받은 상품권 20만 원을 줬고, 함께 레고를 사기 위해 토이저러스를 향했다. 가기 전까지만 해도 갖고 싶은 것 중 아무거나 하나 집어오자 했건만... 막상 종류가 많아 고르지 못하고 있는 나를 남자 친구는 진득하니 기다려주고 있었다. 

"그래! 역시 건물이 멋있다!"

몇 번이나 집어 들었다 놓았다가를 반복하던 나는 마침내 '부티크 호텔'을 집어 들었다. 박스는 잠시 남자 친구에게 맡겨두고, 새어 나오는 웃음을 숨기지 못하고 가방을 뒤적거리며 상품권을 꺼냈다. 20만 원어치 상품권이 있으니, 남은 10만 원 정도만 결제를 하면 될 터였다. 상품권이 없었다면 손이 떨려 구매하지 못했을 금액이다(장난감이 30만 원이라니!). 

"... 어...?"

그런데, 봉투를 뒤적이던 나의 얼굴색이 점점 파랗게 변하기 시작했다. 

"왜 그래?"

심상치 않은 내 표정을 포착한 남자 친구가 걱정스레 물었다.

"상품권을... 두고 왔어."

가방 속에는 오늘 받은 10만 원만 있었다. 지난주 남자 친구가 준 상품권도 가방에 넣어왔다고 생각했는데, 봉투에는 몇 달 전 사은품으로 받은 5,000원짜리 상품권만 있었다. 내가 10만 원짜리 상품권이라고 생각하고 계속 들고 다녔던 상품권이 5,000원짜리 였던 것이다.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난 또 뭐라고. 우선 내가 사줄게. 집에 가서 찾아보면 있겠지."

어찌어찌 레고는 사고 나왔지만, 문제는 내 상품권 10만 원이었다. 대체 어딜 간 거지!


집에 도착한 나는 상품권이 있을만한 곳을 뒤지기 시작했다. 평소 들고 다니는 가방, 안 들고 다니는 가방, 서랍, 읽었던 책들, 책장... 어디에도 없었다. '혹시나' 였던 생각이 확신으로 변했다. 

상품권을 잃어버린 것이다. 


1. 물건 분실의 1단계 - 부정

무언가를 잃어버렸을 때, 가장 먼저 드는 생각은 '어디엔가 있겠지'이다. 잃어버린 게 아니라 잠시 눈에 안 띌 뿐이라고. 뒤졌던 곳을 다시 한번 뒤져보고. 다시 뒤졌던 곳을 또 뒤진다.

실제로 분명 같은 자리에 있는데, 몇 번을 봐도 안 보였던 게 다음 날 그 자리에 있었던 적이 있으니... 분실 초반에는 괜찮은 마음 가짐(?) 일 수 있다. 이번에도 나는 그렇게 믿었다. 내일 다시 뒤져 보면 거짓말처럼 물건이 나타날 것이라고.


2. 물건 분실의 2단계 - 분노

하지만 '내일 찾아보자'는 생각보다 쉽지 않다. 계속 같은 자리를 뒤지고 또 뒤졌다. 분노가 차올랐다. 아니, 집이 넓기는 얼마나 넓다고. 상품권이 많으면 얼마나 많다고! 그걸 대체 어디서, 어떻게 잃어버린단 말인가.

어렸을 때야 종종 물건을 잃어버리는 일이 있었지만, 나이 들고 나서(?) 무언가를 잃어버린 경험이 거의 없던 지라 더 혼란스러웠다. 


3. 물건 분실의 3단계 - 타협

혼란스러운 마음을 정리하고자 레고를 조립했다. 어차피 공돈인데 마음 쓰지 말자. 남자 친구도 꼭 필요했던 사람이 주웠다고 생각하고 잊어버리라고 했다. 

'그래. 내가 들고 다니다 어디에선가 흘렸고, 때마침 배가 고팠던 누군가가 주워 마트에서 장을 봤다고 생각하자...' 

하지만 생각이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아까운 것도 아까운 거지만 도대체 어디서 잃어버렸는지 답답해 미칠 노릇이었다. 못 찾는다 치고, 그렇다면 대체 어디서 잃어버렸다는 건가? 마지막으로 상품권을 본 게 언제지? 지난주 월요일 반차를 썼다. 그때도 레고를 사러 갈까 말까 고민했다. 온라인으로 전환 가능한 상품권인지 보려고 봉투를 열어서 내용물을 확인했던 기억이 났다. 에코백에 넣고 마트에 가려다가 '다음에 가자'며 가방을 놓고 카페를 갔다. 아! 그 가방에 들어있구나.


4. 물건 분실의 4단계 - 우울

문제는... 그 가방이 없어졌다는 거다.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심지어 나는 가방이 많지도 않다. 들고 다니는 가방이 '그' 에코백, 백팩, 크로스백. 이렇게 세 개뿐이었다. 용의자들을 줄 세워놨지만 에코백은 보이질 않았다. 파우치에 가까운, 얇은 천으로 된 가방이었지만 어디 구석에 짱 박혀 보이지 않을 정도의 크기는 또 아니었다. 혹시 주말에 갔던 집에 두고 왔었나 싶어 엄마에게도 물어봤지만 돌아온 대답은 '없다'였다. 가져간 적도 없으니 거기 있을 리가 없었다. 집에 가기 전, 백팩에서 빼 거실 바닥에 그대로 두고 갔던 게 떠올랐다. 


5. 물건 분실의 5단계 - 수용

가방을 통째로 잃어버렸다는 건데 도무지 생각이 나질 않았다. 아니, 애당초 그 가방을 들고 어딜 나간 기억이 없었다. 내가 주중에 하는 외출이라고는 헬스장 밖에 없었다. 혹시 어딘가에 단서가 있을까 싶어 지난주에 찍었던 사진들을 살펴보고 일기장도 뒤져봤다. 지난주 내가 외출한 곳은 도서관, 네일숍, 카페 두 군데였다. 그중 카페 한 곳은 마침 전경을 찍는다고 내 자리를 찍은 사진이 있었다. 가방은 없었다. 네일숍은 빈 손으로, 나머지 한 군데의 카페는 책 한 권만 들고 갔던 기억이 났다. 도서관은 백팩을 메고 갔었다. 내 기억 속 어디에도 에코백은 없었다.

그러다 문득, 기억이라는 게 얼마나 불확실한지에 생각이 미쳤다. 기억이 불확실하고 뒤죽박죽이니까 물건도 잃어버리는 것이다. 내 기억을 모두 '잘못됐다'라고 가정을 하자면... 


지난주 방문했던 모든 곳에 전화를 걸어보기로 했다. 내가 가방을 들고 밖을 나선 적이 없다고 생각했지만 잘못된 기억일 확률이 높았다. 가방에 발이 달리지 않고서야 집 안에 있어야 하는 가방이 없다면, 바깥에 있는 것이다. 

도서관에 먼저 걸었다. 제일 확률이 높은 곳이었다. 없다고 했다.

카페에 전화를 걸었다.

"지난주에 방문했었는데, 혹시 얇은 에코백 분실 없을까요?"

직원분이 '잠시만요'라고 하며 다시 답을 하기까지 몇 초나 걸렸을까. 심장이 두근두근거렸다. 없다고 해도 너무 실망하지 말자. 이미 도서관에 전화를 걸었을 때 실망이 너무 컸지만, 나 자신을 다독였다. 희망을 잃기엔 이르다. 

"아! 있네요. 혹시 엄청 얇은 에코백 맞나요? 립밤이랑 상품권? 같은 게 들어있어요."

"네! 맞아요!"

그 길로 바로 카페로 튀어가 가방을 찾아왔다. 여전히 가방을 들고 간 기억이 없었지만 가방은 거기에 있었다. 그날따라 바쁘게 카페를 나섰던 기억이 났다. 

상품권을 찾아 행복하면서도 허무했다. 물건을 잃어버리고 나의 행동을 복기하는 과정에서 조차 나는 내 기억이 확실하다는 가정을 했던 것이다. 잊었기에 물건도 잃어버렸던 것일 텐데... 

다음에 무언가를 잃어버린다면 '나의 기억은 잘못됐다'부터 시작을 해야겠다. 물론 더 이상 물건을 잃어버리지 않았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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